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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발굴, <한서>라는 역사책28

[한서라는역사책] 제국의 여름은 어떻게 오는가 제국의 여름은 어떻게 오는가 인재가 만발, 운빨 최고의 한나라 지금까지 한의 최전성기를 이루어낸 무제를 만나 보았다. 그의 통치 기간은 무려 54년으로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사상,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제국의 꽃을 피웠다. 반고 논찬에 의하면 “한은 역대의 모든 적폐를 물려받았지만 고조는 혼란을 안정시켜 정도를 확립하였고, 문제와 경제는 양민에 노력하였으나 고대 예악이나 문물제도를 갖추려는 노력은 많이 부족하였다.” (「무제기」,『한서』1권, 명문당, 385쪽) 문경제 시대가 태평성대였으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족함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족함을 무제가 등장해서 메꾼 것이다. 창업에 맞는 군주 유방의 출현, 그리고 지친 백성을 기르는 군주 문경제의 출현 그리고 예악과 문물제도를.. 2020. 7. 22.
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마!(3) – 2 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마!(3) – 2 흉노를 몰아내고 사방천리 영토의 주인이 되다! 유목군대보다 더 유목군대 같은 무제의 장수들 주지하듯 경제치세까지 한나라의 군대는 흉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방어만 하기에도 급급한 수준이었던 것. 한나라가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군사의 수는 늘 한나라가 흉노보다 많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어린아이도 양을 타며 활로 새나 들쥐를 사냥하고 좀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사냥하여 고기를 먹었고, 장사가 되어 만궁을 당길 수 있으면 모두 기병이 되었다. 그 풍속에 여유가 있으면 목축과 짐승 사냥으로 살아가지만 위기에 처하면 모두가 전투를 익혀 남을 침략하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었다. 그들의 주된 무기는 활과 화살이지만 근접해서는 칼과 창을 사용했다. 우.. 2020. 7. 8.
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마! (3) – 1 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마! (3) – 1흉노를 몰아내고 사방천리 영토의 주인이 되다! 외부로 향한 무제의 시선 『한서』에서 무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반고는 무제의 치세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본기와 열전파트에만 무려 50%에 달하는 비중을 할애했다. 이러한 한서의 구성은 마치 반고가 유독 무제를 편애한 것만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것은 반고의 편애가 아니라 무제치세의 실제다. 실제로 무제치세의 한나라는 온 천하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 영토는 크고 넓었으며 인물은 많았다. 게다가 공적은 또 어찌나 많았는지 ‘육경의 지위 확립, 교사정비, 정삭 개정, 역법 개정, 음률의 표준 지정 및 봉선제도 확립, 태학 확립, 백신에게 제사, 주(周)의 전통을 잇는 문장과 제도 정비’등 어지간한 황제 2.. 2020. 6. 10.
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마! (2) – 유학은 어떻게 제국의 철학이 되었나? 1편 읽기한무제, 제국의 여름을 보여주마! (2)– 유학은 어떻게 제국의 철학이 되었나? 유학이 정착할 수 없는 형세 두태후가 붕어한 이듬해인 원광 1년, 한무제는 현량천거(추천제도)로 유학자인 동중서와 공손홍을 발탁했다. 무제는 이번에도 유학자였다. 주지하듯 무제가 처음 즉위하여 뽑은 인재들은 유학자였다. 그러나 무제 2년에 뽑은 당시 조관, 왕장 등의 유학자들은 두태후의 황로정치를 넘어서지 못하고 전원 침몰한 바 있었다. 당시 유학은 왜 황로정치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일까? 숙손통이 漢의 국가 예의를 제정하여 태상에 임명되었고 함께 제정에 참여한 여러 제자들은 모두 인재로 선발되었는데, 고조는 유학의 쇠퇴를 탄식하며 학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었고 천하가 완전 평정된 뒤에도 학.. 2020.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