[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자연과 문명의 저편

《모노노케 히메》① 배경

 

자연과 문명의 저편

 

《모노노케 히메》의 포스터를 보자. 희고 거대한 들개가 무서운 눈으로 우리를 노려본다. 그 옆에 입술에 피를 묻힌 눈이 큰 소녀 역시 증오에 찬 눈으로 우리를 직시한다. 이들의 분노와 적의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출처 - 네이버 영화

들개-어미와 그의 인간-딸이 함께 싸우는 듯이 보이는 포스터와는 달리 1997년 작품《모노노케 히메》의 진짜 주인공은 아시타카라고 하는 소년이다. 신을 죽이기로 한 인간이 어떤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그 어리석음을 딛고 나아가기 위해 어떤 고난을 뚫고 나가야 하는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원한의 사슬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한 소년의 모험담을 그렸다. 포스터에는 살벌한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모녀가 그려져 있지만, 사실 이들이야말로 아시타카가 깊이 사랑한 존재들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작품인 것이다. 당신의 사랑에 피냄새가 나지 않는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원망함 없이 그와 함께 살 수 있겠는가?   
  
《모노노케 히메》의 기본 테마는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다. 우선 자연과 문명의 대립으로 인류사를 설명하는 전통으로부터 미야자키가 어떻게 탈출하는지를 공간들을 통해 들여다보자. 작품에서 그려지는 공간은 크게 세 곳이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원초의 숲! 아시타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의 비참을 탐구한다.  

 

동쪽, 맑은 눈 지닌 자의 고향 
아시타카는 자책과 원망 없이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자다. 증오의 온갖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그의 출신 배경은 이렇다.  

아시타카의 마을은 ‘에미시’로 불리며 숲 한가운데에 있다. 거의 푹 파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에 담벼락이 없고, 조와 피를 재배하는 들판보다 낮게 사람 다니는 길을 파는 식으로 경관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에미시 마을은 확실히 서쪽 마을과 대비된다. 타타라 제철 마을에서는 높은 성벽을 쌓고 성문 밖으로도 나무를 뾰족뾰족하게 깎아 적극적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하려고 한다. 전자가 상대에게 직접 맞서지 않고 피하고 달아나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똑같이 돌려주는 방식이다. 이런 에미시의 모습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도 나온다. 나우시카의 고향 마을인 바람 계곡도 담벼락은 없고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살아가는 장소는 풍경 아래에 파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에미시 마을 사람들이나 바람 계곡 사람들은 풍경의 흐름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는다.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이 마을에는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라도 들어왔다가 나갈 수 있지는 않다. 죽은 멧돼지를 위로하며 에미시의 무녀는 재앙신의 무덤을 마을에 짓고 제사를 지내주겠다고 하며 원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멧돼지에게 활을 쏘아 저주를 입게 된 아시타카는 불결하다며 마을 밖으로 내쫓았다. 물론 부족 사람들은 마을 계율을 관료제적으로 복종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아시타카의 여동생은 금기를 어기면서 오빠를 배웅한다. ‘언제까지나 오빠를 생각할거야!’ 동생은 자신을 구하다가 저주받은 몸이 되어 마을에서 쫓겨나는 오빠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한다. 동생의 약속이 주는 신성한 힘에 의지해 아시타카는 다른 마을에서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망루이다. 에미시 마을의 높은 망루는 설사 날지는 못하더라 해도 이들의 시야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마을을 벗어난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높은 산들과 초원도 건너고, 강도 건너야 했다. 시야의 넓음은 아시타카가 마을을 벗어나 서쪽으로 향하는 초반 장면에서, 그 뒤로 산이 몇 겹씩 펼쳐져 보이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넓은 시야가 한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경외심이다. 숲에 대한 경외심. 그래서 아시타카는 자신이 지은 잘못이 아닌데도, 죽음을 요구하는 저주를 감당하며, 결코 타인을 원망함 없이 증오에 먹히지 않기 위해 절제한다. 

 

심지어 난생 처음으로 사슴신의 숲에 들어가 고다마를 만나고도, 그들이 자신을 인도할지 위험에 빠트릴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숲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개체 하나하나의 이익이나 의견으로는 다 파악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치 앞을 몰라도 아시타카는 해야 할 바 즉 자기 운명을 이해하는 일에 나서며 걸어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에미시 사람들의 숲이 조엽수림이라고 한다. 조엽수림이란 고대 일본에 넓게 분포되어 있던 원시적 생명의 보고인데, 미야자키는 그 넓이만큼이나 깊이를 또한 강조한다. 아시타카의 속 깊은 경외심은 생사의 장엄한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이해를 에미시 문화가 철저히 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마을 장로들은 저주받은 자신의 후계자를 기꺼이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런 일들은 가능하고 또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재앙이 나에게 왜 닥치는지 그것에 화내기보다 중요한 일은 벌어진 사태의 전체 인과를 이해하기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 죽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생의 본질을 외면하게 된다. 

 

 

서쪽, 붉은 손 지닌 자의 고향 
아시타카가 찾아가는 두 번째 마을은 위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구불구불 긴 강을 끼고 있고, 곳곳에 벼농사를 하는 듯 농지가 잘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마을 한가운데에 불길이 치솟고 있고 무사들이 부인들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칼로 베려고 달려든다. 시장이 있지만 돈에 비해 물품이 빈약하고, 사람들은 굶주린 탓에 도둑질도 쉽게 생각한다. 아시타카는 길에서 만난 승려 지로와 폐허가 된 다른 마을 입구에서 밤에 잠을 청하게 되는데, 비석 아래에 깨진 밥그릇이 뒹굴고 있다. 전쟁, 사고, 병, 기아로 마을 전체가 파괴될 정도로 삶이 고단하다. 이 궁핍의 원인은 서쪽에 있다. 

아시타카가 서쪽 끝에 있는 타타라 마을에 도착한다. 타타라 마을은 철로 화기를 만드는 곳이다. 미야자키는 총을 만드는 곳이 나무를 없애는 곳이라고 해서, 바로 산림 훼손의 문제로 들어가지 않고 제철을 경유한다. 나무 하나를 베는 일에도, 벌목과 제철이 연결되어 있고 제철과 시장이 연결되어 있고 전쟁을 비롯한 각종 권력의 문제가 다 줄줄이 얽혀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대단히 험한데 이날 비가 와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무가 거의 없는 산비탈 벼랑길을 통과해야 하기에 길이 미끄럽다. 가파른 절벽 지대를 어렵게 지나면 왼쪽 호수를 끼고 오른쪽은 헐벗은 산에 닿은 작은 섬이 하나 나온다. 들어가려면 배를 타고 가거나 산허리에서 작은 다리를 통과해서 가야 하는데, 섬이자 마을인 이곳은 사방으로 뾰족하게 깎은 나무들이 촘촘히 박혀 있고 거기에 더해 높게 통나무들로 막아 세운 벽이 있다. 문이 있다는 점에서 에미시 마을과 닮았다. 하지만 동쪽에서는 말로써 여닫을 수 있던 문이 서쪽에서는 총과 화살로써만 뚫리거나 막힌다.

  
그런데 에미시 마을과 타타라 마을은 대단히 많이 닮았다. 우선 마을의 공간 배치가 그렇다. 두 부족 모두 마을 한가운데 공동의 장소를 크게 두었다. 타타라에서는 제철소가 있다. 어마무시한 사철을 녹여, 쇠총을 만들어 바깥에 파는 마을이다보니 모두에게 제일 중요한 곳이 밤낮없이 풀무질을 하며 불을 때야 하는 제철소다. 에미시 마을에서도 한가운데에 부족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놀이와 회의가 이루어지는 마을 회관이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공동체의 수장을 비롯해서 마을이 여성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에미시 마을에서는 할머니 샤먼이 아시타카의 앞날을 점으로 예고하며 그가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준다. 아시타카가 여행을 시작할 때, 금기임에도 불구하고 추방자에게 자신의 보물인 흑요석검을 주며 응원을 하는 것도 여동생이다. 타타라 마을은 수장이 에보시다(에보시의 엄청난 전투력과 강력한 카리스마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크샤나를 닮았다). 타타라 마을은 그 자체가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을 대별해 놓았다. 각자 가족을 이루기는 하지만 생활 공간은 성별대로 나누어 하는데, 마을의 주요한 임무인 제철이 여성들 차지이기 때문에 성안 여기저기에서 즐겁게 울리는 것이 여성들의 노동요다. 

 

미야자키는 앞서 아시타카가 방문한 논농사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밥 등을 사서 먹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타타라 마을에서 사람들은 철이나 총과 바꾸어 온 쌀을 함께 나누고 밥도 같이 해서 먹는다. 그리고 분위기로만 보면 에미시 마을보다 훨씬 더 견고한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사실 타타라는 에미시보다 훨씬 더 열려 있고 공동체 구성원을 잘 보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샤먼 할머니는 저주를 받은 아시타카가 마을에 함께 있어서는 곤란하다며 그를 추방했다. 열린 문이었지만 안에 있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내쫓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에보시는 어떤 마을에도 환영받지 못한 한센병 환자나 팔려 나온 여자들을 타타라에 받아들인다. 그리고 저주받은 이런 약자들을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다. 타타라의 닫힌 성벽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시타카의 번민이 시작된다.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저주를 입힌 ‘악한’을 찾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타라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제철소가 아니라 사실 에보시의 비밀 정원이다. 바로 이 정원에서 온몸이 짓물리는 고통에 시달리는 한센병 환자들이 온 나라 온 마을이 원하는 성능 좋은 총을 개발한다. 여자들이 힘차게 풀무질해서 녹인 철을 피와 진물로 으깨지다시피 한 손으로 하나하나 만든 것이 바로 총이다. 바로 그 총으로 전쟁이 일어난다. 한센병에 시달리는 노인은 저주받은 자신의 몸 때문에 원망스럽고 슬프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살고 싶다고 한다. 바로 그 살기 위한 방법이 총을 만드는 것이며 남을 죽이는 일인 것이다. 에보시는 한센병 환자들이 만든 총으로 밤사이 나무를 새로 심으려는 성성이들(원숭이들)을 쏜다. 낮에는 총을 팔아 쌀을 벌고, 그 총은 도처에서 사람들을 해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누군가를 살리고 지키기 위함이다.  

미야자키에게 정원은 나우시카의 바이오 연구실인 지하 온실, 거신병의 무기고인 라퓨타의 옥탑에서 가꾸는 정원, 붉은 돼지를 사랑하는 연인 지나의 휴식처 같이 인간이 자기 마음을 돌보고 생명에 대해 명상하는 장소이다. 에보시는 상황에 따라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한센병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 약초를 재배하는데에도 힘쓴다. 생명을 빼앗는 자가 치료하는 자일 수가 있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 역설의 한 가운데에서 저주받은 자기의 몸을 고쳐야 하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산과 에보시도 구해야 한다.    
   

사슴신의 숲, 순환하는 온 생명의 샘
《원령공주》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공간은 숲이다. 숲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우리 각자는 어디서부터 시작하게 될까? 일단 나무를 그리고, 일단 언덕을 그리고, 텅 빈 화폭을 보고 있어도 그곳은 이미 그리고 싶은 이미지들로 꽉 차 있다. 미야자키는 숲을 인간의 착취를 마냥 기다리는 무기력한 공간으로도,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정복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야생의 덤불로도 그리지 않는다. 많은 관객들이 앞서 발표한 《토토로》가 집 뒤 큰 녹나무에 사는 씨앗의 정령, 푹신한 회색 하마씨 토토로로 상냥한 자연을 표현한 것을 떠올리며 극장에 갔다가 기겁해서 나왔다고 한다. 일단 미야자키 자연 묘사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숲과 마을은 야생과 문명이라는 이분법이 작동하는 무대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농사짓고 버젓이 사무라이까지 두고 있는 마을이야말로 야만적이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논이 있는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금 쪼가리 몇 개를 얻으려고 이방인을 해칠 생각을 거리낌 없이 한다. 제철 마을도 문명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마을에는 보통의 도시에서 쫓겨난 한센병 환자들, 부랑자들, 팔려 나온 여자들이 살기 때문이다. 가장 숲속 깊이 파묻혀 있는 에미시족이야말로 제대로 옷을 갖추어 입고 붉게 반짝이는 옻칠한 그릇을 쓰고 멋지게 깎고 다듬은 흑요석 검을 어린 소녀도 보물로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문화적이었다. 이는 《라퓨타》에서 거신병이 정원을 가꾸는 데에서도 잘 표현된 바 있다. 

그래서 둘째, 생명과 기계가 대립하지 않듯 자연과 문화가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물이 모두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숲의 동식물들이 모두 감정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숲에는 다양한 영혼들이 산다. 순수한 마음으로 방문자를 놀리거나 환영하는 맑은 숲 지킴이 고다마가 있고, 화내고 분노하는 흰 늑대의 신이나 자긍심에 가득 차 죽음을 불사하는 멧돼지의 신도 있다. 밤에 타타라신으로 변한 사슴신을 맞이하기 위해 바람에 따라 흔들리면서 대합창을 하는 고다마의 모습은 파도가 흔들리는 듯하다. 

숲은 신비하고 영험하다. 이 점은 숲의 동식물들은 완전히 인격화되어 있고 그들은 다른 동식물들과 돕거나 다투면서 각자의 감정대로 번뇌를 겪는다는 것에서 보다 선명해진다. 특히 미야자키는 벌목으로 먹을 것과 쉴 곳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총을 맞고 숲에서 쫓겨난 맷돼지의 분노를 정신을 잃은 미꾸라지들이 무더기로 꿈틀대는 듯한 끔찍한 모습으로 표현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몸의 온 모공 하나하나로부터 엄청난 분노가 끓어 터지는 모습을 끔찍하게도 잘 그린다. 그 분노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큰 나무가 쓰러지고 소녀가 넘어지며 소년은 화를 입는다. 숲의 모든 것은 감정을 지니고 살며 지금 그들의 화는 저주로 변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죽음으로 내몬다. 미야자키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하고 서러운지를 저주받은 아시타카의 팔로써 표현함으로써 영혼을 지닌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숲이 사랑이나 증오와 같은 감정들로 가득하고, 그런 감정의 계기가 되는 잔혹한 살해나 뜻밖의 저주도 빽빽이 차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나는 마음이 커지고 시야가 확장되는 듯하다. 선악의 저편이란 이런 세계관 속에서 가능할 것 같다. 자연에는 좋은 것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순정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남겨둔다는 발상은 겉으로만 보면 착하고 올바른 생각 같다. 하지만 그 ‘순정함’이란 누구의 순정함일까?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바이러스나 질병과 싸워야 한다고 하지만, 썩어 문드러질 이 육신을 먹고 살찔 자연의 미생물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어처구니 없는 발상일 수 있다. 

 

셋째, 그러면서도 숲은 위계적이다. 이 모든 동식물들은 최고의 신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서로 도와달라고 청한다. 그 최고 주재자는 사슴신으로 낮에는 성스러운 물을 마시며 고요히 서쪽 숲을 산책하지만, 밤에는 타다라 신이 되어 식물들을 키운다. 낮에는 네 발을 달고 인간-젊은이의 얼굴을 한 사슴신은 밤에는 두 발로 걷지만 사슴의 얼굴을 한 거인의 모습으로 숲을 관장한다. 미야자키는 사슴신을 숲에 사는 동물들의 순환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발을 내딛으면 새로 싹이 돋지만 발을 뗀 자리에서는 순식간에 풀이 말라 시들어버린다. 사슴신은 총상 입은 아시타카를 바로 치료해주는데 순환하는 힘이므로 상처를 금방 회복시켜준 것이다. 동물들은 인간들이 왕이나 사제에게 복을 빌 듯이 사슴신을 찾아 경배하고 소원을 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원령공주》의 숲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경외의 숲이다. 전체적으로 숲의 색조, 그 녹색이 대단히 풍부하면서도 깊다. 이끼가 두텁게 쌓여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토토로》를 만든 직후에 지브리가 자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생태적 회사가 되었다고 자조한 적이 있다. 이제 사람들은 귀여운 토토로가 사는 장소 쯤으로 숲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귀엽다는 것은 나보다 어리고 약한 대상에 대해 보호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자연을 보호하자라든가, 지구가 아프다든가 하는 속된 생태주의의 구호는 모두 이런 귀여운 자연관에 바탕을 둔다. 《원령공주》는 지브리가 이런 유치한 자연보호의 선봉장이 되는 것을 꺼린 미야자키가 과감히 그려낸 작품이다.  

 

 

공생의 조엽수림 문화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관을 지탱하는 것은 조엽수림 문화론이다. 조엽수림이라는 것은 과거 일본의 서남부를  뒤덮었던 사철 울창한 상록활엽수림으로 뒤덮인 숲을 뜻한다. 녹나무, 메밀잣밤나무, 참나무, 동백나무 등이 조엽수림대의 대표적 나무들이다. 중앙아시아 히말라야 산맥 기슭을 기점으로 중국남서부를 거쳐 일본에까지 퍼져 있던 상록활엽들의 세계는, 직접 전파 없이 비슷한 문화를 형성하게 했는데 토란이나 고구마를 즐겨 먹고 나토나 떡처럼 끈적한 식감의 음식을 즐기는 등에서 그 일례를 찾아볼 수 있다. 차, 비단, 누룩으로 빚은 술, 아시타카가 쓰는 칠기 그릇도 마찬가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카오 사스케의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에서 큰 영감을 받으며 조엽문화론에 심취해갔고,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가고시마현의 야쿠시마를 배경으로 『모노노케 히메』를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조엽수림에 깊이 빠져든 것은 패전 후 미국발 민주주의로 급속히 물들어가는 무자각적인 민족주의와 배금주의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아서였다. 패전했건만 아직도 주변에서는 만주에서 사람을 죽인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드는 어른들이 있었고, 청년들은 돈 되는 일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녀야 했던 것이다. 과연 조엽수림 문화란 무엇이기에, 그것을 통해 미야자키가 자신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고 상쾌하게 작가로서도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도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살펴보고 싶은 점은 조엽수림 문화의 본질 같은 것이 아니다. 『원령공주』에서 미야자키가 해석하는 조엽수림 문화의 특징은 우선 아시타카의 고향인 에미시 마을의 풍습에서, 그리고 아시타카의 성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특한 빛깔과 무늬의 칠기를 쓴다든가, 흑요석검을 쓴다든가, 조와 기장을 기르고, 담을 쌓아 적이나 동물들과 대적하기보다는 망루를 설치하거나 길을 낮춤으로써 타자와 자기 사이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절할 수 있다든가 하는 물질적 차원에서 발견되는 겸손한 태도가 있다. 

그런데 현재 일본의 조엽수림은 1.2%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이 어떻게 된 과정인지를 미야자키는 분석한다. 토토로가 왜 그토록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기에 여기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철의 사용이었다. 14~16세기 무로마치 시대(아시카가 막부의 집권), 풍요로워진 일본은 쇼군과 다이묘 사이의 관계가 느슨해져서 도처에서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전쟁을 뒷받침할 무기 제조와 상업이 다이묘들의 후원 아래 크게 발달했다. 이 무기의 원료가 되는 것이 철이었고, 철을 생산해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다이묘들 사이의 각축장에서 어떤 집단이 살길을 마련할 수 있는 바가 되었다. 

에보시의 타타라 마을이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그려진다. 일본에는 철광석은 별로 없었지만, 화산 덕분에 사철(沙鐵)이 많았고 이 사철을 제련해 금속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화력이 필요했으므로 막대한 숲의 나무를 태워야만 했다. 그리고 사철을 줍기 위해서도 강, 산 등을 헤집어내야 했다. 막대한 인력이 필요한 작업이어서 보통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다. 미야자키는 이 정도의 일에 달려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란 어떤 존재들인가를 연구했다. 그래서 나온 인간들이 바로 에보시의 사람들인 것이다. 팔려간 여자들, 한센병 환자, 달리 남자 구실을 못하는 소몰이꾼 등. 실제로 철생산에 여자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드물었다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과감하게 이 막장의 노동이 생존에 있어 최후의 동아줄이 되는 경우를 생각했던 것이다. 즉 숲이 사라진 이유는 살기에 절박한 이들이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한 결과였다. 생존이 극도로 위협받게 된, 팔려간 여자들, 죽어가는 나병 환자들이, 어떻게든 살 공간을 만들려고 애쓴 결과 장기적으로는 누구도 살 수 없는 대지를 만들게 된 것이다. 

사슴신의 숲은 낮에도 캄캄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이다. 대단히 어둡다. 미야자키는 높은 봉우리에서 아래로 내려본다든가, 깊은 계곡에서 위를 올려다본다든가 하는 《라퓨타》나 《붉은 돼지》의 조감 기법을 쓰지 않는다. 대신 숲에서 강조되는 것은 어떤 심층성, 근원성이며 그것은 어두움으로 표현된다. 숲은 오래되고 오래되어 천천히 세월을 품고 작은 못 위 흙더미에서 생명의 시간을 응축하고 있는 한 그루 나무가 보여주듯, 물 한 방울, 이끼 한 톨조차 신비롭고 성스럽다. 

 

이 성스러움의 근저에 있는 것은 순환하는 무자비한 힘이다. 이 압도적인 힘을 짙은 녹빛과 숲 아래 호수의 검은 물빛으로 보여준다. 자기 목을 잃은 타타리가미가 해가 떠오르기 전에 크게 몸을 부풀려서 숲을 다 덮었을 때, 마침내 산과 아시타카가 사슴신에게 목을 돌려주게 되었을 때, 거대한 바람이 숲 전체를 휩쓸고 공격을 받아 불타는 타타라 마을을 아예 다 부숴서 날려버릴 때, 인간은 속속무책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짱구를 굴려도 순환하며 압도하는 자연의 힘 앞에서 제 자랑할 곳이 없다. 산과 아시타카, 그리고 지로가 잘린 사슴신의 목을 두 손 높이 올려 바치는 모습은 인간이 자연에게 보여야 할 경외심을 나타낸다.   

타이다라봇치는 결국 해가 떠오르기 전에 완전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해 호수에 쓰러지고 그가 주재하던 숲은 모두 말라 썩어버린다. 그리고 곧바로 들판과 산에 풀이 돋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벌목되어 황량해진 타타라 마을의 숲을 사슴신이 되돌려주는 셈이다. 미야자키는 그렇게 되살아난 숲의 온화한 풍경이 현대 일본인이 생각하는 숲이라고 한다(『반환점』, 37쪽). 

 

아시타카가 말하듯 사슴신은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순환의 형태를 숲에 부여할 것이다. 미야자키가 조엽수림에서 현대 일본의 숲으로라고 하는 이러한 과정을 진화론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것은 아시타카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새로움도 인간 이해를 넘어서 있다. 에미시족의 후예는 타타라 마을에서 에보시와 그의 사람들은 살아난 나무를 다시 베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숲은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둡고 고요하고 그 전부의 생생한 생명력의 신비를 고스란히 품은 사슴신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얼굴을 다시 떠올려보자. 붉은 돼지 포르코의 썬글라스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인간에게 타인의 얼굴은 의미를 함께 만들어내고 공생의 길을 모색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그런데 사슴신의 눈과 표정은 인간만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신은 나고 썩는 모든 것을 응시한다. 이런 시선 앞에서 인간이 보게 될 것은 자기 어리석음일 뿐이리라. 미야자키는 사슴신의 숲을 통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보여준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가 숲을 사유하려고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인간이 앞으로 가지고 가야 할 세계관 등을 고민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그는 환경을 보호하자거나 순수한 숲을 재생시키자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과연 자연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대지는 모든 것을 거대한 힘으로 순환시키고 또 순환시킨다. 지구 역사상 6번의 대멸종이 있었고, 역사 이래 어떤 문명도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지 않다. 인간 한 사람, 민족 하나의 힘을 완전히 넘어서는 힘 위에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을 근원적으로 생각해서 일상의 철학을 만들 필요가 있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