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열심(熱心)히 사는 사람들은 주목! 청아한 동청룡의 심장, 심수(心宿)

청룡의 심장을 식혀주세요



하늘의 왼쪽 가슴 아래께



대망의 전갈자리 시리즈의 결정판, 오늘 주인공은 청룡의 심장, 심수(心宿)다. 때는 바야흐로 봄꽃들의 황홀한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완연한 봄날, 눈앞의 꽃 잔치 못지않은 볼거리가 자기들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줄, 사람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머지않아 도래할 여름철의 은하수를 예견이라도 하듯, 늦봄 밤하늘은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별잔치를 한바탕 준비해 놓고 있다. 그 첫 주인공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심수 되시겠다.

‘심장의 별’이라는 뜻의 심수(心宿), 동방 청룡의 심장에 해당한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일 테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붉은빛이 흡사 약동하는 심장을 연상시키는 별, 그래서인지 서양의 전갈자리로도 이 별은 ‘심장’에 배속된다. 심장이란 무엇인가? 내경에 “심장은 군주지관으로 신명이 여기에서 나온다(心者 君主之官 神明出焉)”고 했다. 사람의 몸을 국가에 비유할 때, 심장은 통솔하고 주재하는 군주의 역할에 해당한다는 거다.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심은 몸의 전체를 내다보아야 하고, 그렇기에 신명(神明)을 주관한다. 그만큼 우리 몸의 중심이요, 중요한 장부라는 얘기다. 오늘의 주인공 심수의 이름이 얼마나 범상치 않은 것인지, 아마 짐작들 하셨으리라 믿는다.


가운데 심대성을 중심으로 좌우로 심전성과 심후성으로 구성된 심수(心宿)


심수의 모습은, 이 정도 생겼으면 심장의 별이라 할 만하다 싶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심장스럽게 생겼다.^^ 심수는 세 개의 별이 둔각을 이루며 연이은 모양이다. 그 모습 심장을 본떠 만들었다는 "마음 심(心)"자와도 흡사하다. [천문류초]에서는 심수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세 개의 붉은색 별로 된 심수, 그 중 가운데 있는 별이 가장 밝네.

─ 『천문류초』, 보천가


붉은 별 셋이 나란히 연이어 있다 하여 심수를 '대화(大火)'라고도 부른다. 그야말로 거대한 불덩어리라는 거다. 위의 구절에 언급된 대로 특히 그 가운데 별이 유독 강렬한 빛을 뿜어낸다. 밝기로는 뭇 별들 중에 랭킹 16위이며, 태양보다 6만5천배 많은 복사에너지를 발산한다는 이 별, 그야말로 무지하니 밝고 크다! 하여 이 가운데 별에는 별도로 '심대성(心大星)'이란 별칭이 붙는다. 심대성의 빛이 유난히 밝은 이유는 이 별이 '적색거성'이기 때문이다. 적색거성이란 나이 들어 비대해진 별을 일컫는 말이다. 진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핵반응이 점점 활발해져서 크기는 커지고 색이 붉어진 것이다. 별도 무르익고 원숙해 질수록 농익은 때깔을 내는 법이라는 거, 흥미롭지 않은가?! 태양을 화성 궤도까지 부풀려 놓은 규모라고 하는 이 별은, 그 규모와 밝기로 자신의 짬밥을 증험하는 셈이다. 


맨 앞에 Sun(태양)이 점처럼 있는게 보이시나요. 그에 비하면 Antares(안타레스)는 후덜덜...


말 그대로 ‘큰 심장의 별’이 아닐 수 없다. 날카롭고 설익은 밝음이 아니라, 깊고 그윽한 향내가 전해올 듯 무르익은 빛깔. 저것이 곧 만물을 주재하는 심장의 기운이다! 평소 우리는 ‘심장이 터질듯이’ ‘심장이 펄떡이듯’이라고 하며, 심장에 무언가 혈기방성한 젊은 역동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경향이 있다. 근데 심수가 보여주는 심장의 이미지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차라리 오랜 시간을 두고 곰삭은 장맛과 같달까. 시간의 깊이와 주름을 간직한 원숙함, 그렇기에 그 안에 만물을 주재하는 현모한 지혜가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 안에 있어 제대로 알기 힘든 심장의 모습, 저 하늘의 심수에서 ‘내 안의 심장’을 발견해 보는 건 어떨까.^^



형혹수심(熒惑守沈)


심장이 몸의 군주 역할을 하듯, 심수는 별 중에 천왕의 자리에 해당한다. 그 중 가운데의 심대성은 천자의 자리인 명당(明堂)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이 별은 천하에 상벌을 내리는 심판의 자리로 해석되었다. 적색거성에서 뿜어 나오는 원숙한 붉은빛이 만물을 통어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천자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별의 좌우에 늘어선 별들은 왕자라 여겨졌다. 천왕의 오른쪽 별이 태자, 왼쪽 별이 서자의 자리다. 이 별들의 밝기와 각도를 보고 태자와 서자의 권력 다툼을 점쳤다. 가령 이 별자리가 일직선으로 펼쳐지면 태자와 서자의 세력이 비슷하게 되는 형국이므로 왕권쟁탈이 극심해지거나, 지진· 해일 등이 일어날 조짐이라 보았다.


심대성이 천자 좌우에 태자와 서자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심대성과 다른 천체들간의 관계다. 아마도 심대성은 '안타레스(Antares)'라는 말로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안타레스란 그리스어로 '화성의 라이벌'이라는 뜻이란다. 화성 못지않게 붉은 별이라는 뜻일 테다. 이 이름은 2년에 한 번, 화성이 심대성 옆을 지나는 데서 유래했다.

심수의 위로 4척이 되는 곳에는 일월오성이 지나가는 천도(天道)가 있어, 해와 달과 오성이 그 주위를 지난다. 지구에서 보기에 오성의 운행 궤도는 지그재그로 불규칙하게 뻗어나간다. 앞으로 가는가하면 뒤로 빠지기도 하고, 한 자리에 죽은 듯 머물러 있기도 한다. 그러다 갑자기 경로를 틀어 쏜살같이 빠져나가기도 한다. 이 모두는 각 행성과 지구의 공전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로, 이들의 비정형적인 운행궤도는 ‘예기치 않은 일’, ‘돌연한 사건’이라는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특히 오성이 특정 별자리의 영역을 침범할 때면 만국의 점성사들은 긴장해야만 했다.

그런데 심수의 입장에서는 특히 화성의 조짐이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화성은 오행으로 화(火)에 배속되어 전쟁과 살육을 상징하는 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쟁의 별 화성이 심장과 군주의 별 심수를 침범한다는 사건은 그야말로 흉조 중의 흉조였다. 왜냐면 불에 불을 더하는 형국이기에, 혹은 화성의 사나운 붉은 빛에 안타레스의 정갈한 붉은 빛이 물들어 버리는 형국이기에! 흥미롭게도 서양의 천문학에서도, 심지어 사라진 마야 문명에서도 화성이 심대성(안타레스)을 침범하는 현상은 치명적인 전쟁과 파멸의 전조로 읽혔다. 


그리스인들은 화성의 붉은빛이 피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잔인한 전쟁의 신 ‘아레스(Ares)’라고 불렀다. 이에 전갈자리의 주 임무는 파괴와 살육을 자초하는 ‘오만함’을 경계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해 보라.(봄철 별자리 3회 전갈자리 편을 참고하세요.) 그런 전갈의 심장이 전쟁의 신에 물들어버리는 형국이니 이는 필경 전쟁의 조짐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도 화성을 형혹성(熒惑星: 광기의 등불에 미혹되다)이라 하여 전쟁의 별로 본다. 특히 형혹성이 심수에 접근하는 것을 두고 ‘형혹수심(熒惑守心)’이라 칭했다. 화성(형혹성)이 순행하다 역행하여 심수의 자리에 정체해 있는 모습(守)을 일컫는 것이니, 곧 천자의 자리가 광기의 등불에 장악당할 조짐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흉조 중 하나였다.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보면 진시황이 죽기 전에 일어난 3가지 기이한 사건 중의 하나로 바로 이 형혹수심이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 36년(기원전 211년) 형혹성이 심수을 범하고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졌단다. 그야말로 살벌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송미자세가」에도 형혹수심의 기록이 남아있다. 송나라 경공 37년, 형혹수심이 일어났으나 왕이 재앙을 재상들과 백성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곡진히 백성을 걱정하고 위하자, 그 마음이 하늘을 감화시켜 형혹이 움직여갔다는 고사다. 어쨌거나 형혹수심은 재앙을 예고하는 대표적인 천상(天象)으로 예로부터 악명 높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의 의미


그런데 형혹수심은 비단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몸 안에 심장을 달고 사는 우리는 저 하늘의 심수처럼 화(火)의 침범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의 심장 심수가 화성의 불 기운에 노출되는 건 2년에 한 번 꼴, 소우주인 우리들은 일상에서 그보다 자주 형혹수심을 경험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곰샘이 즐겨 말씀하시는 ‘열심(熱心)’히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열심히 살겠습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들이다. 종일토록 분주하게 지내느라 밤을 잊고 산다. 매일이 수고로움의 연속이다. 그러면서도 더 열심히 살겠다는 말을 놓지 않는다. 열심히 산다는 데 문제 될 게 무어냐?! 글자를 곰곰이 살펴보자. ‘열심’이란 다름 아니라 뜨거울 열(熱)에 마음 심(心), 즉 심장이 ‘열 받도록’ 애를 쓴다는 말이다. 심장은 열 받으면 안 된다. 마치 하늘에서 형혹수심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차게 식히고 고요하게 가라 앉혀야 제격인 게 심장이다. 그래야 적색거성에서 뿜어 나오는 현묘한 빛줄기처럼, 존재를 아우르는 신명이 흘러나온다. 동의보감에도 “심이 고요하면 신명과 통하여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알게 된다”고 했다. 심장이 제 빛깔이 나게 하려면 모름지기 차게 식히고 맑게 가라 앉히는 게 최선이다. 매순간 ‘열심히’를 외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병증, 형혹수심인 셈이다.

일찍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백인 정복자들을 두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대들 얼굴 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서둘러 원하며, 많은 노력 없이 그것을 얻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더 많은 걸 놓친다. 무엇보다도 사물에 대한 이해를 놓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해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그 세계에 몸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당장 쉽고 빠른 대답을 원한다.


─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류시화, 508쪽


성급하게 눈 앞의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우리, 도달할 목적지를 설정하고 그 사이의 모든 여정을 하나의 수단과 비용으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 모습은 위에 실린 백인 정복자들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달달 볶아대는 ‘열심증’의 시대. 푹푹 찌는 열기에 신명이 흐려져 버린 모습들. 나는 어디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린 결코 묻지 않는다. 그저 달리고 또 달릴 뿐! 그야말로 ‘열심’히 사는 사람의 초상이 아닐 수 없다. 열 받은 심장은 한 존재를 아우르는 군주의 역할을 못한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그저 열심 열심을 부르짖을 뿐이다. 이 얼마나 치명적인 악순환의 연속이란 말인가!


스스로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면, 운명과 사건의 주인이길 바란다면, 일단 고개들어 저 하늘의 심수를 좀 보는 건 어떨까.(자기 심장을 꺼내 볼 순 없으니...^^) 내 심장의 온도는 몇 도인가? 심대성(안타레스)의 빛깔처럼 나의 신명도 맑고 청아한가?


달군(남산강학원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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