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27

아이작 아시모프,『아이, 로봇』 - 어떤 거짓말들에 관하여 아이작 아시모프,『아이, 로봇』 - 어떤 거짓말들에 관하여 오래된 주택가였다. 금가고 깨진 곳 투성이의 창백한 시멘트 포장길에는 가장자리마다 잡초가 무성했다. 한때는 그 길에 초록의 생기를 더했을 테지만, 이미 때는 스산한 11월 중순, 그 채찍같던 잎새마저 누렇게 말라붙은 지 노래였다. 스치는 기억에는 재개발로 한참 시끄러웠을 무렵 뉴스에서 이 동네 이름을 보았던 것도 같았다. 줄눈이 바스러져내린 시멘트 블럭 담벼락에 서툴게 갈겨쓴 빨간 스프레이 글씨, 천만년은 걸려있었나 싶게 날긋날긋 헤어진 플랭카드, 드문드문 붙어있는 찢긴 공고문의 글귀들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실제로, 창가에 쌓아올린 세간살이에 가로막혀 햇빛 한 점 안 들게 생긴 허름한 살림집들 중간중간에, 선명한 빈집의 .. 2018. 3. 7.
『스페이스 오디세이』 - 신체라는 결핍과 의지의 장 『스페이스 오디세이』 - 신체라는 결핍과 의지의 장 1. 꿀같은 잠이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눈을 떠,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 빛을 바라보며 만족스레 중얼거렸다. 역시 나는 겨울체질이다. 하룻밤에도 대여섯 번 씩 잠을 깨는 고질적인 증상이 겨울이면 거짓말같이 사라진다. 밤뿐이랴. 이른 아침 든든히 챙겨입고 나가, 영하 15도의 한파 속에 깊이 숨을 들이마셔 얼음 같은 공기를 폐에 가득 채울 때, 내 영혼은 고양감에 날아오를 것만 같아지는 것이다. 이 춥고 쾌적한 감각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온통 겨울뿐인 나라에 가면, 어쩌면 나는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 2.찬 공기를 뚫고 걸어 동네 스타벅스를 찾았다. 집중해서 작업할 일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 2018. 2. 21.
앤 레키, 『사소한 정의』- 착각은 자유지만 실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앤 레키, 『사소한 정의』- 착각은 자유지만 실례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주, 머리를 잘랐다. 생일기념이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몸과 마음을 쇄신하겠다는 일종의 의식, 쉽게 말하면 그냥 셀프 생일선물이었다. ‘우주여 나의 머리카락을 바칠테니 새로운 운명과 샘솟는 에너지를 주세요!’ 라는 심정이었달까. 헤어스타일 상담을 하며 디자이너가 말했다. “ 숏컷도 잘 어울리시겠는데요.” “ 으허헝 설마요.” “ 진짜요. 아무한테나 안 권하는데.” 나는 기대와 불신이 동시에 차오르는 눈빛을 숨기기 위해 스타일북을 들여다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숏컷과 관련해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 선명히 기억하는 것만도 세 건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 각각 한 번씩 숏컷을.. 2018. 1. 24.
아서 클라크, 『낙원의 샘』 - 오르는 것에 관한 생각 아서 클라크, 『낙원의 샘』 - 오르는 것에 관한 생각 치열하게 연습해온 예인이 화려한 무대에 오른다. 이윽고 막이 오르고, 그날의 공연으로 그는 가요대상 후보의 자리에 오른다. 새벽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학생은 성적이 오른다.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은 장인은 어느덧 업계의 정상에 오른다. 한미한 집안 출신의 야심가는 신분의 사다리를 오른다. 일주일을 생업에 시달린 사람들은 주말마다 삼삼오오 모여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믹스커피 한 잔씩 나눠 마시고 이곳저곳의 큰 산을 꾸역꾸역 오른다. 오르는 것에 관해 생각한다. 굳이 성공에 대한 강박이 있지 않아도, ‘오른다’는 말에는 사람의 마음을 붕 띄우는 힘이 있다. 물론 ‘구설에 오르는’ 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집값이 오르거나 물가가 오르는 건 또 다른 .. 2018.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