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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의 읽기-기계

[민호의 읽기-기계] 환경주의를 묻다, 디지털을 묻다

by 북드라망 2023. 6. 23.
고전비평공간에서 공부하는 청년, 민호샘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이름하여 "민호의 읽기-기계"인데요, "더이상 유예할 수 없는 생태적 문제들과 테크놀로지의 빛과 그림자를 탐구"(고전비평공간 규문의 생기 세미나 소개글 참고)하는 코너입니다. 우리는 텀블러를 쓰고 에코백을 들고다니는 행위로 생태적 문제들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또 생태적 문제들과 테크놀로지 곧 기술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요? 자자, 민호샘을 따라 찬찬히 생각해봅시다. [민호의 읽기-기계],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환경주의를 묻다, 디지털을 묻다

 

414기후정의파업 현장답사를 가다
지난 주 금요일 ‘414기후정의파업’에 다녀왔다. 잠깐, 왜 ‘기후정의’인가? 이 용어는 기후변화와 생태파괴를 ‘환경’ 혹은 ‘생태’라고 일컬어지는 추상적인 ‘자연’의 범주에 국한시키지 않고 거기에 이미 얽혀 있는 계급, 지역, 빈부, 인종, 젠더, 장애 등의 문제들과 더불어 사유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기후위기는 ‘전 지구적 위기’라는 수사를 동반하며 모두에게 동일한 위협인 양 묘사되지만 사실 굉장히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방식으로 분배된다. 결코 평평한 적 없었던 우리의 사회 속에서 환경의 재난이 차별적이고 폭력적이지 않게 전개될 리가 없잖은가. 기후위기는 단 한 순간도 중립적인 적이 없었고, 그 현실에 직면하고자하는 자는 정의의 문제에 다다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환경문제는 시작도 중간도 끝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기후정의행진은 이와 같이 환경문제를 둘러싼 폭넓은 문제의식 위에서 열렸다. 여러 정당, 노조, 지방 주민, 종교단체, 동아리, 장애인 등 다양한 시민들이 기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모여 한 각자가 겪는 현실 속의 목소리를 꺼내어 드러내는 행사다. 이번에는 산업자원통상부와 환경부 같은 정책기관들이 모여 있는 세종시의 정부청사 앞에서 개최되어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대정부 요구를 전달하고자 한 것 같다. 무엇보다 이 행동은 20~30대의 젊은 활동가들이 기획해서인지 시위이지만 비장하기보다는 명랑하고 밝은 축제 같았다. 흥겨운 음악과 춤, 센스 있는 피켓들과 분장들은 누가 봐도 즐길 줄 아는 이들의 유쾌한 화합이었다. 연대나 홍보의 방식도 참신해서 SNS와 구글 플랫폼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발랄하고 상큼한 포스터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사실 나는 작년 9월 서울 행진에서 이런 명랑하고 에너제틱한 분위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흥겨움의 한편에 이런저런 생각과 질문들이 구체화되지 않은 채 자라나 있었다. 느릿느릿 해왔던 환경주의 공부 때문인가, 손에 들고 있던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때문인가, 잘은 모르겠다. 거칠지만 그것들을 잠깐 정리해보려 한다.

 



환경을 위한 집단적 ‘행동’은 어떤 힘이 있는가?
분명히 국가의 정책적·제도적 차원의 조치가 필요한 영역이 있다. 에너지·교통·물가 등의 공공재에 대한 권리나, 발전소·토목공사·관광인프라 등의 산업을 입법하고 시행하는 일은 당장 우리의 손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상 속 실천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다른 힘이 필요하다. 기업의 무분별을 규제하고 자본의 파괴적 팽창을 제지하는 데에는 법적이고 제도적인 힘이 요구된다. 생존을 위협하는 남용과 착취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거는 시도의 필요는 너무나 자명하니까. 기후정의 운동은 정부가 그 기능을 하기를, 지금까지처럼 파괴와 차별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살림과 공생을 위한 방어막이 되기를 요청하며 일침을 가하고 있다. 정부에 구체적인 테제들을 명시하고 압력을 넣는다는 것. 여기에 기후정의파업과 같은 공적인 운동의 빛나는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만으로 충분할까? 국가도 기업도 거기에 갖가지 방식으로 연결된 사람들(공무원, 사업가, 노동자, 시민, 여론)로 구성된 조직이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이해관계와 시야와 경험과 가치관과 감수성을 가지고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들 각자의 생각과 행동 안에서의 변화나 자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시스템의 변화도 요원하다. 누구도 ‘값싼 전기’를 원하지 않는데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설 리 없고, ‘빨리 빨리’나 ‘버리고 새로 사자’의 감각 없이 신제품이 쏟아지고 노예노동이 만연할 리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들 자신에게 달린 실천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이 실천의 층위는 폭넓다. 심각성에 대한 인식(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원인의 분석(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며, 나는 그것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행동 및 소비 양상의 변형(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론 기후정의운동은 모든 것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기만전술과 싸우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고발을 포함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계속해서 표면 위로 올리고 우리가 인지하고 이야기하고 연대하며 실천을 도모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준다. 지방이라는 이유로, 소수라는 이유로 묻혀 온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전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꾸리고, 나아가 다른 이야기 다른 일상을 고민하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운동에 접속한 사람들에게 이런 변화를 널리 불러일으켰다면, 기후정의의 집단행동은 제도적 차원의 성취와는 별개로 충분히 빛나는 효과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환경주의의 두 길 : 에코이미지와 기후정의
그렇다면 실천이라는 문제로 더 들어가 보자. 우리가 환경 혹은 생태 문제를 생각할 때 흔히 취하게 되는 태도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 중 가장 간편하고 쾌적한 것은 ‘에코프렌들리’라는 트랜드에 편승하는 것이다. 텀블러, 에코백, 리싸이클링 제품을 사용하고 비건을 지향하며 미니멀 및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는 ‘지구를 위한 작고 소중한 실천들’. 이 행동들은 종종 기만적이고 나르시시즘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요즘에는 친환경과 그린 이미지가 주는 세련되고 도덕적인듯한 감정에 취해 자기도 모르는 새 더 소비적이고 오만해지게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깊은 고민과 간절함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검소한 라이프스타일도 존재한다. 우리는 거대한 문제더미들 앞에서 늘 자문하며 뭐라도 해보려는 사람들의 진중한 태도를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볍든 진지하든 이러한 에코-실천들은 대개 사적이고 이미지적인 방식으로 남을 때가 많은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제의 구도가 오염되고 위태로운 ‘환경’이나 ‘지구’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병든 것은 ‘지구’이고 아픈 것은 ‘북극곰’이다. ‘숲’이 파괴되고 ‘바다’가 오염된다. 그런 ‘자연’을 떠올릴 때 실천은 적극적일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일 수는 없다. 사실, 세상 어느 곳에도 그렇게 추상적이고 탈정치화된 ‘자연’은 없다. 땅, 공기, 물에는 언제나 사람과 동물이 살며, 그 위로는 계급, 권력, 빈부, 인종, 젠더를 비롯한 역사적 분할선들이 빈틈없이 가로질러져 있다. 이 경계들 주변으로 쉼 없는 마찰이 빚어지고 있으며, 결코 하나의 답으로 떨어지지 않은 지저분한 딜레마가 응어리져 있다. 이런 풍경을 보기 힘든 구조여서인지 보지 않으려 해서인지 우리의 실천은 계속해서 저 멀리의 ‘자연’을 향한다. 그편이 쉬우니까. 진지함의 정도가 어떻든 우리들의 에코-실천들이 이미지적으로 국한되고 단순화되는 것은 지구, 자연, 위기, 오염 등이 이미지적으로 벙벙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이미지를 낳는다. 그리고 자본은 이미지 생산의 귀재다. 전기차, 핵융합, 신재생에너지, 탄소 중립, 각종 에코 상품들 같은 사업의 어이없는 그린 워싱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생각해보자. 그것들 중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디지털’이다. 디지털이 어떤 매연이나 오염수와도 무관하며 ‘탈물질화’되어 있는 청정한 산업이라는 생각은 환경운동가들에게조차 거의 의심되지 않는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보자.

따라서, 환경주의에 있어서 사적이고 쾌적한 에코이미지적 실천의 길 다른 편에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며 다소 암울하고 투쟁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접근, 정의에 입각한 사회적인 접근이 있다. 여기에서 기후위기는 누군가의 생존권의 위협 및 구체적인 폭력들과 더불어 떠오르고, ‘환경’의 영역을 넘어서 경제학, 군사, 탈식민주의, 인류학, 철학, 페미니즘과 같은 타 부문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3·11이 어떻게 ‘바다의 오염’이기만 할 것인가? 유래 없는 대규모 홍수와 산불의 사망률은 왜 빈자들에게서만 그렇게 높은가? 기후위기라고 퉁 쳐지는 사안들에 역사와 사회와 정치의 돋보기를 들이대면,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싸워야 할 문제들이 불거진다. 그럴 때 ‘위기’의 맥락은 선명해지고 우리의 실천은 안온할 수 없다. 우리는 ‘환경문제’ 곁에 드리운 대책 없는 폭력과 배제, 속임수와 언론플레이 앞에 놓인다.

그러나 그렇게 환경주의의 정치적 지형을 헤매다가 막상 나의 자리로 돌아오면 어떨까? 뜨겁게 타오른 정의감과 항의 뒤로, 개인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막막함이 남는다. 휴지조각보다 미약한 한 표의 행사 외에 다른 수가 없다는 사실은 무력함을 차오르게 한다. 중첩되어 있는 착취적 시스템을 꼬집고 폭력적 구조를 고발하는 일은 오히려 즉각적이고 소박한 일상적 실천을 가꿔갈 의욕을 사그라들게 하는 건 아닐까? 분노는 그것이 아무리 정당할 때라도 너무 쉽게 체념으로 식어버리며, 자신을 분노의 대상에서 국외자로 만든다.

이미지실천의 길과 환경정의의 길. 때로 우리는 이 두 접근을 다 시도하기도 한다. 한쪽이 다른 쪽을 촉진하기도 하고 상쇄하기도 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자기애에 취하거나 체념에 떨어지지 않는 한, 두 길 모두 절실히 필요하다. 두 길 모두 우리를 움직일 힘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제3의 길은 없을까? 두 접근 모두가 문제화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을 다루는 시각은 없을까?

 

 

 

욕망 생산의 토대를 묻는 길과 기술철학
414기후정의파업은 공적인 행동의 정의감이 주는 흥분과 ‘그린-이미지’의 연대감이 주는 유쾌함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서 느꼈던 묘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 의구심은 필시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를 읽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텐데, 가령 이런 식이었다. 만약 이들이, 자기표현이든 정치운동의 일환이든, 지금 자신들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해서 SNS에 올리고 있는 현장 영상들과 셀카들이 소모하는 물질의 양이 어마무시하며, 숨쉬듯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디지털 생활이 지금 이 환경운동이 고발하는 오염과 착취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를 채워주는 충만함과 하나됨의 감정은 전처럼 예쁘게 유지될 수 있을까? 정의로운 목소리를 퍼뜨리는 우리의 스마트한 전술은 여전히 정당하고 떳떳할 것인가? 여기서 기술의존적 삶의 방식,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인 우리의 감수성을 문제 삼는 것은 굉장한 ‘찬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적은 발전소나 공장이나 벌목 산업이었지 인터넷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지털이 대체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가장 비물질적인 기술인 동시에 우리를 자유롭게 연결해주고, 심지어 기후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톡톡히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가? 화상 회의도, 전자 문서나 음원도, 온라인 미팅도, 나아가 이런 생태운동을 알리고 공유하는 일까지도 온라인이 아니라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우선 이걸 인정하자. 우리는 디지털을 모른다. 활용법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것의 하부구조를 모른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의 '좋아요'를 누를 때, 사진첩을 클라우드에 연동시키거나 유튜브 쇼츠 비디오를 넘겨댈 때, 단톡방에 영상들을 전송할 때 그것들이 어디로 가서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의 접속과 서핑이 얼마나 광대한 물질적인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는지,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광물과 물과 에너지가 요구되며 또 얼마나 많은 열과 폐기물과 온실가스가 배출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왤까? 생각해 보라는 얘기를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디지털 라이프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이미 우리 일상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친숙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패드는 우리의 눈코입귀이자 이미 세상이다. 그 테크놀로지의 생태적 파괴성에 말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언짢고 불편한 일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무책임한 기성세대가 남겨 놓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아닌가? 우리는 더 이상의 개발에 반대하고 스스로의 탄소발자국을 줄이려 노력한다. 그런 우리가 디지털 문명을 즐기고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사치를 줄이겠다는 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여기에 ‘기후세대’인 동시에 ‘엄지세대’인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적 상황이 있다.

 

“‘기후세대’는 2025년에 이르러 디지털 업계의 전력 소비량(전 세계 전기 생산량의 20퍼센트)과 온실가스 배출량(전 세계 배출량의 7.5퍼센트)을 두 배 증가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지목될 것이다.”(기욤 피트롱,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갈라파고스, 23쪽)


기욤 피트롱은, 우리에게 뗄 수 없게 된 디지털 기기 및 기술과 우리 마음속에 뿌리 깊게 주입된 ‘그린-테크놀로지’라는 믿음은 거대 IT 기업들의 어마어마한 그린워싱의 산물이자 우리의 감각적 선호의 결과임을 직시하기를 간곡히 권한다. 즉 우리는 신체적인 생활상의 변형과 더불어 정신적인 믿음과 신념도 달라져 버렸음을 말이다. 이미 디지털화된 손과 발과 눈과 생각을 가진 우리에게 디지털의 그림자를 받아들이기는 달가운 일일 수가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환경주의에 접근하는 제3의 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일상에서 바쁘게 챙기는 ‘이미지적 실천’과도, 복합적인 불의를 문제 삼는 ‘기후정의적 인식’과도 다르다. 그것은 실천과 인식의 이면에서 이미 작동 중인 우리의 가장 미시적인 욕망과 감수성의 형성을 문제 삼는 길이다. 이를테면 속도에 대한 감각을 보자. 비행기와 KTX의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제 배의 속도나 무궁화호의 속도를 견디지 못한다. 로켓배송과 당일배송이 일상화된 후로 배송지연이나 반품에 소요되는 시간은 참기 힘든 불상사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깨어있는 시간의 3분의 1 이상 눈을 고정하고 있는 핸드폰이나 컴퓨터의 스크린의 속도에 있다. “오늘날엔 0.8초 안에 초기화면이 완전히 뜨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른 인터넷 플랫폼으로 가버립니다.”(같은 책, 139쪽) 0.8초. 이것이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시간의 전부다. 시간이라기보다는 순간이다. 만약 그 로딩이 초기처럼 8초나 걸린다면,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속도에 대해 일어난 이러한 감각적·심리적 변형은 위생, 건강, 기억, 노동 등 우리 일상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 거기에는 언제나 구체적인 사물들 즉 테크놀로지들의 발전이 선행한다. 인간은 기술과 융합하면서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기술문화는, 아무리 집약적이고 정밀하다 해도, 전적으로 물질적이다.

기술철학은 기술과 우리 실존 사이의 불가분성에 주목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는 테크놀로지가 얼마나 얽혀들어 있는가. 인간은 테크놀로지를 만들어내고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다시 만든다. 기술철학은 그러한 역동성의 역사, 우리 자신의 손과 발과 생각과 감각의 동선 및 사용가치가 변해온 역사를 질문한다. 그리고 거기서는 몇 가지 딜레마적 상황이 발생된다. 기술이 유능해질수록 무능해지는 신체, 속도가 빨라질수록 늘어나는 권태, 온라인과 같은 탈물질화된 접속이 증가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는 물질 소비. 생태주의가 요청되는 자리, 생태주의가 다시 시작될 자리는 여기에 있다.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기술에 대한 질문들은 생태 문제에 접근하는 기존의 틀을 뒤바꾸는 계기가 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제도적인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고, 부단한 자기 실천을 해나가야겠지만, 그보다 우리를 길들이고 있고 이미 길들여온 기술과 그것의 그림자 및 가능성을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줌으로 디지털을 논의할 때
생태와 테크놀로지를 연결시켜 공부하는 ‘생-기 세미나’를 기획할 때, 이 책의 권고를 고려해서 되도록 오프라인으로 열고자 했다. 하지만 이내 온라인으로 바꿨는데, 먼 거리에서 세미나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따끈따끈한 질문이 솟아났다. 디지털 기술의 파괴력과 그것을 둘러싼 속임수를 낱낱이 드러내는 책을 읽는 세미나를 근래 최고의 화상 플랫폼인 줌으로 진행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이동에 드는 탄소량과 온라인 접속에 드는 탄소량을 비교하는 수준을 넘어서, 배움, 즉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결의 생활을 조직해갈 힘을 가진 배움을 나눈다는 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저자는 엄중한 경고 속에서도 분명히 밝힌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수명을 연장하고, 우주의 기원을 탐사하고, 교육의 문호를 열고, 전염병을 통제하면서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414기후정의파업의 메시지와 현장이 널리널리 공유되고 퍼져나간 것처럼, 우리에게 생태문제의 심각함을 알리고 행동을 도모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생태계와 관련한 근사한 구상을 제안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25쪽) 또한 이런 문구를 적은 이 책의 대부분은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되었을 것이고, 집필과 편집 그리고 글쓰기에 필요한 아이디어와 자료를 얻는 일 또한 온라인 매체에 의존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 안에서 디지털 기술의 명과 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그 논의 자체는 비판적이 된다. 우리는 줌을 통해 얼굴을 맞대고 생각을 맞댄다. 그렇게 말하고 보고 듣는 동안 저 심해까지 이어진 ‘인터넷의 일곱 개의 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서비스 단위당 투입된 물질(MIPS)’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서울 어딘가 혹은 암스테르담 어딘가에 있을 데이터센터를 냉각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물과 가스가 동원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우리 자신이 놓인 자리를 하나하나 배우는 동안 스스로의 감수성과 일상의 한 구석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도 더듬더듬 느낄 수 있다.

인터넷 연결이 끊기면 우리의 세미나도 끊길 것이다. 몇 달 전 어느 데이터센터 화재로 카카오 서버가 몇 시간 먹통이 되었을 때의 혼란을 기억해보자. 금융업과 운송업을 비롯해 요식업이나 일반 사무업무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산업과 일상적 소통이 단번에 중지되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시대에 블랙아웃만한 재앙은 없다. 쓰나미나 지진도 그 파급력을 따라올 수 없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데이터 기업들은 같은 규모의 여분 데이터센터를 짓고 인재들로 구성된 비상출동팀을 꾸리고, 지역민의 생존권보다 우선시되는 물과 가스 공급처를 확보해 놓을 것이다. 이제 군대는 데이터센터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될 것이고, 광산들이 필요한 광물을 얻기 위해 뚫릴 것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과 가스와 자원이 상시 투입될 것이다. 이 가공할만한 인프라 구축의 저편에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빨리빨리’를 외치며 스크린을 눌러대는 수십억 개의 손가락들이 있다. 보다시피 디지털 산업은 그것을 빼곡하게 둘러싼 탈물질화의 환상과 정반대로 지극히 물질화되어 있으며, 의도적으로 부여된 친환경이라는 환상과 달리 게걸스러울 정도로 자원과 에너지를 먹어치워대는 지구에서 가장 소모적인 산업이다.

기술철학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서, 이제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편견들과 싸우는 일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가야 한다. 디지털과 더불어 우리의 감각은 어떻게 변해왔고 변해갈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과 더불어 생태적 비전을 만들고 실천할 길은 없는지, ‘비물질’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긴 한 것인지, 무엇이 그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하나하나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질문의 꼼꼼함만큼, 우리는 우리가 붙들려 있는 딜레마로부터 조금씩 틈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글_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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