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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기와 읽기의 평행이론

북드라망 2024. 7. 31. 08:00

자전거 타기와 읽기의 평행이론

 

필요한 것은 전체적인 시야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이 육체적 의미의 지성과 심미적 의미의 지성을 함께 지녔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게 없다면 IQ라는 것도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몸과 마음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배움은 발전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몸이 될 때, 놀이와 스포츠를 통해 순간 순간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배움은 늘어난다.
― 조지 쉬언, 『달리기와 존재하기』, 김연수 옮김, 한문화, 2020, 169쪽

 


얼마 전에 세미나 준비를 할 때였다. 기분 좋게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읽기 시작했는데, 평소와는 다른 감각으로 책이 잘 읽혔다! 읽으면 읽을수록 집중력이 높아져가는 느낌이랄까. 그렇게해서 중간에 끊지 않고 한번에 세미나 진도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앉은 자리에서 읽어야할 분량 만큼 책을 다 읽는 일이 그렇게 드물지는 않다. 그런데 그날의 감각은 확실히 평소와 다른 것이었는데……,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를테면, ‘간신히 읽어낸 느낌’과 비교해 보면 좋을 듯 하다. 읽히지 않는 책을 붙잡고 말 그대로 ‘간신히’ 읽은 날에는 목표한 지점까지 도달하더라도 마음이 영 개운하지가 않다. 그래서 잠자리에 누워서도 뒤척이게 되고, 내일이 걱정되고, 읽은 바 내용을 되새기려고 해봐도 중간중간 턱턱 걸리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날의 읽기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심지어 되새겨 보려는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남은 게 없는 느낌이었달까. 그래서 그날은 잠도 가뿐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잤다(이건 나한테 참 드문 경우다). 마음에 아무런 잔여가 없는 읽기였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날의 그 깔끔한 감각의 원인을 이틀 전의 고강도 인터벌 훈련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4월초부터 내가 공부하는 공동체인 문탁네트워크까지 편도 65km를 일주일에 한 번 자전거 왕복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몇 년 간의 자전거 훈련과 그에 따르는 기타 보조 운동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요컨대 몇 년 간 힘써 운동한 덕에 신체의 상태가 좋아졌고, 2024년의 어느 초여름날 타이밍 좋게 그 결과가 감지된 셈이다.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방식으로 작용을 하거나 또는 작용을 받는 데에 다른 신체들보다 더 유능할수록, 그것의 정신도 동시에 많은 것을 지각하는 데 다른 정신들보다 그만큼 더 유능하다. 
― B.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13의 주석, 황태연 옮김, 비홍, 114쪽

 


덕분에 나는 전보다 더 스피노자를 ‘믿게’ 되었다. 신체의 유능함은 정신의 유능함과 평행하다(인과관계가 아니다). 왜곡을 조금 보태서 이 ‘평행론’을 설명하자면, 페달을 굴려서 60km를 갈 수 있는 능력과 책상 앞에 앉아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유지한채로 60페이지를 읽어내는 능력이 서로 무관한 능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여기엔 ‘자기 인식’의 문제도 관련되어 있다. 스피노자가 한 유명한 말 중에 ‘우리는 신체가 할 수 있는 일에 무지하다’는 말이 있다. 달리기를 해봐야 내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어떤 속도로 달릴 수 있는지 알 수 있듯이 바벨, 덤벨, 케틀벨 같은 것들을 들어봐야 얼마만큼의 힘을 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읽기나 쓰기와 똑같다. 조지 쉬언이 ‘전체적인 시야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이야기 할 때, 그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아는지, 얼마만큼 모를 수 있고, 얼마만큼 알 수 있는지를 전혀 가늠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이 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몸이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아직’ 하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결국 자신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다음에도 계속 그런 깔끔한 읽기를 지속했느냐고? 그럴 리가. 다시 그런 경험을 하게 될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매일 자전거 페달을 돌리고, 케틀벨을 던지고, 책을 펴고, 읽은 바를 말하고, 말한 바를 듣다보면 그런 날이 또 오리라고 확신하다. 한 번 더, 두 번 더 그런 스윗스팟을 터치한다면 그 감각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그런 게 아마 ‘배움’일테고, 그런 ‘배움’을 우리는 ‘공부’라고 부른다. 그렇게 신체를 시험하는 것과 지능을 시험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 모두 ‘공부’다. 

 


정승연(문탁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