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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그대들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by 북드라망 2023. 11. 23.

그대들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인생 자체의 아들이며 딸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서 오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을 줘도 되지만 당신의 생각을 주어선 안 된다. 그들의 마음은 당신이 방문할 수 없는, 꿈속에서도 방문할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칼릴 지브란)

 


미야자키 하야오를 찾아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하고 많은 이들이 작품을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해석했다. 여기에는 한국 개봉일 직전에 일본 지브리에서 진행된 스즈키 도시오의 인터뷰(링크)도 한몫을 했다. 스즈키 도시오가 주인공을 이끄는 왜가리-남자는 자신이며, 순수하게 탑을 계속 쌓아나가라고 격려하는 큰할아버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선배인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勲; 1935~2018)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마히토가 일찍 돌아가신 엄마 때문에 괴로워한다든지, 그의 아버지가 전쟁 중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허풍쟁이 바보처럼 나오는 것도 자전적 요소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야자키는 정말 작품에 자신을 투사했을까? 


작품에 미야자키의 ‘얼굴’이 직접 나오는 것이 한 편 있다. 바로 《마녀 배달부 키키》이다. 키키가 하늘에서 성공적으로 톰보를 구하고 내려오는 모습을 쇼윈도우의 텔레비전에서 보고 환호하는 군중 중 한명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티비 앞, 오른쪽 상단에 얼굴이 둥글네모나게 큰 아저씨가 입을 크게 벌리며 기뻐한다. 미야자키 자신도 몰랐다고 하는데, 스텝 중 한 명이 무엇이든 즐겁게 바라보는 미야상의 얼굴을 슬쩍 끼워넣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자신이 스스로를 투사한 작품은 두 개다. 하나는 자신의 현실을 그린 것으로, 과로로 머리가 두부처럼 푸석해진 중년 남자를 그린 《붉은 돼지》다. 전연령 관람가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돼지가 담배를 뻑뻑 피고, 새빨간 와인을 캬~ 들이키기까지 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상을 그린 것으로 《벼랑 위의 포뇨》다. 포뇨의 친구 쇼스케는 미야상인데, 미야자키의 부인이 영화를 보고 ‘자기를 그렸네요~’라고 감상평을 했다 한다. 아버지 없는 집안을 씩씩하게 돌보고, 인어도 인간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넓은 싸나이! 쓰나미로 실종된 엄마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서고, 인간의 길을 걷기로 한 인어를 응원한다! 미야자키는 사려 깊고 헌신적인 소년에 자기를 투사했다. 


미야자키와 가장 거리가 먼 남자 캐릭터로도 역시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기 외모에만 집착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씨다. 하울은 자기 방에 온갖 알록달록한 보석들을 늘어 놓고 미모만 관리한다.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먹고 싶으면 먹는 제멋대로의 불규칙한 생활 때문에 집안도 엉망이다. 미야자키는 엄청 성실하고 자기 한계를 밀고 또 밀고 나가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현실에 하울 같은 인간이 나타났다가는 한 소리 들을 것이 뻔하다. ‘너밖에 모르는 인간, 꺼져!’ 《붉은 돼지》에도 잘 나오지만, 미야상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는 아이들을 웃기기 위해서지 자기 그림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이쁜 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하울이야말로 미야상이 딱 싫어하는 인간형이다.  

 

 

출처 - 다음 영화

 


다른 하나는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미야상과 거리가 먼 《원령공주》의 아시타카다. 아시타카는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 그럼에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이웃을 돕고 소녀를 구한다. 공평무사한 시선으로 멀리 더 멀리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모두가 잘 살 수 있는지를 고민 또 고민한다. 정말로 자기애라고는 한 방울도 없어 보인다. 이토록 순수한 아시타카야말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큰할아버지 뜻을 이어받아 악의 없는 순수한 탑을 쌓아올릴 만하다. 


그런데 사실 미야자키의 심벌하면 역시 ‘담배’다. 미야자키의 작품에는 실제로도 담배 피우는 인물이 많이 나온다. 《라퓨타》의 도라 할머니라든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온천장 마녀 유바바라든가, 담배에 찌들어 있는 중년 아저씨보다 담배를 즐기는 할머니들이 미야상과 더 닮아 보인다. 굳이 남자 캐릭터에서 미야상을 찾지 않아도 된다면 줄담배꾼들이야말로 미야상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담배쟁이는 키리코 할머니이니까 미야상은 자신을 키리코상에 빙의시켰을 수도 있다. 붉은 돼지가 좀 지쳐 있기는 했지만, 담배를 피우는 어른들은 모두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것도 트레이닝을 시키면서 말이다. 붉은 돼지는 어린 정비공 피오에게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는 방법에 대해 조언했고, 도라는 파즈와 시타에게 멋지게 전투를 치르는 법과 함께 비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유바바는 성실하게 제 몫을 해내는 법, 인사하는 법, 약속을 지키는 법을 치히로에게 알려주었다. 


키리코는 무엇을 가르쳤나? 키리코는 배를 모는 법,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 법, 잡은 물고기를 칼로 가르는 법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이 가르침 하나하나는 마히토에게 살아가는 근본에 대해 느끼게 했다. 갑자기 치히로가 온천장을 나오면서 ‘할머니 감사해요’라며 유바바에게 푹 안겼던 장면이 떠오른다. 같은 방식으로 마히토도 난파선을 떠나면서 키리코를 꼭 안고 ‘감사해요’라고 인사한다. 미야자키의 담배쟁이들은 선생님들이다. 미야상은 어른의 표상으로 선생님을 그렸고, 그 자신 역시 뭔가를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아랫세계에서는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는 금언이 작동했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칠 수 있지만, 그로부터 제자가 배울 것은 그 가르침이 아닐 수도 있다. 선생은 가르쳐야 하지만 제자는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로만 보면, 영화 속에서 미야자키는 키리코의 모습으로 있지만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남자 캐릭터의 계보에서 미야자키의 분신들을 찾을 때,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모든 남자 캐릭터는 혼자가 아니었다. 모두 소녀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으면서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했다. 붉은 돼지는 피오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이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쇼스케는 인간이 되고 싶은 포뇨를 지키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용기와 재치를 끄집어냈다. 엉망진창인 하울도 청소 잘하는 소피를 만나, 자신의 마법을 남들을 돌보는 데 쓰게 된다. 완벽한 아시타카도 원한에 찬 원령공주 덕분에 자기 이상의 한계를 깨닫고 성숙하게 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히토에게는 소녀가 없다. 마히토는 성실하지도 않고, 꿈도 없으며, 거칠고 이기적이기까지 한데, 격려하는 소녀도 없다. 잘 생각해보면 사실 마히토는 미스테리하다. 가오나시보다도 말이 없으니까. 꾹 다문 그 입 밖으로 마히토의 슬픔과 기쁨 어느 것도 터져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히토를 미야자키의 분신이라 해도, 전혀 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빛 없는 길을 친구와 함께 
마히토는 악의 ‘있는’ 아이에서 악의 ‘없는’ 아이로 성장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 소년은 어떤 청년이, 어른이 되어갈까?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히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쿠키 영상을 가득 풀어주실 법한데, 온통 푸른색으로만 도배된 엔딩 크레딧을 봐도 마히토의 운명은 미지수다. 이전까지 미야자키는 늘 ‘다음’을 생각해왔다. 멸망이 도래하더라도 그때까지 갈 길은 상당히 멀다고 했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부터, 네가 꾸는 꿈이 어떤 죽음을 부르더라도 계속 살아가라며 ‘꿈’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바람이 분다》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은 한결같이, 어쨌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니 자기가 만든 비행기로 전쟁이 벌어지는 흉측한 꼴을 보았다 해도, 지로가 행려병자가 되어 거리를 떠돌지는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마히토는 어떤가? 마히토의 미래는 그 누구도 모른다. 마히토 자신이 가장 관심 없는 것이 바로 미래다. 미야자키가 정말 ‘마히토’를 자신으로 삼아 그렸다면 이 결말이야말로 충격적인 것이 된다. 42년생인 미야자키가 80의 중반에서 자기의 미래를 ‘모른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르는 것이다. 미야자키는 자기의 미래만이 아니라 자기 작품이 낳았을 수많은 애니메이터들, 영화감독들, 그리고 지금 글을 쓰는 나까지도 모르는 존재, 모르는 일이라고 말한다. 알 수 없으니 가능성으로 충만하다고 나이브하게 결론내려서는 안된다. 그 미래에는 이빨을 드러낼 흉포한 것들, 눈물을 낳을 아찔한 고난들, 무릎을 꺽고야 말 정도의 아픔들이 우글우글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윗세계에서는 허풍쟁이 아버지가 여전히 두 눈 반짝이며 어디서 돈이나 벌 궁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가 떠받친 전쟁이니, 앞으로도 많은 전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가 ‘모르는 것’이라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다. 미야자키가 마히토의 각오를 확실히 밝히기 때문이다. 마히토는 순수한 탑을 쌓지는 않겠다고 했다. 바보 같은 아버지 대신에 자신이 훌륭해져서 멋진 세계를 일으키겠다고 하지는 않으니까. 마히토의 그 선언과 함께 순결한 이상으로 빛나던 탑의 세계는 무너진다. 마히토의 대안은 ‘키리코와 히미와 왜가리-남자와 같이 친구를 만들겠다’이다. 전 작품에서 일관되게 트루 러브를 외쳤던 미야자키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고 한다. 왜 우정일까? 


답은 키리코, 히미, 왜가리-남자의 캐릭터성을 풀어보면 알 수 있다. 첫 번째 친구는 키리코다. 키리코는 바로 앞 연재에서도 다루었지만 선생님이다. 마히토에게 칼을 쥐고 물고기 배를 가르는 법에서부터 식탁 밑에서 잘 자는 법까지 하나하나 알려준다. 마히토는 키리코 옆에서 새생명의 소중함, 죽음의 숭고함을 알게 된다. 딱히 무엇을 배웠는가하면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키리코의 집에서 먹고 자는 동안 마히토는 웃게 되고 너그러워진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키리코가 딱히 마히토에게 무엇을 해준 것은 없다. 자기 하는 일에 끼워주었을 뿐. 하지만 그 덕분에 자의식에 갇혔던 마히토는 태어날 와라와라와 죽어갈 팰리컨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커진다. 


그 다음 히미를 보자. 히미는 윗세계에서는 이미 죽고 없는 엄마의 아랫세계 버전이다. 마히토가 친구로 삼는 히미는 죽은 엄마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을 나눌 소녀도 아니다. 히미는 무엇을 하는가? 불로 생명의 길을 낸다. 히미의 불길은 마히토를 앵무새의 대장간에서 자신의 방으로, 다시 나츠코 엄마가 있는 산실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히미는 안내자다. 이 안내자는 자기라면 산실에 들어가는 위험은 무릅쓰지 않겠지만, 마히토가 들어가겠다고 하자 말리지 않는다.  


잘 생각해보면 마히토는 늘 누군가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도쿄에서 시골로 이사했을 때는 아버지가 안내해주었고, 새집의 복도는 나츠코를 따라갔다. 왜가리-남자의 목소리에 끌려 탑으로 들어갔고, 키리코의 도움으로 와라와라와 만나게 되었다. 왜가리-남자를 따라 앵무새의 대장간까지 가고, 거기서부터 또 히미의 도움을 받아 나츠코의 산실이나 큰할아버지의 테이블까지 갔다. 마히토는 아무 길도 몰랐다. 다만 따라갔을 뿐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이는 히미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미는 마히토처럼 훌륭한 아이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에 감탄하며 불에 타 죽을지도 모르는 그 미래를 선택한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엄마와 아들이 짧게 포옹한 뒤 각자의 문을 열고 자기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대목을 보자. 히미는 훌륭하게 클 이 아들을 볼 수도 없고 함께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아랫세계에서 마히토를 만나 그런 삶으로 인도된다. 왜가리-남자도 마히토를 이끌었지만, 그 또한 마히토와 함께 걷다가 자신은 와본 적이 없던 큰할아버지의 높은 정원에 이르게 된다. 미야자키가 그리는 우정이란 서로 인도하고 인도되는 일이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마지막 친구가 문제이다. 왜가리-남자는 자신이 친구로 지목되자 깜짝 놀라기까지 했다. ‘내가 니 친구야?’ 하지만 그도 마히토와 헤어질 때 ‘잘 지내라고 친구야’라고 인사를 남겼다. 각국의 영화 포스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이 캐릭터, 왜가리-남자는 어떤 친구인가? 

 

잠깐 미야자키가 창조한 놀라운 캐릭터들을 떠올려보자. 중장비 외관을 한 가드너-거신병이 있었고, 푹신한 초록의 신 토토로가 있었다. 가분수 얼굴 대마왕 유바바가 있었고, 얼굴 없는 가오나시가 있었다. 왜가리-남자는 반인반수로 변신을 잘한다. 세상 둘도 없이 우아한 몸짓으로 늪 위며 복도를 날다가, 돌연 대왕 딸기코에 옥수수처럼 고른 치열의 거대한 입을 자랑하는 머리 벗겨진 중년 남자가 된다. 화려한 날개짓과 뒤뚱뒤뚱거리는 걸음이 기묘하게 조합된 존재인데, 그 중에서도 충격적인 것은 이빨이다. 우리는 보통 말 잘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이빨이 세다’고 하는데 왜가리-남자야말로 이빨이 세다. 말이 진짜 많다. 스즈키 도시오가 자신이야말로 왜가리-남자라며 환하게 웃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말씀이 아주 많으신가보다. ^^;;


말이 많은 왜가리! 그래서 왜가리-남자는 책의 수호신이다. 갑자기 왜 책으로 튀냐고? 그의 출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의 집은 책으로 된 탑이며, 그는 탑의 입구를 장식하는 벽면의 그림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이 탑은 여러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문인데, 위쪽세계에서는 도서관의 형태였고 아랫세계에서는 많은 문들의 복도였다. 이 복도의 각 문들을 열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문들의 복도란 책들이 가지런히 놓인 서가라고 할 수 있다. 큰할아버지가 책의 신이고, 큰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히미의 벽난로 앞에도 책이 있었다. 마히토가 불길을 따라 앵무새의 식탁에서 히미의 화덕으로 오게 되었을 때, 도착하자마자 화덕 앞 의자에 부딪쳤는데 이때 책 두 권이 아래로 떨어졌었다. 히미는 책의 영기를 받은 존재다. 히미의 부하이자 역시 불을 쓰는 키리코의 집에도 책이 놓여 있었다. 미야자키가 설정한 윗세계와 아랫세계를 연결하는 고리는 바로 책인 것이다. 이 두 세계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왜가리-남자이다. 


왜가리-남자가 책의 정령이라면, 우리는 마히토가 책을 읽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장면으로 급히 돌아가야 한다. 치히로와 가족들이 터널을 통과하게 되면서 저편 세계가 열렸던 것과 달리, 마히토에게 아랫세계는 엄마가 남겨주신 책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책으로 된 탑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이때부터 마히토는 책을 읽은 자로서 새롭다. 엄마가 남겨주신 책은 쇼와 12년, 1937년에 요시노 겐자부로가 출간한 것으로 제목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작품의 주제는 우정이다. 세 친구가 서로 오해하고 상처주면서 함께 웃고 놀며 커나가는 이야기이다. 마히토가 눈물을 흘리는 그 장면에 차 한 대가 구부러진 길 위를 달리는 삽화가 그려져 있는데, 원래 책에도 나와 있는 삽화로 소설의 결말 부분에 해당한다. 마히토는 이 책을 읽고 펑펑 운다. 엄마가 그리워 이불을 적시던 것과 달리 말이다. 자기 그리움을 부여잡고 가슴을 뜯던 소년은 친구 때문에 울고 웃으며,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야기를 읽고 펑펑 운다. 책 자체는 대동아전쟁에 돌입했던 무렵임에도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자’라고 하는 우정론을 강조했다 해서 당시에는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제작 초입에 지브리 스텝 모두와 함께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전부 큰 감동을 받았는데 그 인상이 이번 영화에 고스란히 다 녹아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이 책 표지에 바로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왜가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새가 한 권의 책을 상징한다. 이 소설 자체에 어떤 슬픈 사건도 없다. 소설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죽고 없지만, 소년은 아버지의 부재에 괴롭지 않다. 그렇다면 마히토는 왜 이런 책을 읽고 우는가? 자기 안에 갇혀 있던 마히토, 돌로 머리를 찧어서도 해소되지 않았던 그의 갑갑함은 한 권의 책과 함께 풀린다. 왜? 책은 수많은 타인들이 살고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은 본디 타인의 삶, 타인의 생각, 타인의 정서를 품는다. 타인의 삶에 눈을 돌리게 된 자는 자기 머리를 찧는 대신, 타인을 구하러 가게 되는 것이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구하려는 이유는 나츠코가 훌륭해서도 아니고, 나츠코를 좋아해서도 아니다. 미야자키는 책을 읽는 자는 누구를 돕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이가 누구라도 말이다. 타인이 삶에 이끌리며 타인을 자기 삶으로 이끄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가리-남자는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 책은 진리의 보고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타인의 삶’에 불과하다. 마히토가 아랫세계에 처음 도착해서 발견한 무덤의 문에는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고 되어 있었다. 아랫세계 역시 책의 세계라고 했을 때, 책은 배워야 즉 베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안내하는 대상이다. 다시 영화 속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가면, 책의 첫 페이지에 엄마가 ‘자란 마히토에게’라고 글씨를 써 남긴 왼쪽 페이지에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그러니 책이란 한 알의 씨앗이다. 그런 의미에서 씨앗을 키우던 토토로가 한밤중에 아이들과 추던 정령의 춤도 떠오른다. 두 손을 모으고 힘차게 하늘로 쑤욱! 토토로 이마에 커다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던 모습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그런데 같은 동작을 히미가 불꽃을 쏘아올릴 때 한다. 책의 영기를 부여받은 자들을 씨를 뿌리고 씨가 싹트게 하는 이들인 것이다. 다만, 그들도 싹 터 오를 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모른다. 좋은 식물 나쁜 식물이 따로 있지 않듯, 씨앗으로서의 책이 품고 키우고 드러낼 모든 것들은 선악을 넘어선다. 


마히토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집어들기 직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마히토는 활과 화살을 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칼, 활, 모두 타인을 해치기 위해 드는 무기이다. 하지만 책을 들게 되면서 마히토의 활은 부러지고, 칼은 왜가리-남자의 뚫린 부리를 치유해주는 도구가 된다. 책을 읽은 자는 아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난처한 장소에 이르게도 되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 책을 읽으면 어떤 문제와도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커진다. 어떤 일도 겪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출처 - 다음 영화


         
질문을 품고, 인연을 따라가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작품이 환상적이다.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상식 너머의 캐릭터들이 버젓이 활보하며 생명력을 뿜는다. 거대벌레 오무라든가, 천공의 성 라퓨타라든가, 얼굴 없는 가오나시, 인간이 되려는 물고기 등. 미야자키는 현실로 포착되는 것들 너머에서 살아 숨 쉬는, 신기하지만 엄연한 존재들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미야자키에게 현실이란 시계로 끊을 수도 자로 잴 수도 없는 시공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이 세계의 넓이와 깊이란 광대하다. 


미야자키는 이 심오함을 이원세계로 그리기도 했다.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바람이 분다》를 보자. 《토토로》의 경우 일생에 한번 토토로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식이다. 고양이 버스가 들판을 달리는 것을 수확에 바쁜 어른들은 보지 못한다. 오직 어떤 목표에도 구애받음 없이 지금에 충실한 아이들 눈에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는 나타난다. 그러므로 《토토로》의 경우, 두 차원의 세계라고까지는 할 수 없고 인간의 세계와 정령의 세계가 한 차원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보통의 어른들은 정령적 세계의 차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원세계가 정확히 나뉘어져 있다. 현실 세계에서 아버지는 돈이면 만사 오케이라고 외치지만, 저편 세계에서는 그런 탐욕과 무지 때문에 돼지가 된다. 치히로는 저편 세계에서 신들을 모시고, 공경함을 배우고, 우정에 헌신하는 아이가 되어 이편으로 귀환한다. 저편 세계는 배움터다. 《바람이 분다》에서도 두 개의 세계가 확실히 분리된다.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꿈이다. 현실 차원에서 엔지니어 지로는 날렵한 비행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지만, 인간이 무기가 되어 죽음을 부르는 비행기를 만들고 만다. 그러나 현실에 절망해서도 지로는 계속 꿈을 꾼다. 꿈에서 그는 영원히 날고 온전히 사랑하며 계속 비행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저편 세계는 희망터다.  

 

《토토로》,《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바람이 분다》는 모두 이원 세계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현실 너머가 지닌 생명력과 질서,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현실에서는 아픈 엄마가 병원에서 퇴원을 못하고, 세계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쓰레기로 신음하며, 전쟁으로 이룬 모든 것이 다 파괴되어버린다. 하지만 저편에서 우리는 토토로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잃어버린 친구를 찾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계속 바람을 맞을 수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 구도를 무너뜨린다. 탑을 통과해서 마히토는 두 세계를 경험한다. 현실과 현실 너머이다. 하지만 이 너머는 상승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강한다. 궁핍에 절망이 더해지고 더해진다. 그리고 결국 부서져버린다. 저쪽 세계가 현실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했던 것과 달리, 마히토의 지하 세계는 식충식물의 정원이며 치우지 못한 쓰레기밭이다. 심지어 불의 사신인 히미의 마당에도 쓸지 못한 낙엽이 무성하게 쌓여 있었다. 미야자키는 마히토의 죽은 엄마를 통해 현실 너머의 그 세계란 환영이라고 한다. 현실을 떠받치는 꿈과 희망의 심해가 아니라, 현실을 갉아 먹는 허망한 늪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 자체의 무게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가? 사실 나는 하늘도 없던 이 작품에서 아랫세계마저 붕괴되는 것을 보고 극장에서 혼자 망연자실하게 좀 앉아 있었다. 미래란 모르는 것이라고 하자, 역설적으로 그 다음이 강렬하게 기대되었다. 미야자키는 매작품마다 자신을 비워내며 새로운 문제의식과 새로운 화법(畫法)을 실험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어떤 작품보다 다음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제 미야자키에게는 답이 아니라 질문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다. 진리가 아니다. 오직 질문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가 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에서 가져갈 것은 실망뿐이리라. 하지만 그가 던진 것은 질문이었다.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왜가리-남자, 즉 책이 있기 때문이다. 책이란 우연처럼 다가오는 어떤 만남이다. 타인의 어떤 삶이다. 그것이 한번의 만남일지라도 서서히 나의 시야를 넓혀주리라. 읽어야 할 것, 만나야 할 스승이 따로 있지 않다. 다만 펼쳐질 어떤 우연을 긍정하라. 이런 답도 저런 답도, 찾았다가 잃어가며, 계속 친구를 사귀듯 읽으라. 부서지는 것은 도서관이라는 탑이지 책이 아니다. 

 

왜가리-남자는 무사히 이편으로 돌아왔다. 마히토에게 저쪽에서 있었던 일을 잊으라고 충고하지만 마히토의 기억에 모두 사라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시골집을 떠나는 마히토의 가방이 커져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커지고, 가끔은 누군가를 어떤 곳으로 이끌게 될 수도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현실밖에 없다는 냉정한 세계관으로 뒷통수를 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현실 여기저기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책들, 낯선 인연은 참으로 많다. 이 인연을 따라가라! 

 

“책에 무슨 좋은 효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그런 것은 돌이켜보니 그랬다는 정도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런저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게 좋은 영향을 미칠 테니까 아이에게 읽으라고 건넨다는 발상은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읽으라고 해도 아이는 읽지 않습니다. 책을 권한 부모는 열심히 그 책을 읽지만 아이는 안 읽거나, 오빠는 열심히 읽어도 여동생은 안 읽을 수도 있죠. 책을 읽기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가 책만 읽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것이거든요. 밖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 생각이 깊어진다는 생각은 그만 해도 될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 훌륭해지느냐 하면, 그런 일은 없으니까요. 독서란 어떤 효과를 바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는 ‘나한테는 역시 이거야’하는 무척 소중한 책 한 권을 만나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왠지 마음에 든 책을 발견해서 그 세계 속에 정말로 빠져들 정도까지 읽어 보면 모국어밖에 몰라도 “이 번역은 이상해”라고 지적할 때도 생깁니다. 책은 참 재미있는 물건이에요.
  내가 쓰고 있는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이 자신만이 한 권과 만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기쁘겠는데요…….”
(미야자키 하야오,『책으로 가는 문』, 146~147쪽)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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