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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일리치

[내 인생의 일리치] 스마트폰과 쾌락의 활용

by 북드라망 2024. 1. 12.

스마트폰과 쾌락의 활용

 

정건화

 

스마트폰, 어떤 참을 수 없음
『소셜 딜레마』라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는 섬뜩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리콘밸리의 똑똑한 기술자들과 디자이너들이 심리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거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물론 아니다.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나 플랫폼에 사람들을 더 자주, 더 오래 붙들어두려면 인간 심리의 취약한 지점을 가차 없이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메일의 아이콘 하나, 페이스북의 ‘좋아요’ 같은 기능 하나도 ‘그냥’ 만들어진 건 없다.

그들이 애용하는 가장 기초적인 이론 중 하나는 인간의 두뇌가 불확실한 피드백에 더 강력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은 이 이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게시물들을 시간 순으로 노출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이용자가 좋아할 만한 새로운 사진과 동영상들을 랜덤하게 보여준다. 스크린 밖의 현실은 늘 거기서 거기인데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는 터치 한 번만으로 예측 불가능한 피드백이 무한정 제공되니, 우리의 뇌는 자연히 새로운 자극이 있는 쪽에 반응하게 된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는 화면 너머에서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엘리트 엔지니어 군단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우리의 관심과 주의, 시간을 약탈하여 광고주들에게 제공한다. 이용자들의 니즈를 반영해 보다 개선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미명 하에.

끔찍하다. 멍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열과 성의를 다해 타인의 무의식을 공략하고 행동을 조작하려드는 기술자·전문가 집단의 행태가,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도 합법적인 형태로 우리의 일상에 용해되어 있음이. 솔직히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이 상황의 제 3자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일주일 중 가장 바쁜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나는 종종 보상처럼 스마트폰에 몰두한다. 자발적으로 멍청해지기 위해 넷플릭스 드라마나 유튜브 영상, 스포츠 하이라이트, 인터넷 쇼핑에 빠져든다. 긴장을 좀 이완하려던 거였는데 어느새 몇 시간이 흘러있다. 이런 일이 일주일에 한두 번만 일어나도 생활리듬이 망가진다. 스마트폰이 인간에게 가하는 파괴적인 힘. 우선은 이것을 문제화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쾌락의 근본독점

 

“어떤 도구들은 그것을 누가 소유한다고 해도 파괴적이다. 이는 그 소유자가 마피아든, 주주든, 외국회사든, 국가든, 심지어 노동자집단이든 간에 마찬가지다. 다차선 고속도로망, 장거리 주파수의 송신기, 노천광산, 강제적 학교제도가 그런 도구들이다. 그런 강제적 도구들은 불가피하게 통제나 의존, 수탈이나 불능을 증대시키고 부자만이 아니라 빈민으로부터도 절제(conviviality)를 빼앗기 마련이다.”(이반 일리치, 『절제의 사회』, 생각의 나무, 63쪽)

 

이반 일리치는 도구와 인간이 맺는 관계에 관해 아주 급진적인 사유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어떤 도구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인간의 자유를 훼손한다. 왜냐하면 인간적 평형작용, 그러니까 생각하고 말하고 거주하고 교류하는 등등을 포함한 인간의 전반적인 활동들은 그 고유의 역사와 리듬을 갖는 것인데, 거기에 지나치게 역동적이고 거대한 규모의 도구 체계가 도입될 경우 인간의 삶은 예속과 무기력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리치가 통찰한 산업주의의 현실이다. 인간의 삶의 리듬에 맞춰 도구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들의 역동적인 개발과 발전의 속도에 인간을 적응시키는 것. 이게 바로 일리치가 비판한 산업사회의 기본적 원칙이다.

일리치는 ‘근본독점’(radical monopoly)이라는 개념을 통해 도구의 지배를 문제화했다. 근본독점이란 “어떤 산업주의적 생산과정이 절박한 필요의 충족에 대해 배타적 통제를 행사하고 산업주의적이지 않은 활동을 경쟁에서 배제하는 것”(이반 일리치, 『절제의 사회』, 생각의 나무, 109쪽)이다. 우리 삶에 필수적인 어떤 필요의 충족이나 행위에의 참여에 있어서 특정한 산업적 도구들에 대한 의존을 경유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학교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배우기 위해서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배움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원하는 것을 원하는 속도와 방식에 따라 배울 수 없고, 거기서 배우는 것을 삶과 연관 짓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학교에서의 배움은 평균적 의식수준을 지닌 상식인을 길러내는 데 적합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고유한 욕망과 리듬과 삶의 맥락을 지닌 개별적인 존재들의 자리는 지워진다. 학교라는 도구는 교육부가 지정한 방식으로만 배우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지닌 배움의 역량을 박탈한다.

일리치의 영감을 받아 말해보건대, 우리는 스마트폰과의 관계 속에서 쾌락을 독점당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두뇌에 신경자극을 무한정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자극에 대한 기계적 반응이 쾌락의 유일한 형식이라는 믿음을 강요한다. 얼마 전 한 유튜브 영상에서 웹소설계의 현실에 대해 전해들은 적이 있다. 내가 구독하고 있는 유튜버에 따르면 무협이나 판타지 장르의 웹소설에서 점점 더 주인공이 어떤 좌절이나 갈등, 침체상태 같은 것을 겪도록 하는 것이 금기시되어간다고 한다. 독자들은 갈수록 더 갈등상태의 지속이나 더딘 전개 같은 것들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은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고, 계속해서 승리해야 하며 이야기는 말초적 자극들로만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스마트폰이 작동시키는 무시간적인 정보의 순환. 이것은 결국 ‘더 빨리’라는 자본의 속도에 의해 지배된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는 능동적 쾌락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우리 모두가 한 번 쯤은 느껴보았을 무력감과 공허감. 이를 언어화하고 문제화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이것이 쾌락적 경험이라는 데에 있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쾌락을 금지하거나 억압하기는커녕 한계 지점까지(몸이 상할 때까지!) 강화하고 또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그래서 우리는 면이 서질 않는다. 우리는 하찮은 쾌락에 유혹당해 누구도 쓰라고 강요하지 않은 도구에 자발적으로 중독되어버린 미숙한 인간이 되고 마는 거다. 일상생활의 균형을 찾기 위해 스마트폰 이용을 줄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부한 훈계에 우리는 수치스러운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머쓱해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논점은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특정한 쾌락의 이미지를 강제한다는 점이다. 교육제도가 부과하는 배움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능동적으로 배우고 공부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들이 필요한 것처럼, 강요된 쾌락의 이미지를 변환하여 자기 즐거움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도 쾌락에 대한 다른 상상이 필요하다.

 



소모적이지 않은 즐거움
넷플릭스나 유튜브가 제공하는 컨텐츠의 바다는 우리에게 ‘무한한 쾌락’이라는 이상을 제시한다. 거기에는 침묵도, 고독도 없다. 끊임없이 누군가 말을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장면이 나타나 언제까지고 나를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그러나 그런 자극의 홍수에 몸을 담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때의 무한한 쾌락이란 사실은 동시에 무한한 권태이기도 하다는 것을. 수동적 반응의 차원으로 떨어진 쾌락은 진정으로 충족적인 것일 수 없기에 항상 어떤 미진함이 있다. 어쩌면 여기에 비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진정한 충족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계속 붙들어둘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실상 ‘무한한 쾌락’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떠한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그로부터 오는 쾌감에는 권태가 수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려운 책을 읽는 경험이 그렇다.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전개 되는 책을 읽는 것은 우리를 오히려 피로하게 한다. 반면 우리의 인식능력을 쥐어짜야 하고, 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나아가야 하는 책을 읽을 때 정신은 활기를 띤다. 그것은 그 경험이 평소에 활성화되어 있지 않던 감각들을 마구 일깨우고 생각을 예측하지 못한 지점으로 이동하게끔 추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쾌락은 중단 없이 지속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하다. 분명 힘들지만, 소모적이지는 않다.

컨텐츠의 홍수가 제공하는 손쉬운 쾌락에 대한 탐닉에는 어떤 허무주의가 깃든다. 이러한 즐거움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우리를 소비자의 지위로 격하시킨다는, 그다지 건강한 것이 아니라는 신체적이고 무의식적인 자각이 슬픔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면 우리 자신의 힘을 발휘해야 하는 어려운 기쁨은 쾌락 그 자체를 오롯이 긍정하도록 한다. 이러한 어렵고 단단한 기쁨의 경험들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 이것이 스마트한 시대에 우리가 익혀야 할 쾌락의 활용법이 아닐까.

 

 


필자 소개 : 정건화는 작년부터 부천 '비움' 팀과 함께 이반 일리치를 공부하고 있다. 일리치의 구절들을 삶으로 소화하는 비움팀 중년 선생님들로부터 많이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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