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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식탁 위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 서평 (1)신화라는 요리의 맛

by 북드라망 2023. 7. 26.

『신화의 식탁 위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 서평 (1)


신화라는 요리의 맛

조혜영(인문공간 세종)



신화가 요리라고요?
한때 요리책을 즐겨 보았다. 먹음직스러운 사진 때문이었지만 요리하는 과정과 맛을 상상하기도 한다. 요리에 낯선 재료가 들어가면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하다. 그것이 아주 뜻밖의 재료라면 더욱 그렇다. 『신화의 식탁 위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은 신화를 재료로 한 요리 이야기다. 신화의 기호를 해석하여 요리로 읽어내는 기발함이라니! 저자 오선민 선생님은 “한 편의 신화는 맛보는 이마다 다른 양식을 얻어 가는 한 그릇의 요리”라고 말하며 독자들을 신화의 식탁으로 초대한다. 


신화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뻔한 권선징악의 스토리,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책에 의하면 신화는 관계의 철학이 작동하는 이야기이다. 살아가는데 관계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 신화는 바로 지금 우리 삶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책에서는 특히 신화 속 먹는 이야기에 집중하며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먹으며 관계 맺는지를 탐구한다. 선생님과 함께 신화의 식탁에 차려진 요리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재료 다듬기
신화의 언어는 재현의 언어가 아니고 기호적 언어이다. 신화 속에서 늑대가 새로 변했다가 벌이 된다거나 별을 사랑하는 사람이 별과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를 실제 현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언어를 크게 구분하면 이미지, 기호, 상징인데 그중에서 기호적 언어는 감각적인 것의 관념적 사용이다. 예를 들어 ‘빨강’은 다양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이것을 기호로 본다면 색채표에서 인접항인 ‘노랑’이나 ‘초록’과의 배치에서 일어나는 작동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기호는 특정한 이야기와 함께 작동하며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와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신화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기호 즉 레고 블록이라고 생각해 보자. 신화를 해체하여 종류별로 기호를 분류하고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분석한 후 기호를 하나하나 조립해 본다. 기호 각각은 차이화에 능하여 다른 상대와 만날 때 또 다른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기호들은 서로 마주치면서 의미가 변용되고 새로운 풍미가 생기는데 이러한 과정을 요리에 비유할 수 있다. 신화 속 언어가 기호로서 어떤 대상과 어떻게 관계하며 새롭게 변하는지 해석하면 요리의 재료 다듬기가 완성된다.

 


식탁 차리기
신화의 기본 주제는 먹는 이야기다. 먹기의 문제는 먹히는 쪽에서는 분해되는 일이고 먹는 쪽에서는 자신에게 맞게 소화시키는 일이므로 자기를 변용시키는 일이다. 또한 먹는다는 것은 어떤 재료를 어떻게 요리하여 누구와 먹을 것인지의 문제, 다시 말해 타자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신화 속에서 식탁을 차리기 위해 불을 얻고, 식재료를 구하는 일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자기를 변용시킬 때 가능하다. 


아피나이에족의 신화에서는 한 소년이 가족이 먹을 새를 잡으러 갔다가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친 후 불을 얻게 된다. 겁을 먹고 새를 잡지 못한 소년은 나무 위에 버려진 뒤 새똥을 뒤집어쓰고 표범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표범의 양자가 되어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된 소년은 표범이 주는 불을 마을에 가져다준다.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아닌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다른 부족의 사냥꾼과 손을 잡아야 한다. 재배식물은 별과 결혼하여 얻을 수 있었고 달과 결혼한 인간 며느리를 통해 농사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를 혐오하지 않고 가족의 부양을 위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식탁을 차리고 함께 먹을 사람을 앉히면 식사준비는 끝난다. 

 


함께 먹기
함께 밥을 먹는 사이 ‘식구’란 식사를 위해 손을 보탠 사람들, 절대 의무에 묶인 타자들을 의미한다. 야생의 인디언들은 신화를 통해 먹을 때마다 관계를 생각했고 모든 먹기는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삶도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돈을 지불하기만 하면 상품이 된 음식을 살 수 있는 우리에게 ‘먹기’의 문제는 추상적인 것이 되었다. 내 한 끼 식사에 관여한 구체적 관계에서 소외되었고 삶은 공허해졌다. 


다른 존재들에 의해 살아가는 야생에는 혼밥이 없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혼밥하면서 먹방을 보는 시대에 식사는 관계맺음이 아니라 욕망의 허기를 달래는 행위로 전락했다. 아무리 먹어도 만족할 수 없는 공허한 삶을 채우고 싶다면 이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려 감춰진 수많은 관계와 배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먹여 살리는 타자에게 감사함을 느낄 때 혼자 먹더라도 함께 먹는 일이 된다. 

 


오래 음미하기
신화의 맛은 씹지 않고 대충 삼켜서는 알 수 없다.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넘기는 밥에서는 밥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밥알을 입에 머금고 침과 섞일 때까지 오래 씹어야 쌀이 품고 있는 맛을 알게 되듯 신화도 오래 음미해야 고유한 맛을 볼 수 있다. 신화는 일반적인 사고의 회로로는 맛을 느낄 수 없고 초심자에게는 왜 먹는지 모르겠는 맛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엄마의 자수실을 구하기 위해 결혼하는 딸이나 며느리에게 농사짓게 하는 시아버지 신화를 ‘여성의 희생’이 주제인 분노유발 막장드라마라고 읽으면 신화의 맛은 제대로 볼 수 없다. 신화의 진정한 맛을 느끼려면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 야생의 사고 회로를 장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야생에서 산다는 것은 나와 다른 존재와 관계 맺고 끊임없이 배치 속의 나로 변용시키는 일이다. 야생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를 읽으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나를 경험하는 맛이 바로 신화의 맛이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을 때, 빈곤한 관계로 삶의 허기가 밀려올 때 신화의 식탁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신화를 음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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