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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제각각의 모습으로 크다

by 북드라망 2023. 11. 30.

제각각의 모습으로 크다 



미스테리의 신, 토토로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다섯 살짜리 메이가 그들한테 붙여준 이름입니다.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들은 아주 옛날, 이 나라에 거의 사람이 없었을 때부터 이곳 숲속에 살아왔습니다. 수명도 수천 년 이상이라고 합니다. 큰 토토로는 2미터 이상이 되기도 합니다. 푹신푹신한 털에 덮인 큰 수리부엉이인지 너구리인지 곰인지, 이 생물은 요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위협하지는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느긋하게 살아왔습니다. 숲속의 동굴이나 고목의 빈 구멍에 살며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이 영화의 주인공 사츠키와 메이의 어린 자매들한테는 들키고 말았습니다.
   소란스러움이 싫어 인간들과 함께한 적은 한번도 없던 토토로들이었지만, 사츠키와 메이에게는 마음을 열어줍니다.(「토토로란」,『출발점』, 367~368)


《토토로》의 주인공은 토토로이다. 후에 푹신하다 하여, 봉제 인형계의 신이 되지만, 처음에 기획 단계에서 토토로는 마을의 귀신쯤으로 간주되어 제작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괴이하고 무섭고 그다지 동심 친화적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였다. 서정적이고 온화한 시골 마을을 상징한다지만, 토토로 주변에서 형성되는 분위기는 사실 괴이하다. 미야자키는 왜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인지 멀리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괴물을 창조했는가? 

 

토토로는 메이가 ‘트롤’을 나름대로 발음하면서 나온 이름이다. 메이의 집이 일옥과 양옥을 합친 것이듯 토토로도 현실 속 여러 가지 동식물을 합체한 모습이다. 먼저 그 외모부터 살펴보자. 얼굴은 고양이가 아닌가 싶다. 수염이 양쪽을 삐죽삐죽 잘 뻗어난 것이 그렇다. 목이 없이 전체적으로 커다란 둥근 모습은 하마를 닮았다. 귀가 쫑긋 솟아있는 것까지 말이다. 히프가 두툼한 것, 꼬리가 짧은 것 역시 그렇다. 하지만 토토로는 하마와 달리 서 있고 푹신한 털을 가졌다. 녹색이 많이 가미된 회색의 털은 배부분의 흰 털을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 메이가 그 위에서 푹 잠을 잘 수 있는 침대가 되기도 한다. 엄청난 몸집으로 보아 육식 공룡 같지만, 풀을 잘 갈게 생긴 튼튼-어금니로 보아 초식동물이다. 점프를 잘 하고, 회전도 잘 한다. 매우 크지만 몹시 날렵하고 가볍다. 손이 아니라 손톱이 긴 것도 특징이다. 두툼한 외모지만 손으로 매우 섬세하게 물건을 집는다. 

 

출처 - 다음 영화

 

토토로의 외모적 특징에서 으뜸은 표정이다. 큰 토토로의 작은 눈은 낯선 것을 발견할 때 초롱초롱 왕방울만하게 커진다. 입이 매우 큰데 치열은 가지런하다. 슬픈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토토로는 즐거울 때 새하얀 이빨을 반짝이며 크게 웃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웃는 얼굴을 닮았다. 


토토로의 일상을 보자. 토토로는 낮에는 충분히 자고 밤에는 일하고 논다. 토토로의 집은 아주 단정한데 나무 기둥 아래 잠잘 곳과 도토리 모을 곳 등을 간소하게 잘 마련해놓았다. 한참 꿈나라에 가 있을 때 메이가 집 안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토토로는 메이의 친구가 되었다. 특히 달밤에는 씨앗을 키우기 위해 들판이나 정원에서 돌고 점프를 하며 주술 행위를 한다. 씨앗을 틔울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자라게 될지를 상상한다. 일을 끝내면 팽이 비행기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오르는데, 그 흰 배 위에 중토토로, 소토토로, 메이와 사츠키까지 태우고 기뻐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한다. 천공의 성이 하늘을 향한 나무의 꿈이었듯, 토토로 역시 하늘을 향한 나무의 꿈이다. 그리고 이 나무는 솟아오를 때 부와 권력이 아니라, 아이들의 신나고 즐거운 마음을 싣는다. 놀이를 마칠 때에는 함께 나무 끝에서 오카리나 부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비오는 날에는 가끔 고양이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여기서 토토로의 성품을 알아볼 수 있다. 사츠키가 아빠를 기다리다 잠이 든 메이를 업고 비를 맞고 있을 때 토토로가 나타났다. 토토로가 자매끼리만 어두운 숲에 있는 것이 걱정되어서 나타났을까? 토토로가 메이를 내려다보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아니, 토토로는 자신의 머위 잎사귀 모자에서 코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집중하며 음미하는 중이다. 토토로는 그저 고양이 버스를 탈 일이 있어 정류장에 나온 것이 아닐까? 토토로는 메이가 ‘토토로?’라고 부르기 전에는 소녀를 내려다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누군가 불러야 답하는 존재, 나중에 메이가 토토로의 나무에 찾아가 간절히 기도하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토토로는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고집하지는 않는 존재 같다. 


메이는, 토토로가 비를 맞는 것이 걱정되어 우산을 빌려준다. 물론 메이는 토토로가 식물의 정령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숲속에, 나무 아래에 사는 토토로에게, 비란 피할 대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토토로는 주는 대로 받고 우산에 대해 궁리하다 메이가 가르쳐주는 대로 우산을 써본다.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산 위로 투툭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전율하며 감탄한다. 쿵! 점프하자 나뭇가지에 송글송글 맺혀 있던 빗방울이 더 크게 우두두 떨어지고, 토토로는 이 모든 것을 음악처럼 즐긴다. 토토로는 너무 행복하다! 메이는 우산을 주었으나 토토로가 받은 것은 악기였다. 과연, 토토로는 오카리나 불기도 좋아했으니 그의 큰 취미 중 하나가 음악임을 알겠다. 


악기-우산을 받은 뒤 토토로는 도토리 주머니를 메이에게 준다. 그런데 그것이 답례일까? 그러고 보니 토토로가 타고 다니는 팽이 역시, 아주 먼 옛날에 누가 토토로와 만나 그를 즐겁게 하기 위해 선물로 준 것인지 모른다. 오카리나도 마찬가지다. 토토로는 선물을 좋아하지만 그것을 다른 뭔가로 등가교환하지 않는다. 앞에서 토토로가 어두운 밤 아빠 걱정, 동생 걱정에 바쁜 메이를 거의 걱정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당연하다. 밤의 정령이기도 한 토토로에게 깊은 밤, 어두운 숲, 많은 비는 생명을 키우는데 꼭 필요한 좋은 것들이다. 메이와 친구가 되었지만 둘이 서로를 막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나중에 메이가 옥수수 배달로 엄마 찾아 삼 만리를 찍게 될 때,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토토로는 고양이 버스를 불러줄 뿐 같이 타고 가지는 않는다. 미야자키는 정령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분명히 한다. 토토로는 아이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기억하건, 두려워하며 잊어버리든 상관하지 않는다. 오로지 키우고 노래하고 바람을 즐긴다.   


토토로가 악기-우산의 소리에 크게 기뻐할 때 숲속에서 8개의 발로 달리는 고양이 버스가 섬뜩하게 귀여운 눈매와 토토로와 똑같은 세모 미소를 하고 달려온다. 너무 급하게 뛰어온 덕분에 서야 할 자리에 못 정차해서 후진까지 하는데, 토토로는 이 버스를 타고 휭 가버린다. 농사에 바쁜 마을 어른들은 이 고양이 버스를 보지 못하고 그저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할 일에 매진하게 되면 고양이 버스를 못보게 되는가보다. 토토로는 푹신하고 재치 있는 식물의 정령이다. 잠자기, 빗소리 듣기, 하늘을 날아오르기 등 토토로에게 사는 일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투성이다. 토토로는 우산이라서, 아이라서, 불쌍하니까, 등등의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싹을 틔워야 하는 제 관심에 집중하면서 만물을 바라보기에 때로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자기에게 집중하면서 제 할 일을 하는 토토로를 통해 숲이, 자연이, 삶이란 나날의 평범 자체가 버릴 것 하나 없는 기쁨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상한 정상 가족
토토로가 그저 착한 정령이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미소를 지닌 농사꾼에 음악가라는 설정에서 예측할 수 있지만, 작품 속 인물들도 평범하지 않다. 그것을 사츠키와 메이 자매를 둘러싼 가족을 통해 알 수 있다. 


《토토로》는 엄마가 아파 이사를 온다라는 설정 때문에 어딘가 결핍을 강조하는 가족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관심이 행복한 정상 가족에 있지 않음은 작품의 끝에서 확실히 나타난다. 전체 이야기를 잘 떠올려보자. 엄마, 아빠, 자매, 이 집의 구성원 4명은 단 한번도 같은 장면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빠-자매, 엄마-자매까지는 가능하다. 4명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은 병원에서지만, 엄마의 병실에 네 사람이 있지는 않다. 가족이 함께 있다면, 병원에서나 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 병원에서 가족들은 다른 환자들, 의사들, 심지어 나중에는 병실 밖 나뭇가지 위의 고양이-버스와 함께이다. 그러므로 미야자키가 그리는 가족은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는, 늘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메이와 사츠키네 집을 날마다 드나드는 이들로 할머니가 나온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왜 할머니일까? 농번기이기 때문이다. 칸다네 부모님처럼, 아침부터 논에 나가야 하는 어른들이 이웃집 아이를 돌봐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칸다네 할머니는 자기 손자 이상으로 아이들을 만지고 어르며 키운다. 네모 얼굴에 큰 입, 빠진 이의 할머니는 전작 《라퓨타》의 도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푸근하고 자애롭다. 이사 온 집을 청소해주시기도 하고, 아이들이 엄마 걱정을 할 때 빨래를 개며 용기를 내라고도 해주신다. 메이를 다시 찾았을 때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 잃어버린 아이 때문에 당신이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물론 아빠가 할머니에게 따로 사례비를 드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사랑은 단순한 용돈 벌이를 넘어선다. 


그러고 보니 영화 도입부에서 이삿짐을 나르는 삼륜차에도 운전사, 아버지, 아이들 이런 구성이었다. 이사 오자마자 할머니가 나타나셨고, 할머니의 손자 칸다가 점심을 배달해 오고, 막 도착한 새 가족을 향한 동네 사람들의 편안한 환대는 이어졌었다. 정말 인상적인 점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 부모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이를 겨우 찾은 뒤, 자매는 양쪽으로 칸다와 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토토로》는 가족 영화라지만, 가족이 함께 있는 장면이 없다. 사츠키가 다투었던 학교 친구 칸다와 새롭게 우정을 쌓고, 메이가 동네 어른들을 부모 못지않게 믿고 따르게 되면서 작품이 끝나는 셈이다. 그러므로 칸다와 할머니는 엄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리물이 아니다. 이웃은 엄마의 자리를 대체하지 않는다. 

 

출처 - 다음 영화


그럼 엄마와 아빠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자. 엄마는 자신이 아이들 투정을 조금 들어주겠다고 한다. 아빠는 밤으로 공부에 바빠 아침에 초등학생 딸의 도시락도 못 싸주고, 낮에는 글 쓰느라 둘째 점심도 놓친다. 아이들 끼니보다 자기 연구가 더 중요하다. 그래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물론 딸들도 아빠가 밥도 안 챙겨준다며 서운해하지 않는다. 사츠키는 아빠와 동생 밥을 챙기지만 그것도 엄마를 대신해서는 아니다. 셋 중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이런 사츠키가 대견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옆집 칸다도 노는 것은 아니다. 농번기에 농사꾼 아들놈이 해야 할 일도 산처럼 많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 몫의 일을 해내면서 식구들 이웃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미야자키는 가족을 피의 애정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로 그리지 않는다. 식구란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돕고 사는 관계이다. 가족이 되기 위해, 즉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어떤 자격이 있지는 않다. 가족에 대한 이런 느슨한 정의 덕분에 아이들이 토토로를 만날 수 있었다. 또 나중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독특한 가족이 탄생할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츠키와 메이는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자매는 늦은 저녁을 위해 칸다네 집으로 가지 않을까? 앤딩씬에 메이가 아기를 돌보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 동생은 당연히 아니다.  

 


자기답게 움직이자 
가족이라서 ‘함께’가 아니라, 각자 자신이 할 바를 하는 ‘하면서 함께’이다. 그런데 이 함께도 구체적으로 보면 제각각의 보폭이다. 이를 사츠키와 메이의 두 다리가 잘 보여준다. 언니인 사츠키는 줄곧 달리고, 동생인 메이는 대부분 걷는다. 

 

걷기와 달리기를 통해 아이들의 캐릭터가 확실히 드러난다. 사츠키가 뛰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빠보다 일찍 일어나 밥하고 도시락 싸고, 동생 머리 양 갈래로 묶고, 비 오는 날 넘어진 동생을 닦이고 업어 오고, 잃어버린 동생을 위해 토토로를 찾아내고. 사츠키의 일상은 온통 해야만 하는 일들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츠키는 목적론자이다. 사츠키에게는 엄마의 퇴원이야말로 목적 중의 목적이다.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사츠키가 하는 모든 일은 죽음과의 투쟁이 된다. 결국 사츠키는 힘껏 내달려도, 아무리 애써도, 자기 힘으로는 누구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토토로를 찾아간다. 신에게 기도하기로 한 것이다. 신 또한 목적 중의 목적이시니, 사츠키의 달리기는 목적을 향한 기투이다. 


메이는 다르다. 메이는 토토로를 먼저 만났지만, 녹나무에 찾아가 엄마를 살려달라 기도하지 않는다. 메이가 토토로를 찾아갈 때에는 언니와 아빠에게도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메이는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언니의 걱정을 듣고, 단호히 옥수수를 들고 길을 나섰다. 메이는 기도하지 않는다, 메이는 뛰지 않는다. 자기의 발걸음으로 결연히 엄마를 구하러 간다. 《토토로》의 명장면 중 하나는 옥수수 배달을 나선 메이가 마을 어귀에서, 지쳐 앉아 있는 씬이다. 이때 메이는 길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엄마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 확실히 믿고 있다. 다만 길이 생각보다 멀어서, 발이 생각보다 조금 아파서, 잠깐 앉아 있을 뿐이다. 메이가 집을 나와 논두렁 사잇길을 걷기 시작할 때 와이드 앵글로 장면이 커진다. 메이는 누군가를 구하러 가는 길이 아주 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넓이에 압도되지 않는다. 


미야자키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비행’에 관심을 열었다면, 토토로에서는 달리기를 탐구했다. 오죽했으면 지네처럼 발이 많은 고양이가, 바퀴가 없는데도 달리겠는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토토로》를 작업하면서 5살 10살 아이가 달리는 모습이 잘 표현되지 않자, 동화(動畫) 작가들을 위해 ‘달리기’ 강의를 열기도 했다. 일단은 달리기 자체가 주는 활력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구체적으로는 활력이 폭발하는 달리기를 잘 그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화가들의 머릿속에 달리기에 대한 전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의 달리기, 곤충의 달리기가 다 다르듯, 사람도 5살의 달리기와 6살의 달리기가 다르다. 미야자키는 지네처럼 많은 발이 달린 고양이 버스가 달리기하는 모습도, 실제 고양이나 지네를 관찰해서 합성했는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지만 환상이어서 어느 정도는 과감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츠키나 메이의 달리기는 다르다. 작품 속에서 아빠가 게다를 신고 달리는 모습도 나오는데, 게다를 신었는지 운동화를 신었는지 슬리퍼를 신었는지에 따라서도 움직임은 달라질 수 있다. 


달리는 자는 기도할 곳을 찾는다. 걷는 자는 들어야 할 것을 쥔다. 사람을 구하는 데에는 기도하는 마음과 도우려는 마음 모두가 필요하다. 하지만 무턱대고 달리고 헤매기보다는 지금 자기가 할 일을, 그 과정과 결과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감행하는 메이는 다음과 같은 사람의 주목을 끌 것이다. 목적 앞에 허덕이기보다 그저 더 멀리 걷고 싶은 사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사츠키보다 메이 편을 들 필요는 없다.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자매는 함께 미스테리한 토토로와 자라는 기쁨을 누리니까 말이다. 전형은 없고, 자기만의 방식이 있으며, 그렇게 다른 상태로 함께 살면 된다!    

 

출처 - 다음 영화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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