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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예술

[한문이예술]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by 북드라망 2024. 2. 23.

한자의 바다에서 작고小 약한 것弱을 길어올리기



수많은 한자들 중에서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는 2천자에서 5천자 정도 된다. 3천자 정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이미 30개 남짓 되는 한글이나 알파벳에 비하면 과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자가 사용된 6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문자만 해도 5만자(!)가 넘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형태가 다른 한자들까지 더하면 8만자(!!)가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한자를 만든 사람도 무슨 한자가 있는지 절대 모를 수준이다. 게다가 새로운 형태의 갑골문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니 한자의 갯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한자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내가 <한문이 예술>에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한자는 한 시즌에 겨우 10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10자도 많은 편이다. 하루에 하나씩 외워도 10년을 외워야 할 수준인데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수업을 해도 괜찮은지 가끔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자의 갯수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 말이다.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날것’이 드러나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한문이 예술>에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보며 가까워진 친구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뒤에 <한문이 예술>에 오게 되니 자연스럽게 무리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그 무리를 살펴보면 그 사이에서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소외시키거나 배제시키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한 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남자아이가 단발머리를 한 다른 남자아이에게 몇 주 동안 ”왜 남자애가 여자애같이 머리가 기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여자애같이’라는 말에 놀랐고, 질문을 받은 아이는 이런 상황이 지겨운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개입해 머리 모양에 남자와 여자가 무슨 상관이냐며 상황을 넘어갔지만 아이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인지 그 친구에게 몇 주 동안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이런 모습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날것’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이’에게 흔히 기대하는 천진난만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서 비롯한 폭력적인 모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성인으로 자라며 사회경험이 쌓이고 다양한 관계를 맺다보면 그 순진한 폭력성은 자연스럽게 겉치레같은 것으로 은밀하고 교묘하게 숨겨지게 된다. 아직 그런 교묘함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결과적으로 힘이나 외모, 그 어떤 것으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상황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그 수준이 어떻든 그런 행동은 폭력적이기에, 나는 이런 ‘날것’을 느낄 때마다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작고小 약함弱이 보여주는 것
사회적 소수자(少數者)는 흔히 지배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적 기준과 가치에 충족되지 않아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평균 이하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빈민이나 정상의 범위가 아니라 여겨지는 성소수자들처럼, ‘평균’ 이하의, 혹은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나있어 어떤 관계에서 우위에 서지 못하고 권리를 쉽게 포기하게 되는 이들말이다. 소수자는 글자 그대로 ‘적은 인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고대에는 작다小와 적다少가 모두 ‘작다’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사회적 소수자가 사회적 약자(弱者)라 불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작고(적고) 약한 것은 같은 계열의 의미로 보인다. 정말 그럴까?

약할 약弱은 날개 우羽와 비슷해 가볍고 망가지기 쉬운 깃털을 본뜬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활(弓)의 활시위를 의미하는 한자다.* 활은 인류학적으로 볼 때 인간에게 원거리 공격을 가능하게 만든 아주 중요한 무기인데, 사냥이나 전쟁같이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활대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활시위를 풀어놓고 보관했다고 한다. 활시위가 걸리지 않은 활은 그저 줄 달린 막대기라는 점에서 활의 주인공은 활대가 아니라 활시위弱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고대 중국에서 전해지는 여섯가지 예절(六藝)** 중에 활쏘기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사람들이 활쏘기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그것은 단순히 사냥이나 전투를 위해 무기를 잘 다루기보다 스스로를 단련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고대 사람들에게 활쏘기는 마음을 모으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련이었다. 그들은 활쏘기를 위해 균형잡힌 신체와 훌륭한 활만큼 활을 쏘는 자세와 태도를 익히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활은 사냥감보다도 과녁을 향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 활쏘기의 자세와 태도란 부드러운 활시위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빛과 바람, 대상과의 거리, 나의 상태 등등,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주변을 파악하고 상황에 맞춰 대응하는 자세. 목표를 위해 활시위를 당기지만 목표만을 바라보지 않는 유연함 말이다.

작을 소小와 적을 소少는 모두 작은 모래알갱이를 표현한 모습이다. 해변가의 모래는 처음부터 그 곳에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커다란 바위가 오랜 시간동안 침식과 풍화를 거쳐 만들어진 결과다. 그리고 작은 모래 알갱이는 가라앉아 다시 퇴적되어 커다란 바위가 되는 순환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니 하나의 알갱이는 바위의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을 커다란 바위로 생각해보자. 그럼 우리 몸의 머리카락, 눈, 코, 귀… 손톱과 무릎의 점, 발가락의 모양까지 모두 각자가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알갱이가 된다. 이 작은 알갱이들은 ‘고유한 모습’ 없이 천차만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눈동자 색이 다르거나, 동공이 크거나, 작거나, 혹은 보이지 않거나. 손가락이 두껍거나, 얇거나, 짧거나, 길거나, 없거나, 혹은 더 많거나. 

장애障礙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본다면 ‘불편하다’, ‘걸리적거리다’라는 의미다. 물론 ‘장애가 있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만, 본질적으로는 연필을 쥘 때 손가락이 없는 것이 ‘걸리적거린다’, 걸을 때 다리 길이가 달라서 ‘불편하다’ 정도의 층위인 것이다. 불편하고 걸리적 거리는 것은 물리적인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수학을 못하거나, 그림을 못그리는 것도 장애의 영역에 포함된다. 우리에게는 모두 일정 정도의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있고 그것이 곧 나의 특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특징이 나와 뗄 수 없는 구성요소이자 핵심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연습을 성실히 한 사람이 연주회를 열 정도의 실력을 가지게 되거나, 다리를 잃었어도 의수로 자전거 타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의수는 그 사람의 핵심이 된다. 작은 알갱이가 갖고 있는 저마다의 특징은 결함이 될 수도, 핵심이 될 수도 있다. 활의 핵심이 단단한 활대가 아니라 달랑달랑 달려있는 얇고 부드러운 활시위인 것을 보면 ‘작음‘과 ’약함‘은 서로를 지탱하는 비슷한 계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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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弱은 상형자가 아닌 지사자로 활의 활시위 부분을 표현한 기호같은 한자다.
** 육예六藝는 주나라의 예절서인 《주례(周禮)》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덕목으로 예절禮, 음악樂, 서예書, 수학數, 말타기御, 활쏘기射를 의미한다.

 
크고大 강한 것强, 그 안에도…
그렇다면 작고 약한 것과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크고 강한 것은 어떨까? 고대 사람들은 ‘강함强’도 활에서 찾아냈다. 일상에서 ‘강하다’라는 글자는 '强'가 많이 사용되지만 고대사람들이 생각하는 ‘강함’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형인 '強'로 알아보는 것이 더 좋다. 强은 벌릴 인引부터 시작되는데 引은 활弓을 쏘기 위해 시위丨를 꽉 쥐고 넓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고대 사람들은 보다 섬세하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벌릴 인引으로부터 활시위 강하게 붙잡아 벌리고 있는 팔과 주먹을 의미하는 벌릴 홍弘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고대사람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곤충虫을 통해 ‘강함’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왜 곤충虫이었을까? 곤충이 가진 턱의 아구힘에서 그들의 힘을 느꼈던 것이라 생각한다. 개미는 자기 몸의 여섯배를 들어올릴 수 있고 사슴벌레는 사람의 살점을 뜯을 정도의 턱힘을 갖고 있다. 입을 크게 벌려 싸우고 자신의 몇배나 큰 먹이를 물어뜯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강하다’는 걸 강렬하게 느낀 것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고대 사람들이 ‘강하다’라는 것을 인간으로만 한정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것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활시위를 끌어당기고 있는 모습인 끌다, 당기다 인引



활시위를 벌리고 있는 팔을 더 강조해서 만들어진 벌릴 홍弘


 
大는 뜻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한자다. 大는 다리와 팔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사람을 본뜬 글자로 단번에 머리와 팔,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大는 팔 다리가 다 자란 성인을 지칭하는 글자였는데 서서히 큰 물건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큰 것’은 끝이 없다. 작은 사람과 큰 사람, 사람보다 큰 냉장고, 내가 서있는 건물… 코끼리, 기린, 공룡, 흰수염고래… 달, 지구, 목성, 태양, 은하, 우주…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당장 태양과 내 주먹을 나란히 비교해보면 내 눈에는 내 주먹이 더 크다! 물론 주먹이 태양보다 클 수는 없다. 단지 ‘크다’는 개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표현일 뿐이라는 거다. 결국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더 ‘크다’고 여기는지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크다’거나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새로운 가치?
우리는 자신의 입지를 크게 키우고 강해지기 위해 작고 약한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외면하려 한다. 때로는 나아가 상대를 무시하거나,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강함을 확인하려 든다. 아이들의 ‘날것’은 결국 그런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것은 오히려 핵심이 되기도 하며, 자신의 크기는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고대사람들은 오히려 ‘약함’을 배우려 했고 작은 곤충을 통해서 ‘강함’을 깨달았다. 이 수업은 양극에 해당하는 개념에 대해 익히며 아이들에게 크고 강함과 작고 약함의 다른 가치를 전해보자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가 그저 ‘입바른 말’처럼 느껴질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활시위를 당기는 유연한 마음가짐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거나 나를 구성하는 작은 조각들을 적으며 친구와 공통점을 발견해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작고 약한 것을 마냥 좋은 것이라고, 크고 강한 것도 별것 아니라고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모두에게 그러한 요소가 있다는 것, 누구나 서로 다른 작은 알갱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한자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이런 기획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나도 아이들의 ‘날것’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왜 뚱뚱해요?”, “선생님은 왜 이렇게 엉덩이가 커요?”같은 질문을 면전에서 받을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숨겼다. 아이들의 행동은 어릴 적 원색적인 놀림으로부터 애써 태연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와,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일 수록 더 상처 입히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이 수업은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들도 나와 별다른 것 없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모든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 깨달음을 끄집어 내기보다는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 사람들의 가치가 오늘날의 가치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고, 그 의미를 나와 연결짓고 싶었다. 

한자를 알아갈수록 ‘새로운 가치의 발견!’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이라면 몰라도. 그러니 나는 우리가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 유연하고, 약하고, 작고 적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자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더 길어올릴 수 있을까? 수만자가 넘는 한자의 바다가 광활하고 아득하면서도 아련하게 빛나보인다. 

 

 

 

글_동은(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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