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아기가 왔다, 그리고 먹는다, 아빠가 된다

아기가 왔다, 그리고 먹는다, 아빠가 된다



우리 딸이 이유식을 먹은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맨 처음 쌀을 먹던 날, 아빠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200여일 아기를 돌보면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어째서 그렇게 긴장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아기’가 ‘사람’이라는 느낌이 희박해서 그랬던 것 같다. 엄마, 아빠와는 먹는 것도 다르고, 자고 일어나는 주기도 다르고, 아무 때나 울고, 싸고...... 팔, 다리, 눈, 코, 입을 빼곤 모두 다르니 그(녀)가 도무지 ‘동류’로 느껴지지 않았달까. 무조건적으로 돌봐주어야 하는, 어쩐지 엄청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이기는 했지만, 이 녀석이 ‘인간’이라는 걸, 게다가 내 자식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고 있음에도 실제 대할 때의 느낌은 ‘이게 정말 인간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분유를 주식으로 삼던 우리 딸이 처음 ‘쌀’을 먹었던 그날, 아빠는 그렇게 두근거렸던 것 같다. 그날 우리 딸은, 그저 생명력의 덩어리로 태어났다가, 그제야 인간의 자식으로 다시 한번 태어난 것 같았다.




짐작컨대 엄마는 아빠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는 벌써 열 달이나 몸 속에서 이 녀석을 키웠으니까 말이다. 열 달 동안 고락을 함께한 사이인데 어찌 ‘동류’로 느끼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니까 육아에 있어서 엄마와 아빠는 출발선부터가 다르다. 아빠는 아기가 세상에 나온 다음부터 시작이지만, 엄마는 이미 열 달을 키운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아빠는 내심 우리 아기가 모유 말고 분유를 먹으면 ‘좋겠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먹었으면’ 하는 정도까지는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빠도 아기밥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렇게 되면, 엄마의 활동도 좀 더 자유로울 테니까. 물론, 모유가 아기에게 여러모로 좋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분유를 먹으면 ‘좋겠다’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먹었으면...’까지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빠는 은근히, 꼭 주고 싶었다.


아빠의 그런 바람 덕(?)이었는지 어쨌는지 우리 딸은 이른바 ‘완분’(완전 분유) 아기가 되었다. 아빠 입장에서 보건데, 아기를 ‘기른다’는 그 느낌, 한 생명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그 느낌을 확실하게 느끼고 싶다면 아기를 먹여보면 된다. 제 몸도 가눌 힘이 없는 그 작은 생명이 온힘을 다해 젖꼭지를 빠는 모습을 보면, 인간사의 근본적인 허무도,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고난도, 작동을 멈춘다. ‘순수함’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기는 오로지 살아남으려고 한다. 그것만 가지고서 제 존재 전체를 부모에게 맡겨온다. 그래서 부모는 무력할 수가 없다. 온힘을 다해 기대어오는 아기를 버텨내는 수밖에. 


그러다 보면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몸도 마음도 피곤해진다. 요즘이야 아빠나 엄마가 웃으면 함께 웃기도 하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의사표현을 조금씩 하지만, 이보다 더 아기일 때는 상호작용을 하기는 하지만, 거의 없다시피 한다. 대개 육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다 보니, 재미가 없다. 아마도 대개 아빠들이 아기를 두고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모르겠다’ 또는 ‘어떻게 봐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아빠들에게 권한다. 아기 수유를 직접, 매일매일 해보시라. 수유 중에도 아기는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을 본다. 냄새나 촉감도 열심히 느낀다. ‘상호작용’은 어느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더불어 아기와 ‘노는 일’도 어느날 갑자기 되지 않는다. 먹이를 주고, 안아주고, 아기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쥐어주는 작고 작은 사소하기 그지없는 상호작용들이 쌓여야 가능한 일들이다.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아기에게 ‘아빠’는 그러한 과정들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다. 




갓 태어난 아기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아빠’는 사실 그냥 남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해 준 적도 없다. 엄마 냄새는 세상에 나오자마자부터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그런데 아빠는? 목소리가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굳이 아빠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마 우리딸에게 가장 익숙한 목소리는 엄마가 입덧 기간 내내 정주행했던 ‘맛녀석들’ 출연진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아빠는 노력하지 않으면 ‘아빠’가 아니게 된다. 그러니까 엄마는 반자동이지만, 아빠는 빼도 박도 못하는 수동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수유를 하다 보면 아빠 입장에서도 알게 되는 것이 참 많다. 아, ‘수유’라고만 하면 분유만 주고 딱 끝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분유도 타고, 주고, 먹이다 중간에 트림 한번 시키고, 다 먹은 후에 또 트림시키고, 트림한 다음에도 소화를 시켜야 하니 한동안은 안고 있어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수유’라고 부를 뿐이다. 여하튼 그걸 다 하려면 최소한 30분은 걸린다. 그걸 두어번씩 매일 한다면 최소 하루 한시간씩은 아기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셈인데, 그쯤 되면 아기에 대해 뭐라도 알지 못하는 게 되는 게 더 어렵다. 우리 아기가 지금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수유 후에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소화를 시키는지, 호흡의 리듬은 어떤지, 냄새는 어떤지, 분유를 먹은 후에 얼마만에 똥을 싸는지, 졸릴 땐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등,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이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인간의 언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아기가 무얼 원하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이건 사실 경이로운 일이다. 말과 글을 벗어나서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직접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아빠’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아기가 커서 아이가 된 다음에 아빠와 함께 밥먹는 걸 꺼린다고 서운해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독려하곤 한다. 뭐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주 작은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뭐랄까, 사실 이 기대도 부질없는 것이기는 한데, 그래서 결국엔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붙잡고 싶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아기에겐 먹는 것,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전부다. 말하자면 가장 강렬하고, 즉각적인 체험이자, 경험하는 세계의 전부나 다름없다. 아빠는 기꺼이 그 세계의 일원이고 싶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건강하게만 자라자. 마음껏. 


_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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