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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들

북드라망 2024. 7. 18. 08:00

‘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들


서로에 대한 혐오가 점점 강도를 더해 가는 요즘, 그래서 더 제대로 된 언니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서로에 대한 비난 이전에 제대로 된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세상의 반은 여성인데 아직도 여성의 이야기는 스테레오 타입에 머물러 있거나 너무 적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잘 듣기’―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행동인 것 같습니다.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아주 적극적 행위인 ‘잘 듣기’를 발휘해 보기 딱 좋은 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세 권을 소개합니다. 

 


* 『막달레나, 용감한 여성들의 꿈 집결지』(이옥정 구술, 엄상미 정리, 봄날의박씨, 2024)

 

 


지금은 사라진 용산 성매매집결지 한복판, 화장실도 없는 방 한 칸에서 미국인 수녀님과 함께 이옥정 대표가 성매매 여성들 돕는 일을 시작하며 꾸렸던 막달레나의집. 성매매 지역 여성들을 물심양면 돕고 함께 생활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했던 막달레나의집 30여 년의 기록을 이옥정 대표의 목소리로 담아 낸 책. ‘큰언니’로 불리며 막달레나의집 여성들의 삶을 보듬어 온 이옥정 대표는 처음 막달레나의집 문을 열었던 1985년부터 용산 성매매집결지가 사라질 무렵인 2010년대 초반까지 만나고 함께했던, 이해보다는 오해와 무지에 묻혀 있던 여성들의 삶 이야기를 들려 준다.

 

“결혼 뒤 자영이는 성매매집결지 자활지원센터의 도움으로 공공근로 일자리를 얻어 청소를 다니기 시작했다. 종종 자영이는 마대자루와 집게를 들고 막달레나의집에 물을 마시러 들르곤 했는데 까맣게 그을은 얼굴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엔가는 와서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언니, 나 무료급식소에서 공짜로 밥 좀 먹게 해주면 안 될까?’
자영이가 일을 다니고 있는 지역에는 천주교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베들레헴의집’이라는 노숙인들을 위한 식당이 있었는데 밥값을 빼고 나면 월급이 남는 게 없다며 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자영이가 다르게 보였다. 하룻밤 화투로 몇 십만 원을 우습게 날리고,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힘들어서 혹은 누가 알아볼까봐 택시를 잡아타던 그였다. 그런데 고작 밥값을 아끼기 위해 스스로 노숙인 식당에서 줄을 서겠다고 하다니. 그 때 이후로 나는 자영이가 다시 성매매 일을 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이제 자영이는 무슨 일이건 해내며 앞으로의 삶을 끌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 『레드 엠마 1, 2』(엠마 골드만, 임유진 옮김, 북튜브, 2024)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자서전. 전쟁과 징병제, 애국주의에 대한 반대, 피임과 모성에 대한 급진적 사유,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 동성애에 대한 옹호 등 당대 미국의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급진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사상가이자 활동가 엠마 골드먼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 있다.

 

“춤을 출 때면, 나는 그곳에서 가장 지칠 줄 모르고 가장 신이 난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사샤의 어린 사촌이 나를 옆으로 끌고 가더니 마치 동지의 죽음이라도 알리는 듯한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선동자로서 춤을 추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속삭였다. 뭐, 출 수 있다고는 해도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춰서야 되겠냐고 했다. 아나키스트 운동에 힘이 되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품위가 없는 일이고, 나의 천박함이 대의를 해치고 있다고도 했다. 어린 소년의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는 간섭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선 그에게 너의 일이나 신경 쓰라고 말하며 내 얼굴에 던져 대는 그놈의 대의가 지겨워 죽겠다고 대꾸했다. 나는 아름다운 이상과 아나키즘, 관습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대의가 삶의 기쁨을 내던져야 하는 일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나는 우리의 대의가 내가 수녀가 되는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 우리 운동이 수도원이 되어서도 안 되지 않냐고 주장했다. 만약 대의가 그런 거라면 내게 대의 따위는 필요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자유와 나를 표현할 권리, 모든 사람이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권리야.’ 아니키즘이란 나에게 그런 의미였고, 비록 거기에 감옥과 박해가 있더라도 나는 그 세상을 살 것이었다. 그렇다. 나의 가장 가까운 동지들이 나를 비난하더라도 나는 나만의 아름다운 이상을 살 것이다.  

 


*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김은주, 봄알람, 2017)

 

 


철학연구자인 김은주가 소개하는 여성 철학자 6인의 이야기.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 해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이 인물들의 ‘멋짐’을 알리고 싶었다는 지은이의 기획의도는 성공적이다. “괴물을 끌어안고 잠들면서도 치열한 사유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놓치지 않은 여성 철학자들”의 매력적인 사유가 펼쳐진다.

 

"나는 철학의 곁을 맴도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했다. 이 책은 여성주의 철학에 착복하기보다는 사유하는 여성 그들 자신을 다룬다. 어떤 특별한 계보나 시간의 궤적을 따르지 않고, 전통적 의미의 철학계에서 활동하지 않을지라도 새로운 사유와 개념을 창조한 이들 그리고 내 마음을 움진인 책을 쓴 저자를 주로 다루었다.
(......)
나는 여성들이 복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단수로 말해질 수 없다. 여성은 복수다. 여성주의운동은 추상적인 단일 여성 서사와의 동일시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처지와 위치에 있는 여성이 투쟁의 역사를 거쳐 확인한 가부장제의 분명한 차별에 함께 저항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함께 싸운다는 것은 나와 비슷한 고통에 바로 공감하여 연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동일시에서 비롯된 고통은 내가 느껴본 고통에만 민감한 데 그쳐버릴 수도 있다. 고통에 공감하여 연대한다는 말을 내가 느껴본, 혹은 나와 가까운 이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만 오인할 경우,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의 서사 일부로 통합하는 근대적 습관에 빠지기 쉽다. 고통의 가치를 규정하는 최종심급을 '나'라는 자기중심으로 수렴하는 방식을 , 여성주의운동은 지양해야 한다. 자기중심적 서사 구축에서 벗어나, 차이를 사상하지 않으면서, 차이에서 의미 있는 실천을 이끌어 내기 위한 윤리적 태도와 서사의 방법이 분명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