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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한나라의 봄, 시련을 겪으면서 온다

by 북드라망 2019. 10. 2.

한나라의 봄, 시련을 겪으면서 온다


 

공신들의 봄, 살기 위해 기다리고 구부려라


여씨 천하는 혜제 7년, 고후 8년까지 더하면 15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공신들의 유방을 향한 충성심은 변질되지 않았다. 15년간을 기다리면서 여씨 천하를 몰락시키고 유씨 재건의 기회를 노린 공신들이야 말로 한나라의 봄을 연 주역들이다. 특히 공신 중 진평의 활약은 눈이 부시다. 진평은 전체 흐름의 형세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때에 맞게 움직였다.

 



고조가 죽은 후 한나라는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시한부 상태가 되었다. 공신 중 누군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나라가 탄생될 수도 있는 일이다. 다행히 공신들은 딴 마음을 품지 않았고, 유씨 한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다했다. 문제는 고후였다. 고후는 공신들이 견제할 정도로 정치적인 감각과 야심을 타고났다. 대신 vs 고후의 힘은 보이진 않았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을 향한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막상막하의 전력이라 싸움이 붙으면 나라뿐 아니라 서로의 전력이 모두 소진됨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초긴장 상황에서 진평은 ‘빅픽쳐’를 구상하게 되었고, 장장 15년을 기다리면서 실행에 옮긴다. 그의 활약은 고후의 옆을 지킨 시중 장벽강의 말을 듣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을 떠난 혜제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없어 승상 같은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여씨 문중인 여태, 여산 및 여록을 장군으로 삼은 뒤 남군과 북군을 통솔케 하고 여씨 일족을 모두 입궁시켜 조정 일을 보도록 청하면 태후가 안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 「외척전」, 『한서』 9권, 명문당, 425쪽


혜제가 죽고 그 뒤를 이을 아들이 없기 때문에 고후는 공신들을 두려워 하니 의심을 풀어주라는 것. 진평은 고후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입맛에 맞는 제안을 해서 그녀를 안심시킨다.

 

고조께서 천하를 차지하시고 자제를 왕으로 봉했는데 지금 태후께서 황제 일을 하시니 형제나 여씨들을 왕으로 봉하려 하신다면 안 될 것은 없습니다.

– 「장진왕주전」, 『한서』 2권, 명문당, 576쪽


진평이 자신의 편임을 확인한 고후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격적인 야심을 드러낸다. 만약 진평 아닌 다른 대신이었다면 고후가 안심하고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후는 진평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고 판단해서 눈치를 보던 차였다. 그런 진평이 자기 편이 되었으니 고후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진평 또한 고후의 정치력과 큰 야심을 간파했다. 하지만 야심의 크기가 어디까지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아예 고후가 원하는 대로 우선 판을 깔아주고 그 실체가 완전하게 드러날 때까지 가보자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성한 종기를 완전히 곪을 때까지 기다려서 제거하는 치료법과 비슷하다. 이 치료법의 문제는 몸의 정기를 빼앗기게 되므로 기력 소모를 감당하면서 종기의 상태를 관찰해야 한다. (노르스름하게 잘 익었을 때 손톱으로 그 종기의 고름을 콱 짜서 제거하는 쾌감. 특기 종기의 뿌리가 완전히 밖으로 제거가 될 때 느끼는 그 후련함을 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고후의 여씨 천하 프로젝트가 한나라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지만 기회만 잘 포착하면 한 방에 제거할 수 있다. 성난 종기를 바로 제거할 수 없듯 지금은 독오른 고후를 막 바로 제거할 수 없다고 진평은 진단했다. 진평은 고후에게 전권을 주고 때를 기다렸다. 진평의 예상대로 고후의 야심은 대단했다. 혜제의 후궁 아들을 태자로 정해 아바타로 세우고 고조의 유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여씨 천하를  위해 움직였다. 솔직히 고후의 악행이 이해 안 되는 바는 아니다. 타고난 본투비 정치 감각은 그녀를 보통 황후로 살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공신들은 여씨의 능력과 야심을 간파했기에 고후를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고, 고후도 살기 위해 여씨 천하건설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봄의 곡직(曲直) 기운이다. 직진하기 위해 구부리는 법. 무엇이든 시작은 어렵다. 싹을 틔우기도 어렵지만 어렵게 틔운 싹을 밟기 위해 숱한 시련들이 닥쳐온다. 비바람이 불기도 하고, 폭설이 오기도 하며, 한파가 몰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정면 대결하다가는 바로 아웃이다. 왕릉은 당시 분위기 파악을 못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꾸미지 않고 곧이곧대로 행동하며 직언을 잘 했”지만 여씨 천하 시대에는 그의 장점은 단점이 되어 버렸다.

 

고후는 여씨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왕릉을 슬쩍 떠 보았다. 왕릉은 진평과 달리 눈치 없이 직언했다. “고조께서는 백마를 잡아 맹서하시면서 유씨가 아니면서 왕을 하려는 자는 천하가 함께 격파하자고 하셨으니 지금 여씨를 왕으로 봉하는 것은 약속에 어긋난”다고 딱 잘라 거절한다. 고후는 기분이 몹시 상했고 진평과 주발은 곧바로 여씨 입맛에 맞게 답해서 비위를 맞춘다. 왕릉은 아부하는 진평과 주발을 맹비난했다. 그러자 진평은 


얼굴을 맞대고 비판하거나 조정에서 간쟁을 한다면 우리가 당신만 못합니다. 그러나 사직을 보존하고 유씨 후손들을 안정시키는 일은 당신 또한 우리만 못할 것입니다.

– 「장진왕주전」, 『한서』 2권, 명문당, 576쪽


주발은 지금은 정면 대결의 시기가 아니라고 왕릉을 설득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결국 사직을 보존하고 유씨 후손들을 안정시키는 일은 왕릉이 아니라 자신들이 할 거라고 자신한다. 그 말은 빈 말이 아니었고 15년만에 약속을 지켰으니 진평의 스케일에 놀라울 뿐이다.

 

진평의 예상대로 고후에게 미운 털이 박힌 왕릉은 바로 지위를 박탈 당한다. 그러자 왕릉은 화가 나서 두문불출하다가 십년 후에 분을 이기지 못해 죽어 버렸다. 만약 이때 진평과 주발도 왕릉과 같이 고후에게 발끈했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한나라는 없었을 수도 있다. 여씨 천하가 되었거나 진나라처럼 단명했을 수도. 진평은 때를 기다렸다. 진평은 고후의 심복 역할을 하다가 여태후가 죽자 준비된 듯 움직여서 여씨 일족을 죽이고 문제를 즉위시킨다. 종기가 농익을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한 방에 짜서 없애듯이.

 

여씨 일가의 즉각 제거가 가능했던 것은 진평의 유씨 왕조 복권을 향한 마음을 15년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집중력이야 말로 여씨의 야심보다 더 놀랍다. 기다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완벽한 계산이 끝나야 기다릴 수 있다. 정확한 비전, 상황 파악, 사람, 관계, 시너지, 위험성 등 모든 것을 감안해야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가 나온다. 진평의 계산으로는 지금은 종기가 곪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때였던 것.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가장 적극적인 행위일 수가 있다. 힘이 있다고 나댔다가는 나도 적도 한나라도 모두 죽을 판이다. 중요한 것은 ‘때’이다! 그렇다. 때를 아는 게 능력이다. 진평은 바로 그 때를 아는 자였다. 한나라가 태동하는 초봄이라는 때를! 이것이 바로 봄의 생명력이다. 시련이 오면 구부리지만 끝까지 살아남아서 성장하는. 그런 공신들의 곡직 활동을 통해 한나라의 봄은 오고 있었다.


개인과 가족을 넘어 ‘생명 비전’을 향한 활동


진평 외 대신들은 여씨 일족을 몰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찜찜한 것은 역기의 거짓말이다. 여록이 아무리 적이지만 자신을 전적으로 믿은 친구 여록을 역기는 배신하지 않았는가. 그 시대에 사람들조차 역기를 배신자로 불렀다고 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반고는 다음과 같이 논찬한다. 


효문제 당시 사람들은 역기가 벗을 이용했다는 말을 했었다. 본래 벗을 이용한다는 말은 이득을 얻으려 의리를 버리는 것이다. 역기의 경우에 부친이 나라의 공신이었고 또 강요를 당하는 상태였는데 비록 여록을 꺾어 버렸지만 사직을 편안케 했고 주군과 부친에게 도리를 지켰으니 옳은 일이었다.

– 「변역등관부근주전」, 『한서』 3권, 명문당, 66~67쪽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반고의 말에 따르면 역기의 거짓말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의리를 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역기와 여록을 친구 관계로 보자면 분명 배신이다. 하지만 국가를 하나의 몸으로 보자면 둘의 관계를 질문하게 만든다. 몸은 병이 드는데 살아남는 세포가 있다면? 그것은 암세포가 아닌가. 몸의 비전과 세포의 비전이 다를 수 없다. 생명 차원의 비전을 설정하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가 딱 보인다.

 



한서는 역기가 이득을 위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므로 의리를 저버린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어떤가. 여록은 역기의 말을 믿은 게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걸려 넘어진게 아닐까. 사기를 당한 진짜 이유는 상대에게 속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속는다고 하지 않던가. 즉 자기 욕심이 사기를 믿게 만든다. 진평은 여록이 부귀에 집착함을 잘 알고 있었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주듯 원하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병권 장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진평은 여산의 우유부단한 성정 또한 간파했고 그 점을 활용해서 나머지 병권도 장악했다.

 

여씨 천하가 될 뻔한 일촉즉발의 상황! 진평의 기다리고 구부리는 빅픽쳐가 없었다면 사태 진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평의 살림을 향한 구부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문제가 진평에게 우승상 지위를 주었지만 주발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좌승상에 만족한다. 주발에게 더 높은 공이 돌아가게 한 것. 솔직히 주발은 진평에 비해 전략이나 지혜 면에서 한참 못 미쳤다. 진평은 그것을 알아채고 주발을 더 높임으로써 그가 자격지심을 느끼기 않도록 배려했다. 진평의 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조회에서 문제가 주발에게 질문했다. 1년에 재판받는 자가 몇 명인지, 돈과 곡식의 출납 숫자가 얼마인지 등 꼬질꼬질한 것을 질문하자 주발은 답을 못하고 쩔쩔맸다. 질문은 진평에게 넘어 왔고 진평은 그것은 담당 관리에게 물어야지 승상에게 할 질문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황제는 ‘승상은 무슨 일을 담당하는가’라고 반문한다. 진평은 망설임 없이 답을 한다.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고르게 하고 사시를 순환하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이 때맞춰 성장케 하고, 밖으로는 사이(四夷)와 제후들을 어루만지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가까이 살펴주면서 경과 대부들로 하여금 직분을 충실히 수행토록 해야 합니다.

– 「장진왕주전」, 『한서』 2권, 명문당, 581쪽


진평은 승상의 지위가 명예가 아니라 자연 법칙을 지키는 원대한 비전속에서 수행되는 정치적 활동임을 인지했다. 주발도 진평의 답을 듣고 승상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진평이 주발처럼 쩔쩔 맸다면 문제는 주발과 진평을 불신했을 것이다. 결국 진평의 현답으로 인해 문제, 주발, 진평 모두가 자기 직분을 확실히 하고 비전을 공유하게 되었다. 봄은 시작이다. 시작은 불안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 계속되려면 서로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뢰는 비전을 공유 속에서 이루어진다. 비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룰 예정이다. 진평의 한나라를 살리는 힘은 죽음 앞에서도 빛을 발한다.

 

나는 음모를 많이 썼는데 이는 도가에서 금기하는 것이다. 내 세대에서 바로 망하더라도 그뿐이지만 끝내 다시 일어나지는 못할 것이니 이는 나의 음모에 대한 재앙일 것이다.

– 「장진왕주전」, 『한서』 2권, 명문당, 582쪽


 

진평은 천지 변화와 흐름을 따르는 자였다. 한나라의 창업은 개인 사익을 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평은 나라의 창업이 많은 피를 흘려야 하고 남을 속일 수밖에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 앞에서 자손들의 대대손손 번영을 욕망하지 않았다. 한나라를 살리기 위해 집안의 모든 기운을 진평 대에 모두 사용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후손들은 섭섭할 수 있겠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집안의 번영 대신 한나라를 살렸다. 그것은 주변의 세포보다 몸의 회복에 힘쓴 것과도 같다.

 

요즘 장안에 화제인 드라마가 스카이 캐슬이다. 몇 대째 의사. 법조인 등을 제조하느라 온갖 음모가 판을 친다. 좋은 머리, 집안, 모든 조건을 타고나서 고작 자기 집안의 번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타자, 나라가 어떻게 되든 나의 확장인 집안만 잘되면 장땡이다. 이런 삶은 결국 암세포를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온 몸의 정기는 약해지는데 자기 세포 증식에만 주력하는.  생명의 원리 차원에서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삶으로 돌아오면 진평의 생각은 참으로 낯설다. 그만큼 우리의 정신과 신체는 분열증적이고 반생명적인 흐름 위에 놓여있다. 진평의 삶에 대한 태도는 아쌀하다. 구더더기가 없다.  할 일을 한 것이고, 집안의 번영 따위의 보상에 연연하지 않는다.


혹시나 진평이 대의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개인의 욕망과 국가의 비전이 어떻게 일치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진평은 던지고 있다. 그는 집안의 번영을 포기한 자가 아니라 생명의 비전을 향해 가는 자일 뿐이다. 그 선택에는 희생, 옳고 그름 따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생명의 흐름에 따를 뿐이다. 그것은 사심에 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흐름이다. 자기 가족, 자기에게 갇히면 전체를 볼 수가 없다. 진평은 개인의 이익과 가족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번영없는 집안을 결핍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변치 않는 한나라의 비전

 

천하를 위해 집안의 번영을 포기한 진평의 음모(?)는 낯설지만 참으로 고귀하다. 한나라를 살리는 마음이 이처럼 절실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 행위는 곧 자신을 살리는 것이기도 했다. 유방이 죽어도 그 뜻을 같이 하는 자가 있으니 유방은 참으로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유방과 의기투합한 그들이 있었기에 한나라의 봄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지속되고 있었다. 공신들은 고조를 배신하지도 않았고 고후와 공존하면서 결국 한나라의 안정을 이끌었다.


솔직히 능력 면에서 보면 고후가 고조보다 더 출중하다. 그럼에도 결정적으로 고후와 유방의 다른 점이 있다. 유방 옆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후는 단 한명의 사람도 키우지 못했다. 여씨가 아무리 공신들의 마음을 사려고 해도 마음을 얻을 수가 없었고, 여씨 일족에게 몰빵을 했지만 결국 자손들은 물려준 것조차 지키지 못했다.


속담에는 농기구가 있더라도 때를 잘 만나는 것만 못 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이다. 번쾌와 하후영과 관영 같은 사람들이 한창 개를 잡고 마부노릇을 하며 비단을 팔 때 훌륭한 사람을 만나서 나라의 큰일을 하고 그 복록을 자손에게 물려줄 것이라 어찌 알았겠는가.

– 「변역등관부근주전」, 『한서』 3권, 명문당, 66~67쪽

 

유방을 만나지 못했다면 공신들은 평범한 일반 백성에서 끝났을 텐데 ‘훌륭한 사람 유방’을 만났기 때문에 큰일을 했다고 한서는 기록한다. 우리의 통념이 깨지는 지점이다. 능력만 출중하면 될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는가이다. 유방의 능력은 유방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와 관계를 맺는 순간 평범한 사람이 큰일을 하게 되듯 잠재력이 분출한다. 오히려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유방이 바탕이 되어 주변 사람들의 능력이 발휘된 것은 아닐까. 백지를 떠올려보자. 텅 빈 백지기 때문에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만큼 표현되는 게 아니겠는가. 만약 꽉 찬 그림 위라면 나의 표현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고후는 꽉 찬 그림이자 능력자라면 유방은 무능력의 능력. 텅빔의 충만함. 여백의 미학 등에 어울리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방과 공신들은 일방적인 복종 관계라고 할 수 없다. 합체가 되어야 새로운 신체가 만들어진다. 한나라 비전이 유방과 대신들을 의기투합하게 만들었다. 유방이 죽은 후 15년이 흘렀지만 유씨 재건을 위한 비전은 공신들의 열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전히 변색되지 않는 그들의 비전이 참으로 충성스럽고, 한편으로는 미스터리하게 여겨지지만 진평이 승상의 역할에 대해 대답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재상이란 천자를 보좌하고 음양, 사시를 순환하게 하고 만물이 때 맞춰 성장하게 하고, 밖으로는 흉노와 제후를 어루만지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살피고 신하들이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그 내용 속에 한나라의 비전이 녹아있다. 진평이 15년 동안 변질되지 않고 활동했던 비밀이기도 하다.



봄은 시련을 겪으면서 온다

 

한나라 창업을 위해 비전을 공유한 자들의 능동적인 협업과정. 유방은 고후의 야심을 간파했기에 유씨가 아니면 격파하라는 유언을 했을 것이다. 비전이 있으면 작은 시련에 움츠리지 않는다. 생명력이 강한 풀들을 상상해 보라. 바람이 불면 바람을 따라,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추위가 오면 추위가 오는 대로 웅크린다. 온갖 시련을 잘 버티고 살아남아야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진평을 비롯한 공신들은 한나라의 봄을 위해 기다리고 기다렸다.

 

우리는 보통 혜제는 유약해서 한나라 건국에 별 도움이 안 됐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한나라의 봄이 유지된 것은 혜제의 공도 크다. 권력욕은 약했지만 혜제는 분명 특별하다. 한서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혜제는 친족, 재상, 형제에 대한 은애와 공경이 도타웠고, 신하들의 간언에 두려움과 기쁨의 정서 속에서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왕이었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사람들과 감응하는 군주라는 것이다. 여태후의 야심을 채워주는 역할은 못했지만 지금은 한나라의 봄이다. 봄은 살리는 시기이다. 봄 기운으로 충만한 혜제는 주변을 살리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이런 상상도 가능하다. 만약 혜제가 엄마 고후처럼 야심가였다면 아버지 유방도, 어머니 여후도 진작 제거됐을지 누가 알겠는가. 대제국의 확장을 꿈꾸면서 자신을 진시황의 환생으로 여기는 자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한나라 400년이 펼쳐졌을까. 진시황이 16년 만에 폭망한 것처럼 한나라도 짧게 생을 마감했을 수도. 봄에는 꽃샘추위가 오듯 혜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을 운명을 타고 났지만 그럼에도 봄의 살리는 기운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라의 봄은 여전히 유지될 수 있었다.

 

꽃샘추위는 초봄에 날씨가 풀린 뒤 다시 찾아오는 일시적인 추위이다. 꽃 피는 것을 시샘하듯 춥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고후의 등장은 꽃을 시샘하기 위한 추위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후는 한나라의 봄을 방해한 훼방꾼인가? 질문을 다르게 해보자. 꽃샘추위가 봄을 막기만 할까. 그렇지만은 않다. 꽃샘추위는 싹을 죽이지만 다른 싹의 뿌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고후라는 악역이 없었다면 공신들은 긴장감을 잃고 각자의 공에 취해 그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불안정한 건국 초기에 안정을 향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고후의 악행 덕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은 살림과 죽임의 연속 과정을 통해 온다. 그 속에서 생명은 자란다. 온화함과 잔인함의 이중주. 그리고 때를 기다리고 구부리는 기저음이 한나라의 봄을 북돋고 있었다. 봄은 새롭고 생기가 넘치지만 좌충우돌을 겪으면서 온다. 많은 것을 겪어야 봄은 봄다워진다. 그래야 여름에 자신의 모습을 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봄의 생명력은 한나라의 일생을 좌우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고후와 진평으로 대변되는 숨막힌 대결을 보면 한나라는 이제 곧 혼란에 빠져 들 것만 같았다. 헌데 반전이 있다. 반고는 혜제와 고후 시대를 다음과 같이 논찬하고 있다.


효혜제와 고후 시대에는 나라 안(海內)은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군신이 모두 무위의 정치를 원했기 때문에 혜제는 팔짱끼고 있었으며 고후가 여주로 정사를 재단했으나 궁궐 문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천하는 태평했고 형벌을 거의 쓰지 않았으며 백성은 농사에 힘써 의식이 넉넉하였다.

– 「고후기」, 『한서』1권, 명문당, 199쪽


정치판에서는 피가 튀기는데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는 중이다. 지금까지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었는가. 혜제와 고후 시대에는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것. 군신이 무위를 원하고 왕은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무위 정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언급하겠지만 무위를 통해 백성이 전쟁에서 벗어났다는 게 중요하다. 혜제는 팔짱을 끼고 있고 여태후는 궁궐 문밖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천하는 태평했다. 형벌이 없고, 백성은 농사에 집중할 수 있어서 살기가 좋아진 세상이다.

 

반고의 말을 뒤집어보면 이렇다. 이전에 왕은 팔짱을 끼지 않고 적극적으로 무엇을 했고 궁궐 밖을 나갔으며 형벌을 시행했고 백성이 농사에 힘쓰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왕은 열심히 했는데 백성이 힘들었다는 결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국강병을 위해 정치를 하고 궁궐 밖에 나가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며 백성들을 전쟁에 징집하여 농사에 집중하지 못하게 괴롭힌 것이다.

 

하지만 혜제와 고후는 백성에게 너그러웠다. 백성을 괴롭히는 어떤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휴식을 하면서 새로운 봄을 열 수 있었다. 한나라의 봄은 이렇게 오고 있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잔인하게! 그리고 기다리고 구부리면서! 이렇게 온 초봄은 이제 늦봄에게 그 바턴을 넘겨주려고 한다. 태평성대의 시기로 이름난 ‘문경지치’라는 만춘은 그냥 온게 아니다. 초봄의 꽃샘추위를 혹독하게 겪으면서 왔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글_박장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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