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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새로운 의학을 만나다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에 다녀와서

by 북드라망 2014. 4. 21.

조선, 새로운 의학을 만나다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에 다녀왔다. 조선시대 서양식 병원이었던 대한의원을 복원한 건물이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하얀색 시계탑은 그당시에도 유명했다고 한다. 이곳은 평일에는 9시에서 6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만 열고, 공휴일에는 쉬기 때문에 가기 전에 꼭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시라. 또, 연세대학교 병원에는 동은 의학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당분간 전시실 개방을 못한다는 공지가 있어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제중원이다. 1884년 갑신정변 중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칼에 찔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민영익을 치료했던 사람이 바로 아래 사진에 나오는 미국 선교사 알렌이다. 당시 조선 의학은 침술과 탕약 위주였고, 외과 분야는 다소 취약했다.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소독하고 꿰맨 후 붕대를 감았고, 결국 민영익은 목숨을 구했다. 이로 인해 민영익을 비롯해 조선정부에서는 서양 외과술에 대한 무한 신뢰가 생겨났다고 한다. 알렌은 이틈을 타(!) 조선 정부에 공식적으로 병원 설립을 건의했다. 일은 빠르게 진행되어 1885년 4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재동(현 헌법 재판소 안)에 개원했다. 홍영식의 집을 개조했으며, '사람을 구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제중원'이라 이름지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 홍영식은 참살당했지만, 그의 집은 서양식 병원이 되었다는 묘한 아이러니!




알렌의 의도는 병원과 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함께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학교가 추가로 생기고, 이곳에서는 해부학을 비롯해 생물, 화학 등 의학과 관련된 기초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한글로 서양 의학을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영어부터 배워야 했다. 한글로 배워도 쉽지 않은데 낯선 언어로 의학 공부를 하니 어려운 것은 당연할터...중도에 포기하는 학생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의학교 첫번째 기수에서 의사가 된 사람은 없었고, 제중원 운영에 대한 선교사측과 조선정부의 의견이 달라 이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제중원은 선교사들이 알아서 운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알렌은 이후 세브란스라는 자선가의 도움을 얻어 남산 복숭아골에 '세브란스 병원'을 지었다. 제중원에서 세브란스로 바뀐 셈이다. 그래서 이시기에는 제중원이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세브란스 병원은 현재 연세대학교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의원과 서울대학 병원  


조선정부는 제중원에서 손을 뗐지만, 서양 병원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은 의사는 아니지만, 의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정부에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필요하면 자신이 대표로 책임을 맡겠다고도 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 의학교를 새롭게 설립했다. 목표는 졸업생을 배출하고 그들이 각 지방으로 퍼져 그곳에서 치료와 교육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가르칠만한 선생님이 없었다. 결국 일본인 의사를 초빙하게 되었다.


그런데 운영이 순조롭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의학교에는 부속병원이 없었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3년 동안 책으로만 의학공부를 했다. 병원이 설립되기를 기다렸다가 병원이 지어진 후 그제서야 임상실습을 했다고 한다. 총 세번의 졸업생을 배출한 후, 의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병원은 '광제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광제원에는 주로 한의사가 진료를 했고, 종두 사업을 중요하게 진행했다. 그러다 일본인 의사들로 교체가 되면서 기존에 있던 한방 치료방식에서 내과, 안과, 이비인후과, 부인과로 새롭게 편성이 되었다. 이후 광제원은 대한의원으로 통합된다.


대한의원이 설립된 1907년, 아직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통감부는 적어도 초기에는 점진적인 행정 개선을 통해 한국인의 거부감과 저항을 무마시키고자 했지, 무리하게 즉각적인 병합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대한의원은 그 통치 정책을 보조하는 기구였다. 의료는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통감부는 대한의원에서 이루어지는 시술을 통해 한국인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한국인 환자에 대한 무료 진료나 저가 진료는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 74~75쪽




대한의원의 의사들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략적으로 무료 진료를 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비싼 진료비를 받았다. 언어와 치료비의 이중장벽 덕분이었는지, 대한의원은 주로 조선 사람들 보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내방했다고 한다. 대한의원 설립 당시의 사진을 앨범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그당시에는 허허벌판에 대한의원만 서있었는데, 지금은 바로 옆에 치과병동이 있어 북적북적한 편이다. 100년 정도의 시간 동안 의학은 더욱 세분화되고 대규모화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 기구들도 눈에 띄었다. 의사의 필수 아이템(!)인 청진기도 있었다. 청진기는 환자의 흉부 소리를 잘 듣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왼쪽의 선이 달린 청진기는 비교적 익숙한 형태이지만 오른쪽의 막태 형태는 처음 봐서인지 신기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인 의사, 일본식 의학용어가 주로 사용되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은 조선(대한제국)에 비해 서양의학을 조금더 일찍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의 병원은 파괴되거나 더이상 사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미국의 도움이 컸기에, 이때부터는 영어로 된 의학용어 등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0~1950년대에 시판되었던 고약과 안약의 모습을 보고 지금과 비슷해서 새삼 놀랐다. 심지어 약봉지마저 비슷하다! 





안경만 따로 모아둔 곳도 있었다. 안경은 조선에서 18세기 무렵부터 등장한다. 가격이 비싸 주로 돈 좀 있는 양반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안경은 대량화되고 다양한 스타일로 제작되고 있지만, 이러한 형태가 300여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전시실은 한 층 뿐이라, 돌아보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입구에는 차가 현관에 세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근대 스타일 건물의 특징이라 한다. 건물은 총 3층이고 옆에 있는 부속건물까지 하면 꽤 컸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 큰 신식 병원이라 생각되었을 것 같다. 꼭대기에 있는 하얀 시계탑은 대한의원의 상징이었다.


병원은 치료만 하는 곳이 아니다. 예방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도 늘 듣지 않던가. 손을 깨끗이 씻어라, 몸을 청결하게 해라 등등. 갑신정변때 개화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과업 중 하나도 이러한 위생과 청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신식 병원뿐 아니라 신식 화장실도 이 시기부터 도입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러운 것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셈이다. 특히 미생물, 세균 등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러한 사고는 더욱 견고해졌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포스터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사람의 분뇨를 거름으로 쓰지 말자는 내용이다.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사람들의 똥을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여하튼 서양식 병원이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이번 방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 서양의학이 자리잡는데 100년 가까이 걸렸다면, 조선은 훨씬 더 빠르게 적용되었다. 정부 차원에서의 필요성, 일본의 전략적 회유, 전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인듯 싶다.




마케터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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