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미야자키 하야오-디테일, 움직임, 비전의 마법사

by 북드라망 2023. 8. 11.
안녕하세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읽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질문이지요. 애니메이션에 대해, 미야자키의 고민에 대해, 여러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난리법석인 그 세계로 들어가 보아요! ^^   

 

미야자키 하야오-디테일, 움직임, 비전의 마법사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7월에 개봉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은퇴작이라고 했지만 역시나, 그의 가슴에는 그리고 싶은 이야기가 무궁무진이다. 일본 열도에서는 어떤 사전광고도 없이 발표된 이 작품이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트레일러가 공개되지 않아, 보고 난 사람도 이미지를 편집해 자기 감상으로 유튜브 등에 올릴 수가 없다. 미야자키는 관객들이 어떤 선입견 없이 오직 자신의 눈과 귀로 이 작품에 다가가기를 원한 것이다. 정보가 홍수처럼 터지는 시대, 제 삶의 지혜를 전문가나 권위자에게 묻기 바쁜 세태, 미야자키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커다랗게 새의 눈만 강조한 포스터 하나로 ‘너는 이 작품을 보고 싶은가?’를 물었던 것이다. ‘당신의 자신의 선택을 감당할 수 있는가?’, ‘영화 내용이 뭐가 되어도 너 자신의 영화로 가져갈 수 있는가?’ 거장은 웃는다. 일상의 온갖 소비와 모든 경험이 평점이나 리뷰를 따라가기 십상인 요즘, 영화 감상이라는 사소한 이벤트쯤은 알아서 하는 거라시며. 그렇게 거장은 묻는다. 자, 그대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것을 왜 하는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포스터 / 출처-위키백과

 
개구리와 가마 할아범
미야자키 하야오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가 새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2017년부터다. 미야자키는 《바람이 분다》(2013)에서 이미 은퇴를 선언했었다. 이 샘솟는 창작의 새 기운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를 촉발한 문제는 또 무엇인가? 
 
무문자 사회의 신화가 다종다기한 것들의 복잡한 윤리를 고민한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는 전작(全作)을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미야자키의 세계에는 늘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과 괴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단 한 편의 예외가 《바람이 분다》인데, 철저히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도 소년의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속악한 현실을 초월하는 희망을 제시한다. 미야자키는 늘 지금 여기, 보이는 것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태도는 태양을 보면서도 달을 생각하고 불을 보면서도 물을 떠올리는 무문자 사회의 신화와 통한다. 미야자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의 문제를 늘 현실의 안과 밖을 가득 채우는 존재들 속에서 풀었던 것이다.
 
미야자키 세계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그 어떤 미덕보다도 나는 작품 속 디테일에 끌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발불명》을 보자. 이 작품은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하기 위해 8만 신들이 휴식을 취하는 저승에서 온갖 모험을 하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이런 줄거리는 죽은 부모를 구하기 위해 저승도 마다치 않는 바리데기 신화의 모티프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전래 동화란 늘 타인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를 던지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니까. 문제는 구석구석에 배치된 요소들이다. 미야자키가 세부묘사에 철저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디테일은 한 마디로 관점의 복수성에 기반해 있기에 그 중에서도 압권이다.   
 
단적인 예로 온천장 개구리씨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주인공 치히로는 부모에게 저주를 건 마녀의 온천장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서 건물의 맨 아래에 있는 가마터로 내려가기로 한다. 치히로는 건물 외벽에 둘러쳐진 계단을 따라 몰래 내려가다가, 계단이 낡아 부서지는 바람에 중간 지점에서 허둥지둥 멈춰서게 되었다. 이때 지하 2층 식당 창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개구리같이 생긴 주방 일꾼이 긴 모금으로 담배를 빨아들인다. 치히로가 계단 밖으로 나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도할 새도 없이, 온천장 식구들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스릴도 스릴이지만, 동심천국이어야 할 애니이션에 담배 피는 어른이 등장한다는 것은 처음 보았을 때에도 큰 충격이었다. 
 
더 곤란한 지점이 또 있다. 사실 작품 전체로 보면 치히로의 모험에 이 주방 일꾼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야자키는 그가 얼마나 깊이 담배를 들이마시는지 공들여 묘사한다. 게다가 열린 창문으로부터 주방 식구들의 시끌벅적함이 들려온다. 부모 구하기 바쁜 소녀의 세계라지만, 그 속에는 그런 일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일상적 노동이 한가득인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치히로가 급히 계단을 다 내려 오면,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어 웅장한 효과음과 함께 가마 할아범의 작업장의 입구가 나타난다. 이 입구는 꼭대기층에 있는 사무실 입구와도 잘 대비된다. 유바바 집무실 입구가 화려한 장식용 가구들로 가득 차 있는 것과 달리, 맨바닥 가마터의 입구는 뜨거운 김을 웅장하게 뿜는 온수 파이프들이 겹겹으로 늘어서 있다. 각각의 파이프에는 온도계가 달려 있고, 수압을 조절하는 용도로 보이는 운전대 같은 것도 장착되어 있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할아범의 작업장 바깥 입구에 붙어 있는 세면대다. 비누와 거울이 있고, 그 위에는 작은 전구와 수건이 걸린 간이 옷걸이까지 있다.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그 장소에서 손이나 얼굴을 씻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가마 할아범은 아니다. 할아범은 앉은 자리에서 일하고 식사하고 잠까지 잔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 세면대를 이용하는 것일까?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마터에 놓인 작은 세면대는 어떤 일꾼을 위한 것인가? 미야자키는 왜 이런 디테일을 고집하는 것일까?  
 
가마 할아범의 작업장은 더욱 놀랍다. 어른 두 사람 몸 뉘이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이곳에서, 팔다리가 여럿인 가마 할아범이 약초를 제조한다. 이 작업장을 채우는 것은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다. 하나는 거대한 쇠와 불의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대단히 많은 수의 약초장(藥草欌)이 보여주듯 다채로운 식물의 이미지다. 불이 끓이는 것은 물이고(그래서 온천장은 물 위에 세워져 있다), 약초들이 자라는 것은 대지이므로 가마터는 온천장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장소가 된다. 물과 식물이 불과 함께 달여져 약물이 되는데, 여기서 미야자키는 중장비처럼 무뚝뚝하지만 성실하고 힘센 기계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견고한 보일러를 기계적으로 작동시키는 작업장의 주인은 팔다리가 여럿인 거미 인간이다. 이 팔다리는 유연하며 작업장을 꽉 채운 설합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더듬으며 일한다. 미야자키는 가마터를 할아범의 일터이자 쉼터로 그린다. 그곳에는 먹고 채 치우지 못한 그릇이 있고, 피다 말다 하며 쌓인 담뱃대들이 있다. 후덥한 가마터인 만큼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는 물주전자도 있다. 그리고 또 입구 반대편, 작업하는 자리이자 잠자리이기도 한 높은 단, 그 옆에는 할아버지의 취향이 잔뜩 묻어 있는 고풍스런 항아리 하나, 장난감 하나, 책 몇 권, 그리고 치약과 칫솔, 휴지가 있다. 이 가마터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상식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이 연결되며 함께 작동한다. 노동과 휴식이 같은 자리에 있고, 불과 물이 나란히 있고, 기계와 식물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먹음(들임)과 씻음(내보냄)이 연결된다(할아범이 밥을 가져온 온천장의 하녀 린을 바라볼 때 칫솔과 치약이 등장한다). 
 

출처 - 다음 영화

 
세계를 꽉 채운 존재들과 그 모든 것이 함께 하는 역동적인 과정! 이 세계는 안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약속은 있다. 유바바의 허락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온천장 안을 돌아다녀서는 안 되고, 가오나시처럼 몰래 들어온 것 때문에 큰 혼란이 생기기도 한다. 모든 것이 맞물려 움직이면서 전체적 활기가 일어난다. 멈춤 없는 각자의 노동은 가마터에 활기를 불어넣고, 거기서부터 신들의 휴식, 신들이 활동해야 할 이승의 삶에 생기가 만들어진다.   
 
이 세계에서 치히로는 하나의 미션을 부여받는다. 소녀는 가마터에 들어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배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두 가지는 노동과 인사인 것이다. 지하 2층에서 가마 할아범의 응원을 받으며(굿 럭!), 꼭대기 6층에 있는 유바바를 만나러 가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치히로는 물러섬 없이 자신이 따라야 할 이치를 깨우친다. 치히로는 자기가 어떤 노동을 할 수 있으며, 그 노동을 통해 만나게 되는 존재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알아간다. 작품 끝에서 밝혀지지만 그것은 고마움이다. 어쨌든 이런 훌륭한 메시지보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미야자키가 그려내는 세부들이다. 부모를 구해야 하는 치히로의 발 아래, 등 뒤에는 그와 무관한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미야자키는 작품 속에서 치히로의 걱정과 고민을 제일 중요한 문제로 다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 미야자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미야자키라면 이 아파트 단지의 어디를 포착할 것인가, 그 장면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 그러면 눈 안에 아주 많은 사물들이 들어온다. 심지어 누가 버린 담배꽁초까지도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초등학교 앞에 버려진 꽁초를 보고 가만히 있지 않겠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어른들이 있는 세계라고 해석할 거야. 그럼, 그 어른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들의 나이는 몇이나 될까? 나와 무관한 삶을 사는 누군가가 어딘가에 있다. 그와 내가 같은 세계를 살아간다.  
 
 
비전, 일상의 철학
미야자키는 왜 치히로의 모험에 개구리 아저씨를 출현시켰는가? 그저, 그리고 싶으니까일 수는 없다. 개구리 아저씨가 뿜어대는 담배 연기를 묘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그림이 필요한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지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녀의 온천장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그렸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 어디에도 그런 온천은 없다. 하지만 이 온천장이 환상이기만 하지는 않다. 우리가 개구리 아저씨 덕분에 일상의 깊이와 넓이를 다시 실감할 수 있기 떄문이다. 실사 영화가 아니라 한낱 상상의 그림 조각들이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주는 리얼리티는 어떤 3D 영화보다도 역동적이다. 이유가 뭘까? 도대체 어떤 확신으로 미야자키는 온천장을 그렸을까? 온천장에 대한 어떤 이해 속에서 개구리 아저씨를 그릴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왜 이렇게 약동하는 세상을 느끼게 할까? 
 
답은 개구리 아저씨의 세계 밑에 있다. 미야자키가 그리는 있을 법한 그 세계는, 미야자키가 보기를 원하는 세계인 것이다. 저마다의 노동이 의미를 갖고 각자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세계말이다. 그런데 비전이라고 해서 들여다보면 조금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미야자키는 스타워즈 같이 영웅이 나와서 세계를 구하는 꿈을 꾸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는 숲과 철이 대결하고, 생과 사가 맞선다. 그런데 이 대결을 떠받치는 것은 밥 먹고 집 치우며 잠자는 나날의 일상이다.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직시하고 공존을 모색하지만, 문제의 해법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멧돼지의 슬픔을 어떻게 껴안을 것인가에 있다. 소년과 소녀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지만 절대 한 집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 성숙의 한 걸음은 미소녀가 아니라 할머니가 내딛는다. 미야자키는 거대한 문명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이, 위대한 역사가 아니라 소박한 감정이, 욕망으로 들끓는 자기가 아니라 고통으로 신음하는 타인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 설정 안에서 미야자키의 주인공들은 누구도 ‘싫어!’라고 하지 않는다. 숲 전체가 어리석음으로 물들어가고, 부모가 돼지로 변하더라도, ‘나는 여기서 일하겠어!’라고 과감히 결단한다. 잘 산다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책임지려는 마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비전은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온-삶에 대한 이해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손으로 작업하는 장인 
참 미스테리이다. 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중간부터 시작해도 끝까지 볼 수밖에 없고. 볼 때마다 어떤 활력을 얻게 되는가? 이 비밀은 세 가지 키워드로 접근해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디테일, 활력, 비전이다. ① 작품의 디테일이 장면마다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② 각각의 세부가 어떤 테마 속에서 캐릭터를 움직이게 하면서 감동을 일으키는지, ③ 마지막으로 이 생기의 이면에 미야자키의 어떤 세계관이 작동하는지. 이 세 가지 차원을 검토하면서, 《나우시카》(1984)부터 《바람이 분다》까지를 읽어보면 어떨까?
 
연재에 앞서 공부하게 될 작품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것으로 한정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미야자키가 다양한 방식으로 관여하고 있는 스튜디오 지브리는 로고 자체가 토토로인 만큼 미야자키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일본 애니메이션 계의 태풍을 일으키자라는 취지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鈴木敏夫)가 합심하여 만든 회사이다. 1985년 6월 15일에 설립되었으니 2023년에 이른 지금 38년이 되어 간다. 물론 《바람이 분다》이후, 미야자키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식적으로 계획이 발표되는 2017년 5월 19일까지 휴지기도 있었다. 미야자키가 지브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붉은 돼지》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붉은 돼지》를 연구할 때 살펴보도록 하자. 지브리는 다양한 비전으로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회사이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만을 감독으로 두고 있지는 않다. 《반딧불이의 묘》(2005)를 만든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勲; 1935~2018)를 비롯 《고양이의 보은》(2002)의 모리타 히로유키(森田 宏幸), 《게드 전기-어스시의 전기》(2006)의 미야자키 고로(宮崎 吾朗) 등 다양한 감독들이 지브리에서 활약했다. 실사 영화를 계획한 적도 있고, 미야자키는 확실하게 거리를 둔 디지털 영화 실험도 《아야와 마녀》(2020; 감독 미야자키 고로)도 있다. 
 
이토록 다양한 기획에 미야자키가 다방면으로 관여했을 테지만, 일단 공부 대상으로는 미야자키가 감독을 한 작품만 보려고 한다. 애니메이션도 감독마다 다양한 스타일로 작업이 되고 영화화되지만, 미야자키만의 독특한 제작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식의 감독 방식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야자키는 그리면서 줄거리를 완성한다. 미야자키는 전체 줄거리 없이 그려가면서 작품을 완성시키기로 유명한데(악명인가?), 덕분에 대강의 메시지와 압축적인 이미지 몇 개에서 출발해서 완성이 될 때까지 몇 년 동안 스튜디오 전체가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며 엄청난 실패의 산을 넘게 된다. 이러한 불안정성 속에서 비전을 구축해간다고 하는 작업 방식은 지브리에서도 미야자키가 유일하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는지 모르지만, 그린 후에 마침내 알게 되는 진실이란 무엇일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콘티 / 출처 - 나무위키

 
둘째, 미야자키는 부분적으로 3D를 수용하기는 하지만(《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최고도로 실험된다), 기본적으로 손 그림을 고집한다. 물론 미야자키가 모든 그림을 다 그리는 것은 아니다. 배경과 캐릭터, 사건의 핵심 윤곽을 잡을 때 그의 그림이 바탕이 된다. 이 기본 그림을 바탕으로 전문 작화가들이 보충하며 동작을 만들고 색감을 찾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을 미야자키는 각자의 ‘손’으로 하길 원한다. 이런 미야자키의 고민에 관해서는 《Never Ending Man》(2018)에 나와 있다. 미야자키에게 애니메이터란 자기가 해석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은 통계로 ‘가능한 세계’를 그린다. 손 그림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은 그리는 인간이 ‘원하는 세계’로서 표현된다. 애니메이터는 자신이 창조한 그림에 의해 그 자신이 새로워진다. 자기 비전에 의해 구원받는 이는 작품을 본 관객이 아니라 우선 작가 그 자신이 된다. 미야자키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은퇴를 선언하고, 돌아서면 그 결심을 번복했던 것은 낡은 자기 안에서 새로운 자기를 매번 새롭게 꺼낼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이런 두 가지 관점에 주목해서 현실과 미지를 잇고, 버리지만 새로워지는 자기와 마주하는 한 사람의 작가에 대해 공부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지브리의 작품들 중,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다음의 열 편을 살펴보려고 한다. 《나우시카》(1984),《라퓨타》(1986),《토토로》(1988),《키키》(1989),《붉은 돼지》(1992),《원령공주》(1997),《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벼랑 위의 포뇨》(2008),《바람이 분다》(2013). 정말이지 순서대로 작품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미야자키는 《나우시카》이후로 거의 쉰 적이 없다. 겨우 만화영화라지만, 미야자키는 자신의 손 아래에서 온갖 이야기가 아우성치는 것을 느꼈으리라. 보이지 않지만 엄연한 이 존재들의 진실에 생기를 부여하면서 거장은 나아갔다. 한편 한편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에 감동적이다.
 
 

글_오선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