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1. 나를 위한 철학
철학이라고 하면 사뭇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 드는 것 같다. 단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와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길처럼 느껴진달까? 심지어, 친구들에게 철학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단어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며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혼자서 철학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도 너무 근엄한 길같아 차마 말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계속 무의식중에 철학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살면서 계속해서 질문을 하게 되고, 살면서 해 왔던 질문들을 언제까지나 썩혀둘 수는 없으니 말이다. 사전이나 인터넷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이 책마다 꼭 하나씩은 있다. 이번에는,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질문을 풀기 위하여 철학을 했던 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마 제국 16대 황제)이다.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등장한 5현제 중의 한 사람이다. 마르쿠스가 통치한 시기는 태평성대를 구가했지만, 나라의 정세가 흔들리는 크고 작은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홍수와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생겼고, 전염병이 퍼지기도 했다. 게다가 외세의 침략에도 시달렸다. 중동에 위치한 파르티아 제국과 훈 족의 위협으로 로마 제국의 국경 지역으로 이주한 게르만 족의 위협을 받아서 황제는 전장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마르쿠스는 황제라는 것을 자신과 일치시키지 않고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고, 전쟁을 진두지휘해 모범을 보인 것 같다.
이 책을 보니 과연 마르쿠스가 어떤 황제였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통치하는 로마는 어땠을까? 『명상록』의 첫 시작을 보면 ‘~덕분에 나는 ~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1장 전체에 나온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 사람 덕분에 알게 되고 실천할 수 있었던 점을 적어놓은 것이다. ‘나는’이 아닌 ‘덕분에’로 시작하는 책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신기해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다른 황제들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모습에 너무 좋은 황제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주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고 자신의 올바른 행동과 자비로운 품성에 만족하는 선한 자의 삶이 네게 맞는지 한 번 살펴보라. (...) 누가 네게 잘못을 저지른다고? 그는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그건 잘된 일이다. 네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처음부터 우주가 너를 위하여 정해놓고 펼쳐놓은 것이다. 한마디로 인생은 짧다. 신중하고 올바른 행동으로 현재에서 무언가를 얻도록 하라. 정신을 맑게 하되 긴장하지 마라. (4장 26번)
우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외유내강한 황제라고 느꼈다. 그가 쓴 글에서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철저한 느낌이 들었는데,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치우침 없이 동등하고, 모두를 사심 없이 대하는 황제일 것 같았다. 하지만 꼭 사람이 좋다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아우렐리우스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네이버나 구글에서 찾은 여러 블로거나 포스팅이 대부분 그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가 원래 로마의 법을 어기고 친자에게 왕위를 선양하였기 때문에 5현제의 시대가 끝났다고, 그러니까 그가 로마의 전성기를 마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만약 『명상록』을 읽지 않고 역사로서만 그를 접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명상록』을 읽고 난 지금은 그저 자신에게 철저하고 노력했던 철학했던 황제로 생각된다. 내 추측이지만, 마르쿠스는 황제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 늘 한결같은 사람이었을 것 같다.
건강한 눈은 보이는 것은 모두 보아야 하며 “나는 초록색만 보고 싶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병든 눈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청각과 후각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듣고 냄새 맡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 (10장 35번)
2. 죽음은 끝이 아니다
『명상록』은 여러 개의 짧은 구절로 이루어진 책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생각들이 담겨 있는 구절들을 볼 때마다 모두 멋진 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천착하게 된 내용은 죽음에 관한 부분이었다. 나는 요즘 정말 이유 없이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나는 왜 여기 있지?’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질문을 붙들고 가다 보면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이 ‘죽고 싶다’이다. 죽고 싶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은 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사는 것 자체가 아니라 사는 방식이 괴로운 것이 죽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식’으로 사는 나 자신에게 원망을 하다 보니,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예 끝나는 걸까?’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모든 만족감과 행복, 그리고 여러 쾌락들은 모두 사라질까?’등의 생각들이 끊이지가 않는다. 그러다가 내가 내린 결론은 뭐였냐 하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두렵고 ‘일단 현재를 즐기고 보자.’였다. 하지만 죽음은 ‘나중에’로 간단하게 퉁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혼자 캐묻다가, 왜 죽음이 두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를 따져보았다. 내가 죽음이 두렵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 죽은 나를 ‘나’라고 생각한 데 있는 것 같다. 죽으면 내가 으스러져서 땅 속에 스며들거나 동물에게 먹힐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도 죽은 모습을 여전히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죽음에 대해 혼자서 생각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다 보니, 답을 찾을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데 마침, 서양 절차탁마 반에서 『명상록』을 읽으며 마르쿠스가 죽음에 관해 적은 내용에 푹 빠지게 된 것 같다.
머지않아 너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네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과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만물은 다른 것들이 나름의 순서에 따라 생겨나도록 변하고 바뀌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12장 21번)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쟁터에서 쓴 것인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항상 죽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적들이 사방에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을 따로 두며 산다. 처음에는 이것이 나에게 가장 잘 맞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삶이 시간 전체를 아우르면서 꽉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만물이 순환하는 짧은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죽는 것을 따로 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생과 멸을 따로 두고 싶다. 왜냐하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불교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다보니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내가 죽으면 개구리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어쩌면 돼지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죽는 것에 대해 생각도 하기 싫게 만들었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죽어서 환생하면 혹시 신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예전에 봐서 가물가물 하긴 하지만 『법구경』에는 양의 목을 벤 사람의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양을 바치기 위해 양의 목을 베었는데, 그 후 자신이 목을 벤 양의 털만큼 거듭 양으로 환생하여 목이 베여 죽었다는 내용이다. 나는 양 한 마리를 죽인 것 정도가 아니라, 소, 돼지, 닭 등 흔하게 먹는 고기와 다른 온갖 생물들을 무의식중에, 혹은 실수로, 아니면 먹기 위해 엄청나게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신이 된다고? 소, 돼지, 닭이나 다른 애들을 먹은 만큼 환생하여 고통을 받지는 못할망정?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이제 조금이라도 고기를 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같다. 그렇다면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모두 소멸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소멸하는 것들 또한 있을 것이다.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나도 죽고 언젠가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고 계속 붙들고 싶은 것은 내가 이미 누려본 것들을 놓치기 싫다는 것에서 나온 감정인 것일까?
3. 시간은 소유되지 않는다
네가 3천 년, 아니 3만 년을 산다 해도, 아무도 지금 살고 있는 삶 외에 다른 어떤 삶을 잃지 않으며, 지금 잃어버리는 삶 외에 다른 어떤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가장 긴 삶도 결과는 가장 짧은 삶과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시간은 만인에게 길이가 같고, 우리가 잃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는 것은 분명히 순간에 불과하다. 아무도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 따라서 다음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만물은 태초부터 같은 생김새로 순환하고 있으며, 누가 같은 광경을 100년, 200년 또는 영원히 보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도 없다. 둘째,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이나 가장 단명한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잃는다. 가진 것이 현재뿐이라면 현재만을 빼앗길 것이고,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잃지 않기 때문이다. (2장 14번)
이 부분은 무언가 이해가 되는 듯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이해한 것이 아닌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죽음이 끝이라면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내가 살게 될 모든 시간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들이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내 카톡 프로필에 내가 며칠을 살았는지 계산하는 디데이를 설정해 놓고 이 시간은 모두 나의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내가 5000일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혼자 자축하며 기뻐했는데, 이 모든 시간이 모두 그저 지나간 것들일 뿐이라니?
나는 내가 현재만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과거나 지나간 시간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삶 전체를 나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죽음은 말하자면 내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 여겨졌다. 언젠가는 소멸될 삶인데, 그렇게 짧은 한 생(生)과 멸(滅) 사이에 불과한데, 거기에다가 현재밖에 살지 못한다니? 미래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 것이 될 수는 없고, 과거도 지났기 때문에 가질 수 없는데 내가 사는 현재는 한 순간 한 순간 뿐이다. 심지어 초 단위로 세지도 못할 이 짧은 현재만을 내가 살 수 있다니, ‘나는 왜 사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시간에 대해 처음 소유와 관련을 짓기 시작한 것은 과거를 소유를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였다. 나는 왜 이렇게 소유에 집착하게 된 걸까? 왜 모든 것이 가질 수 있어야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서양 철학 수업에서 『명상록』을 토론하며 소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 때 훈 샘이 ‘소유가 없으면 뭔가 부족한 듯하다’는 억양으로 말씀하셨을 때는 쿨한 척하며 소유가 있어야만 삶이 의미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도 소유가 있어야만 삶이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모두 없어질 것이고,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면, 그렇다면 좀 ‘행복하게 죽는 법’같은 건 없는 걸까?
4. 죽음과 나는 같은가?
죽음을 멸시하지 말고, 죽음을 기뻐하라. 죽음도 자연이 원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9장 3번)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을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을 것이다.(7장 21번)
어떻게 사람이 죽음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죽음이 자연이 원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죽는 것을 기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연처럼 죽음을 기뻐하지 못하고 멸시하는 것일까? 왜 누군가가 죽으면 당연히 슬픈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일까? 죽음은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새로운 시작, 아니면 만물의 순환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도 책을 보며 잠시 동안만 ‘아 이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깨달을 뿐, 그 순간 이외에는 전혀 적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죽는 것은 나 자체가 사라진다는 생각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면서도 ‘나는~~’ 형식으로 쓰고 말할 때도 항상 ‘나는~~’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의 의견일 뿐인 것이 어느새 사실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그저 나의 의견일 뿐인 것을 사실로 만들며 고집을 부리다 보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나는 내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계속 유지되었으면 했고, 사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죽어서 잊혀지는 것이 두렵다.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잊혀질 것인데 왜 나는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싶어하는 것일까? 죽음이 두려운 건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것인데, ‘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후세에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것 같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나는 내가 잊혀지고, 아니면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도 계속 잊혀지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도 날 기억해주지 않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관종이 되어서라도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것일까? 죽음이 나의 모든 것을 뺏어가고 잊혀지게 한다는 생각이 계속 나는 걸 보면 아직 죽음에 대해선 모르는 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글_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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