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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만나러 갑니다

[돼지 만나러 갑니다] 난잡한 돼지'들'

by 북드라망 2024. 3. 19.

난잡한 돼지'들'
 

글_경덕(문탁네트워크)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돌봄, 중단
지난 한 달 동안 돼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돌봄 1주년을 앞두고 나는 무모 님에게 7월 돌봄을 쉬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7월에 많은 일이 몰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올 초에 나는 문탁네트워크 안팎으로 여러 세미나를 신청했고 소개에도 적었다시피 '난잡한 공부'를 '체질'로 선언하며 호기롭게 한 해를 시작했다. 몇몇 샘들의 응원, 격려, 경악, 걱정이 이어졌고, 문탁샘은 "경덕...2023은 빡세게 공부하는 해? 주역에 불교로 기본기를 다지고 양생프로젝트 당대철학으로 문제의식을 벼리고...아주 좋네, 좋아!!! (그런데 너, 연말에 가랑이 찢어지겠다. 크하하핫)" 라고 댓글을 남기셨다. 그런데 상반기를 결산하는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나는 연말이 되기도 전에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피가 몇 방울 떨어지기도 했던가..?) 어떻게든 잘 수습하기 위해 발표가 몰린 7월에는 돌봄을 쉬고 일을 조정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상반기 공부를 마무리했다. (찢어진 나의 가랑이는 서서히 아물고 있다.)
 
새벽이와 잔디를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하루에 두 번씩 밴드에 올라오는 일지로 돼지들의 안부를 확인했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인간, 비인간 동물들은 폭염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더위가 극심할 때는 대형 얼음을 주문해서 진흙탕 옆에 두거나 조각 얼음을 간식으로 주기도 했다. "새벽, 잔디에게 큰 얼음을 배달받아서 줬어요. 새벽이는 좋아하는데 잔디는 코로 얼음을 눌러보다가 몸에 살짝 닿으면 흠칫흠칫 하고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y활동가) 돌봄 활동가들도 더위 때문에 힘겨워했다. 새벽이생추어리까지 도보로 꽤 걸어야 해서 푹푹 찌는 날씨에는 도착하자마자 체력이 많이 소진되기 때문이다. 가장 더울 때 돌봄을 쉬고 있는 나는 미안한 마음도 들고, 공부를 핑계로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쉬기로 한 이유가 공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 연재에 "아침잠이 많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잠에서 깨고, 그리 무겁지 않은 걸음으로 가서, 고양된 기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적었는데 지금은 몸이 많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돌봄에 익숙해지고 밥 주고 똥 치우는 일에 능숙해졌음에도 그랬다. 나는 돼지와의 비대면 기간을 가지면서 나의 신체 증상을 살피고 돼지와 만나지 않는 나의 일상을 점검하는 기간을 갖고 싶었다.
 


 
J와의 만남
의외의 일이 있었다. 데이트 어플로 누군가 나에게 대화 신청을 한 것이다. 충동적으로 가입했지만 소개글만 간략히 적고 방치해두었던 어플이었기에 더 의외였다. 대화를 신청한 상대는 J님이었다. J님은 내 소개글에서 '동물과 관련된 자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J님은 비건이고 유기견 봉사를 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는 마침 그 다음주에 열리는 개식용 반대 집회에서 처음으로 만나기로 했다. 집회에서 우리는 "Dog Meat Free Korea"라는 피켓을 들었다. 맞은 편에는 개식용의 자유를 외치는 육견협회의 맞불 집회가 있었다. 덥고 소란스러워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첫 만남을 집회 현장에서 가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후에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비건 식당과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새벽이와 잔디를 소개하며 새벽이생추어리 이야기를 전했다. J님은 흥미로워하며 후원도 하고 싶다고 했다. 무모 님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 인터뷰집 『함께 살 수 있을까, 김고은』을 선물하고 싶어서 가방에 챙겨갔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이미 구입해서 흥미롭게 읽었다고 했다. (책은 다시 고이 가져갔다.) 이후에 나는 <구조할 권리>라는 강연을 신청했는데 J님에게도 공유했다.
   
J님은 주말에 일이 있어서 나 혼자 다녀와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강연 후기를 나누기 위해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전에 새벽이생추어리 모임을 했던 비건 식당에서 만나 깻잎페스토리조또와 뇨끼를 주문했다. 나는 강연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J님에게 잘 전하고 싶었는데 전문 용어가 많고 법적인 절차를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워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어떤 '구조'는 '권리'로 인정될 수 있고 새벽이와 잔디 역시 마땅한 권리로 구조된 것이다, '권리'에 대한 상상력이 훨씬 더 확장될 수 있다면 그만큼 동물과 인간의 관계도 바뀌게 되지 않을까, 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에 우리는 한동안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았는데도 어느 장소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섭식장애와 함께 살아가기>라는 행사에서 나란히 앉아있었던 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어느 타이밍에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 보고 빵 터졌고, 이런 우연이 말이 되는 건가 싶어서 얼떨떨했다. 행사 패널은 '섭식장애인식주간' 때 만났던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의 박지니님과 <섭식장애건강권연대>의 이선민 님이었고, 사회는 <섭식장애건강권연대> 여름 님이 봐주셨다.
 
J님은 자기도 섭식장애 당사자라고 고백했다. 약점이라고 생각해서 굳이 밝히지 않았는데 이런 데서 또 보다니요,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리블러썸 국화차 한봉지를 내게 선물로 건내주었다. "상큼한 레몬, 히비스커스 그리고 국화의 만남, 비타민으로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에너지 넘치는 하루를 시작해보세요."(제품 설명 중)  우리는 끝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J님은 가방에 달려있는 무지개 고리를 보여주며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다고 자랑했다. 퀴어운동을 하는 어떤 분과 만났을 때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7월 1일에 있었던 퀴어퍼레이드와 노프라이드 파티에 대해 이야기했다. J님은 8월에 모집하는 비질에 혹시 가냐고 물었다. 나는 안그래도 가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가지 못한다고, 하지만 다음 번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J님은 이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직접 보기 전과 후가 많이 달랐다고 했다. 나는 "도축장에서 돼지들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건 어떤 경험일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아요. 가장 폭력적인 현장을 목격하고 다시 새벽이와 잔디를 만난다면.... 구조되지 못한 돼지의 얼굴과 구조된 돼지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린다면.... 하지만 새벽이와 잔디가 구조된 돼지라는 수식어 외에 더 많은 수식어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들은 구조 이후의 삶을 통해 '죽여도 되는 동물'이라는 인식에 저항하고 있고,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남이 거듭될수록 불꽃이 튀거나 에로스적 관계로 가까워지기 보다는 느슨하지만 꽤 많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상대로, 우연히 만나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로 서로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오래 만나왔던 친구들과 멀어지고 다양한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 만나는 친구에는 인간 비인간 할 것 없었다. 그 관계는 미래를 약속하며 우정을 돈독히 하기 보다 서로가 얽혀 있는 연결망을 통해 우발적으로 만나고,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언젠가 만나게 될 것임을 아는 사이에 가까웠다. 그날에도 우리는 또 만날 날을 궁금해하며 기약 없이 헤어졌다.
 
 
돼지'들'
돼지를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돼지는 틈만 나면 내 앞에 나타났다. 무심코 지나는 길가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식물이 보였다. 환삼 덩굴이었다. 생태계 교란종으로 찍힌 흔해 빠진 잡초를 보면서 나는 새벽이 간식이 지천에 깔려있네, 저걸 한아름 따다가 새벽이에게 주면 걸걸걸 하고 좋아하겠네, 하고 생각했다. 집 근처 정육점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 앞에 세워져 있는 돼지 피규어 앞에서 멈칫한다. 빙긋 웃고 있는 돼지 피규어와 그 뒤로 늘어져 있는 고깃덩어리들 앞에서 또 멈칫. 인스타 스토리를 무심코 넘기다가 가까운 지인이 올린 스테이크 사진에서 멈칫. 새벽이 생추어리 활동가가 공유한 도살장의 돼지들 사진에서 다시 멈칫. 돼지를 만나지 않아도 도처에 돼지가 있었다. 그 때의 돼지는 새벽이와 잔디라는 개별 존재 뿐만 아니라 그들과 접촉한 존재들, 구조되지 못한 존재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존재들,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실천하는 '우리' 존재들이었다. 또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는 새벽이와 잔디를 돌보고, 돼지와 밀접 접촉하고, 돼지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수치와 위협을 함께 느끼며, 돼지와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난잡한 돼지'들'이라고.
 
  
다시, 돌봄
지난 주부터 다시 돌봄을 시작했다. 한 달 여만의 돌봄이어서 새벽이와 잔디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는데 큰 차이는 없었다. 둘은 무더운 여름을 꽤 잘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이생추어리 풍경도 많이 변했다. 여기 저기 풀이 엄청 자라있었고 사람 키만큼 무성한 곳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새벽이의 동선도 바뀌었고 똥을 누는 장소도 달라졌다. 나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렀고 갈증이 심하게 올라왔다. 그럼에도 기분은 꽤 괜찮았다. 아, 다시 왔구나. 돌봄은 멈추지 않는구나. 새벽이생추어리의 많은 존재들이 지금, 여기 살아있구나. 쉬는 동안에도 사진과 일지로 소식을 확인했지만 직접 마주하고 나서야 실감이 되었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우리가 얽혀있는 난잡한 그물망을 더 예민하게 감지할수록, 나란 존재도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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