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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루크레티우스와 만나다』리뷰 ⑤ 궤도를 비틀고, 온몸으로 부딪히며

by 북드라망 2023. 7. 10.

『청년, 루크레티우스와 만나다』 리뷰 ⑤


궤도를 비틀고, 온몸으로 부딪히며

송우현(문탁네트워크)


가끔 내 글이나 앨범을 들은 친구들은 부럽다는 듯이 말한다. “넌 진짜 멋지게 사는구나….” “나도 직장 때려치우고 공부하면서 살아볼까?!” 그런 친구들은 사회나 학교에 찌들어 ‘현타’가 왔다며, 계속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한탄한다. 그들에게 나는 조금이나마 다른 루트를 개척해 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인문학 공동체에서 적게 벌며 적게 쓰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멋진 걸 공부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하지만 나도 별다르지는 않다. 똑같이 기획한 프로그램이 엎어질까 불안해하고, 세미나가 이번 주만 쉬었으면 좋겠다고 빌고, 에세이 기간만 되면 괜히 쓰지도 않던 곡을 열심히 쓴다. 애초에 ‘다른 삶’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세상일만큼 비관만 늘었다. 내가 하는 공부가 ‘금수저 짓거리’랑 뭐가 다르냐며 따지는 고향 친구 놈과 다투고, 내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한창때인데 돈을 못 번다며 나를 걱정하신다. 가끔은 스스로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인문학 공동체로 도망친 것 같아서 우울해할 때도 있다. 하고 싶은 공부와 벌어야 할(것 같은) 돈 사이에서 고민하고, 실제로 올해는 취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가 한 달 만에 다시 포기했다. 나는 정말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내가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의 리뷰를 쓰게 된 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쓴 민호는 나와 닮은 점이 많다. 20대 중반이라는 비슷한 나이대고(아닌가?! 아닐 수도 있다)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남성이라는 점, 인문학 공부를 접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는 계몽주의자처럼 굴었다든지, 미래나 주변 사람은 생각 못하고 ‘자기 한몸’만 생각하면서 돈을 펑펑 써대는(물론 남들이 보면 비웃을 만한 금액이다) 성향이라든지, 공동체 내 연애의 단맛과 쓴맛을 본 경험이라든지….(다음에 술 한잔 해요, 민호) 이 사람도 나처럼 ‘다른 삶’에 대한 욕망과 괴리 사이에서 많이 흔들렸겠구나, 흔들린 만큼 글을 잘 쓰는구나, 생각했다.

루크레티우스는 민호의 흔들림을 잘 잡아주었다. 그렇게 보면 루크레티우스를 가지고 글을 쓰라고 과제를 내어준 채운 샘이 대단한 건가?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민호라면 누구든 그 사람을 잘 읽어냄으로써 스스로를 다잡았을 것 같다. 이번에 걸린 게 루크레티우스였을 뿐이지. 그렇다고 루크레티우스가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과학도였던 민호에게 ‘자연과학’과 ‘원자론’을 다룬 루크레티우스는 좋은 케미(화학작용!)를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까지 와닿은 그들의 케미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클리나멘 : 태초에 빗겨남이 있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신의 무게로 인한 원자의 직선 운동이 어느 순간, 다른 원자와의 충돌 없이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운동한다고 말했다. 즉 원자 스스로가 자신의 이전 운동과 미분적인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 우발적 벡터 변경, 찰나적 자기차이화 운동이 클리나멘이다. 원자는 클리나멘을 내제한다.”(137쪽)


이젠 상식이 된 원자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는 현미경이 없었다. 따라서 모든 걸 형이상학 이론으로 제기되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천둥이나 자연재해 등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신을 거치지 않고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그가 강조한 자연과학의 기반으로 사용되었다. 세상 모든 건 원자의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되는데, 허공에서 직선운동을 하던 원자가 우연찮은 계기로 기울어지고 그 부딪힘의 연쇄작용으로 세상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아니 정말 일어나기는 하는가? 이에 대해 루크레티우스는 클리나멘이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이는 ‘사유 가능한 연속적인 시간의 최소치보다 훨씬 더 작은 시간 속’이라는 의미이며, 단지 포착되지 않을 뿐이지, 존재의 내적 원리의 온전한 발현으로써 일어난다고 보았다.(139쪽)

 

세계는 자기 밖에 어떤 원인도 둘 필요가 없다. 포착할 수 없을 정도의 아주 미세한 빗겨남은 또 다른 충돌을 만들고, 여러 충돌이 이어져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를 만들어 낸 이 시초의 빗겨남을 믿고 계속해서 아주 작은 빗겨남을 만드는 게 아닐까? 똑같이 흔들리는 와중에 내 발끝을 바라보기. 아주 잠깐의 중심 잡기. 그런 건 보편적인 사회 밖이든 안이든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말은 ‘아무튼 노력’하다 보면 빛을 볼 거라는 자기계발적인 말보다 훨씬 큰 용기와 가능성을 준다. 모든 존재의 시초로부터 비롯된 아주 작은 빗겨남. 그 빗겨남이 이어져 어떻게 지금의 민호를 만들었는지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우정의 윤리학

그런 빗겨남을 만들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각자만의 방법이 있겠지만, 에피쿠로스는 친구를 만들고 우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전 생애에 걸친 지복을 위해 지혜가 요구하는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애의 획득이다”… 주거, 배움, 유흥, 건강, 돌봄 등 모든 문제를 각자가 홀로 짊어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한, 우리는 평생을 벌어도 계속 모자라다. … 하지만 서로 다른 높낮이를 가진 존재들이 연결된다면, 우선적으로 각자의 물질적/비물질적 능력을 나눌 수 있다. … 친구의 존재가 요청되는 일차적인 지점은 여기다. “우정은 유익성으로부터 시작된다.”(226쪽)


기본적으로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친구란 기능적 존재다. 하지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이 함축하는 수많은 지점은 결코 기능적이지만은 않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세상에 혼자 맞서고 있지 않다는 감각을 준다는 것이다.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라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에피쿠로스, 『쾌락』, 바티칸 소장 문헌 34/ 29쪽) 내가 우울에서 빠져나올 수 있던 것도 친구들의 존재 그 자체였다. 실질적 도움을 유효했지만, 그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이 어려움보다는 즐거움으로 가득해진다. 물론 싸우기도 하고, 안 좋은 일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은 꼭 학교에서 만난 ‘또래 친구’들하고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누군가를 단순히 만나는 것을 넘어 우정의 윤리를 이야기한다는 건 우연한 마주침을 어떻게 자신의 역량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나와 결코 포개어지지 않는, 그래서 나를 예상치 못한 자리에 데려다 놓을지도 모르는 상대와 얼굴을 맞대겠다는 결단. 그런 점에서 우정은 실험이고 일탈이다.(234쪽) 이렇게 보면 어떨까? 위에서 말한 원자론적 관점으로 말이다. 직선운동으로 떨어지는 원자가 클리나멘에 의해 기울어지더라도, 부딪힐 다른 원자가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 누군가와 부딪힌다면, 필연적으로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그 일은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하지만, 세상을 창조해 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을 것이다. 중요한 건 빗겨날 수 있는 힘 자체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주변에 누군가와 얼굴을 맞대고 부딪혀 내는 힘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있는 힘껏 궤도를 비틀고, 다른 누군가와 얼굴을 맞대는 것밖에는 없다. 평범하게 직장이나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른 삶’을 꾀하는 나도, 벌써 그런 삶을 사는 것 같이 보이는 민호도, 다르다고 하지만 얼마나 다른지도 난 모르겠다. 우린 계속 흔들렸다가, 조금 나아졌다가를 반복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각자의 ‘개성’을 이야기하며 다르다고 포장하기보다는 있는 힘껏 비틀어 내고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괴성’을 질러보면 어떨까? 루크레티우스와 민호가 만들어 내는 ‘케미’는 그 괴성이 삶의 변곡점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자 몸을 비틀고, 입을 벌려보자.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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