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자기가 자기에게 예속되다? '정신의 등반'이 필요한 이유


다른 관계, 다른 자기




단일재배, 단일품종


제주에서는 감자를 ‘지슬’이라고 부른다. 땅 속 열매라는 뜻의 한자 표현인 ‘지실’(地實)의 사투리 발음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감자는 땅속 줄기마디에서 기는줄기가 나와 그 끝이 비대해진 덩이줄기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지슬’은 감자의 정체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감자는 땅 속에 거주하는 놈이다.


땅에 붙어 도무지 멀리 가지는 못할 것 같은 이 감자의 원산지는 놀랍게도 안데스 산맥이다. 당시 잉카인들이 재배 했던 감자는 3,000종이 넘었다고 한다. 사실 야생 감자는 동물에게 먹히는 일이 없도록 독이 들어 있고, 그 맛도 쓰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잉카인들은 자신들만의 해독 작업을 통해 ‘츄노’라는 아주 독특한 에너지원을 고안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양한 품종을 유지하면서도 감자의 독특한 맛과 에너지를 잘 활용했다. 어쩐지 감자의 외모만큼이나 소박한 시절이었을 것 같다.


페루 감자.


그러나 감자는 한 번의 사건으로 그 시절을 뒤로 해야 했다. 그 이유는 잉카 제국을 단 180명으로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군대가 이 우스꽝스러운 덩이줄기를 유럽으로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바다를 건너오면서 감자는 유럽의 식탁을 휩쓸었다. 유럽인들의 강력한 식료가 되었고, 심지어 이 녀석이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자 유럽에서는 너도 나도 넓은 지역에 감자만 심어 기르는 ‘단일재배’(monoculture)가 유행한다.


현대에 그것은 더 심해졌다. 패스트푸드점의 감자튀김도 단일 재배된 ‘러셋 버뱅크’라는 단일품종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이유로 러셋 버뱅크가 세계 감자 재배량의 50% 가량이나 차지한다고 한다. 재배하는 품종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우리들의 입맛도 하나로 되어 갔다. 패스트푸드점의 프렌치프라이 봉지 안에는 이런 획일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단일재배라는 의미의 ‘monoculture’는 ‘단일문화’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 자신도 단일 품종으로 재배된 느낌일 때가 있다. 은행에 앉아 똑같은 단말기 조작을 온종일 반복하고 나면 도떼기시장 같은 곳에서 내가 왜 이러고 살까라는 생각이 수도 없이 솟아난다. 그저 아내가 부지런하게 안팎살림을 건사하는 것을 보고 이런 마음을 먹으면 안 되지 할 뿐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예속되다


하지만 의문은 의문이다. 어째서 나는 단일품종으로 재배된 기분일까? 철학에서는 이런 주제를 생각할 때, ‘주체’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리는 보통 애초에 내가 하고 싶어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어째서 하고 싶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아이가 공부 잘하길 바라는 마음에 "내가" 아이에게 숙제하라고 했을 것이며, 유쾌한 저녁을 바라며 "내가" 리모콘을 돌려 <무한도전>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이 이루어지는 출발 혹은 원인이 되는 것을 철학에서는 ‘주체’(主體, Subject)라고 부른다. 손이 글 쓰는 행위, 눈이 TV 보는 행위가 내 의지로 내가 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여기서는 그 ‘나’가 행위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단일품종으로 단일 재배되어진 기분이란, 주체가 하나로 고정되어 도무지 다른 모습은 보여 주지 못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이른바 ‘고루하고 보수적인 은행원’이란 하나의 정체성으로 단일 재배되어 버린 모습을 통념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을 도무지 고쳐보려고 해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알면서도 끌려 다니는 노예성과도 같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도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의도치 않게 고루해져버린 자기, 하나로 고정되어버린 정체성, 그래서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이 꼰대 같이 하나의 주체로 환원되어버리는 위험성,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 왔다. 특히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이 문제를 두고 세네카를 언급하며 이런 말을 한다.


세네카는 자기 자신에게 노예가 되는 것이 모든 예속 가운데서 가장 심각하고 무거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단한 예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예속은 인간을 지속적으로 압박합니다. 세네카에 따르면 이 예속은 밤과 낮 간극도 없이 쉬지 않고 인간을 압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물론 불가피하다고 해서 그 예속을 전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네카는 그것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그것을 면제받을 수 없으며 인간은 항시 자기에의 예속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겁고 지속적이며 누구도 사면 받을 수 없고 강요된 이 예속에 저항해 인간은 투쟁할 수 있습니다. [각주:1]


푸코의 말은 다소 뜻밖이다. 앞서서 우리가 답답해했던 문제, 그러니까 하나로 고정된 정체성이 생긴 이유로 우리가 ‘자기’에게 예속되어 버린 것을 든다. 그리고 이 예속이 누구도 면제받을 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도 못 박는다. 급기야 그는 인간은 항상 “자기에의 예속으로부터 출발한다.”고까지 선언한다.


이건 참 이상한 논법이다. 주체라고 여기고 있는 ‘자기’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도 아닌 ‘자기’에게 예속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내가 나에게 예속되었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나(자기)’라는 것이 무척이나 애매모호하다. 생각할수록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처럼 어이없는 질문도 없다. 그 질문엔 답이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오리무중인 대상이다.


좀 다른 접근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란 집에서는 아이를 둔 가장이고, 아내의 남편이며, 동생들의 형이면서, 엄마의 아들, 아빠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큰애의 아빠이면서, 동시에 작은 애의 아빠이고, 어떤 때는 큰 애와 작은 애가 같이 있을 때의 아빠이다. 회사에서는 몇 몇 팀원들과 팀을 꾸려 나가는 팀장이지만, 부서에서 보자면 부장님의 부하직원이며, 옆 직원들의 동료이다. 그나마도 집, 회사에서라면 형편이 좀 나은 편이다. 집과 회사 밖에만 나가면 그게 더 오리무중이다. 보도블록에서는 걸어가는 행인에 불과하고, 은행 창구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면, 대기표 ‘XX번 고객님’이 되고 만다.


어떤 관계에 서느냐에 따라 나는 천변만화로 바뀐다. 생물학적으로는 똑같은 신체라 하더라도, 맺는 관계에 따라 내가 하는 행동 방식과 말투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그래야만 관계가 유지되고 여러 욕망들이 관철될 것이다. 엄마의 아들로서 부리던 어리광을 부장님의 부하직원이 하면 끔찍하여 회사가 아수라장이 되지 않을까?


어떤 관계에 서느냐에 따라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철학, 정신의 등산


푸코는 주체의 이런 모습에 주목한다. 내 안에는 기묘하게도 상이한 종류의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둘러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매순간 다양하게 구성될 것이다. 결국 푸코가 바라보는 ‘자기’는 맺는 관계에 따라 구성되는 ‘변화하는 자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가 자기에게 예속된다는 말은 어떤 하나의 관계에 묶여서 능동적으로 다른 관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상태라고 풀어 말할 수 있다. 세네카는 이런 사람을 노예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나’는 단일 재배된 관계에만 고정되도록 자기 자신을 다루고 있는지 모른다. 수많은 자기를 뒤로 하고, 오로지 가장으로서의 관계, 은행원으로서의 관계만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관계에 예속되어 버린 것이다.


세네카는 이렇게 된 이유로 두 가지를 든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많은 광기와 피로와 땀이 있는 것일까? 왜 땅을 뒤집어 업고 광장으로 몰려드는 것일까? 나는 아주 짧은 시간을 위해 단지 최소한을 필요로 할 뿐이다.”[각주:2]


우리는 사업을 위해서, 집을 구하기 위해서, 토론에서 이기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은 고통을 주고, 또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은 노고를 부과한다. 우리는 아주 짧은 순간의 영광을 위해 너무 지나친 책무를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다. 세네카는 영광과 책무 사이의 불균형을 명확하게 지목했다.




다음 두 번째는 책무도 책무지만, 책무에 대한 보상에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결부시키는 행위도 또한 문제다. 그 보상은 금전적 이익, 육체적 쾌락, 평판 등등이 될 것이다. 이런 결과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금전적 이익 관계나 평판에 의해서만 일상을 판단하는 위험에 처한다. 이건 분명 큰 위험이다. 금전이나 쾌락이 주는 기쁨은 아주 짧은 순간인데, 책무가 부여하는 고통은 지나치게 크다. 경제적 관계에 들어가면 수익 대비 위험을 그리 잘 계산하던 사람도 자기 자신의 책무-보상 상의 불균등을 보지 못하거나, 애써 덮어 두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세네카는 이런 책무-보상체계는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들 대부분을 돌이켜보면 매우 짧은 순간이고 공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노예인 자는 멍에 가운데 가장 가혹한 멍에를 쓰게 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수많은 요청을 하지 않고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면 멍에를 뒤흔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각주:3]


결국 푸코가 ‘자기 자신에게 예속되었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그 많은 자기들 중에서 ‘책무-보상관계’에 빠진 자기에게 묶여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지나친 책무를 부과하고, 거기로부터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 한다. 어쩌면 현재의 고통은 자기가 스스로 걸어 들어간 관계의 당연한 결과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도무지 다른 자기, 다른 관계를 발견하기 힘들다. 이런 경우에는 좀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세네카는 나의 시선을 높은 곳으로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정신의 등산’이다. 세네카는 이 등산을 ‘철학’이라고 불렀다. 철학이란 기존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나를 둘러싼 관계들을 응시하고, 새롭게 발견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등산에서 중요한 점은 내가 처한 위치, 그러니까 내 일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올라가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 밖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가장 높은 곳에서 보아야 한다. 이 등정이 이루어지고 정상에서 우리 일상을 보면, 그러니까 철학적 시선으로 우리를 응시하면, 우리 인생이 항해하는 곳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세 안다. 우리가 몰입했던 책무-보상 관계가 무척이나 작은 점인 것이다.



그러나 책무-보상 관계를 무턱대고 없애라거나, 무시하라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등산을 한다고 산 정상에서 살라는 말이 아니듯이. 오로지 그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다시 파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상 하나의 점에 불과한 우리의 실존을 매순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정신은 등산을 한다. 철학은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


* * *


앞에서 만났던 감자를 다시 만나 보자. 이 녀석은 안데스 산골짜기에서 유럽으로, 다시 미국, 아시아로 건너갔고, 급기야 유전공학에 의해 해충에 강한 품종("뉴리프")으로 개량되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오로지 이득을 위해 이런 품종만을 재배하였다. 이렇게 되자 혼합 재배일 때는 땅에 독소를 만들지 않던 것이 이제는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감자가 다른 작물을 공격하기까지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특정 책무와 큰 보상에만 몰두하면 그 보상에 눈이 멀어 더 큰 상실을 맛보고 만다. 남들을 해치지 않고서는 목표를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더 창의적이고 더 능동적인 관계가 가져올 ‘다른 자기’를 자기도 모르게 잃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다른 자기’로부터 향유할 더 큰 이익을 스스로 내 던져 버리는 꼴이 된다. 그것은 남을 해치는 것일 뿐 아니라, 자기를 해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땅 속에서만 거주했던 감자가 안데스 산맥을 넘어 유럽과 미국, 아시아로 움직여 나갔던 것처럼, 애초에 우리는 다층적으로 뻗어 나갈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은행원이라고 이내 낙담하기엔 이르다. 언젠가는 내 안에 숨은 수많은 자기들이 고루하고 보수적인 관계를 뚫고 반드시 새로운 꽃을 피울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 정신은 항상 등산을 하고 우리 일상을 둘러봐야 할 것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 이 글은 월간금융 3월호에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1. 각주 1)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문장은 읽기 편하게 인용자가 수정. [본문으로]
  2. 각주 2) 세네카, 『자연에 대하여』 [본문으로]
  3. 각주 3) 세네카, 『자연에 대하여』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