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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 홍대용 ② : 『열하일기』보다 흥미진진한 청나라 여행기 「연기」

by 북드라망 2014. 12. 30.



연기(燕記)
: 청나라의 발견, 북학의 시작




1. 『열하일기』 이전, 「연기」가 있었나니!


오래전부터 중국 여행을 준비했던 담헌 홍대용이 1765년 12월 연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1천 50리, 의주에서 연경까지 2천 61리를 왕복했다. 담헌은 동지사의 일행 중 한 명이었지만, 공식 사행단이 아니라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길을 떠났기에 자유로운 여행객으로 청나라의 곳곳을 마음껏 보고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 여행기를 썼으니, 「연기(燕記)」가 그것이다.


최고의 여행기라 불리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유명세에 비교할 때, 담헌의 「연기」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담헌 홍대용 하면 국경 너머 청나라에서 이국의 선비들과 진한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담헌의 연행록을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놀랍기 짝이 없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사실 나도 「연기」를 읽기 전까지 크게 기대하지 않은 상태였다. 「연기」는 여정을 따라 기술된 여행기가 아니라, 특정 공간과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심드렁하게 「연기」의 페이지를 넘겼다. 어라? 반전이었다. 「연기」는 예상 밖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열하일기』만큼 깨알 같은 재미와 정보와 지혜가 넘쳤다.


「연기」에서 담헌은 청나라를 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연기」의 곳곳마다 청나라의 공간, 그리고 사람들과 진하게 접속하는 담헌의 벅찬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담헌은 청나라의 길에서 접속한 모든 장소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입혀 주었다. 연행록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처음일 것이다. 더하여 풍광과 사람들을 이토록 정감 있게 드러내는 연행록도 아마 처음이 아닐까? 연행록을 읽고 웃어 보기로는,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열하일기』, 그 다음이 「연기」!
 



2. 구경벽(求景癖), 보고야 말리라!


이미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던 담헌은 청나라에 진입하자 너무 바빴다. 담헌은 작정하고 길 위를 횡단했다. 청나라를 속속들이 관찰하겠다는 일념으로 여기저기 촉수를 뻗쳤다. 담헌은 사행단들 사이에서 ‘유람 좋아하는 홍공자’로 불렸다. 그의 구경벽은 연암을 능가했다. 아니 연암이 담헌의 구경벽에 질세라 호응한 듯하다. 친구는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담헌은 자신보다 앞선 시기, 1721년 청나라에 다녀왔던 노가재 김창업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확인했다. 그리고 노가재 선생이 가보지 못한 곳을 일일이 체크해가면서 어떻게 해서든 한 곳이라도 더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담헌은 어떻게 하면 남들이 가지 않는 곳까지 구경할지 고민하고 실행에 옮겼다. 가기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곳에 서슴지 않고 발을 내딛었다. 「연기」에는 미지의 장소를 탐사하려는 담헌의 집요함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담헌은 진짜 길 위의 사나이였다.


산해관 남쪽에 망해정이 있고 북쪽에 각산사가 있는데, 하루에 다 볼 수는 없다. 내일은 유관에서 자게 될 터인데 백리 길이므로 해는 짧고 길은 멀고, 또 각산은 얼음과 눈 때문에 갈 수가 없어서 먼저 망해정을 보기로 계획을 정했다. 해가 뜨자 곧 길을 떠나려는데, 수레 부리는 왕문거가 길을 도는 것이 싫어서 선뜻 나서지를 않았다. 그래서 수레를 그만두고 말을 타고 가는데, 의원 김정일이 따라왔다. 남문으로 나가 10리를 가니 정자가 만리장성이 끝난 맨 끝머리에 있었는데, 바다로 수백 보쯤 쑥 들어가 2층으로 성 위에 높이 솟아 있었고, 10여 계단의 층다리가 있었다. 주관하는 사람이 문을 꽉 잠그고 청심환을 요구했다. 주지 않았더니 골을 내고 열어 주려 하지 않았다.

덕유가 거짓말로, “돌아갈 때 다시 와서 꼭 서른 알이고 스무 알이고 많이 주겠다.”하고, 또 우리말을 섞어 가며 거짓 맹세를 하면서 성난 빛을 보이니, 주관하는 사람은 안 되었다는 듯이 얼굴을 활짝 웃어 보이며, “돌아올 때 틀림없이 나에게 환약 많이 주는 거지?”하고는 곧 문을 열어 주었다. 중국 사람의 인품을 알 만하다.

누에 오르니 눈에 미치는 끝까지가 구름과 바다뿐이었는데, 거대한 물결이 솟아오르며, 뜬 성엣장이 맞부딪쳐 공중으로 날고 마구 흔들리니 천지가 무너지는 듯하였다, 북으로 각산을 바라보니, 첩장(疊嶂)과 치첩(雉堞)들이 만리를 연해 오다가 필경 이 누에 와서 끝을 맺고 만다. 이 누에 올라와서 눈시울이 째지지 않고 머리털이 위로 뻗지 않는다면 참으로 못난 사나이다. 반평생을 돌아볼 때 우물 속에 앉아 그대로 잘난 체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활짝 펴서 함부로 천하의 일을 논하려 했으니 자량(自量)을 못한 것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망해정」, 「연기」, 「외집」 9권, 『담헌서』


담헌은 12월 19일 산해관에 도착하여 근처를 관광할 계획을 세운다. 산해관에서 욕심낸 관광지는 망해정과 각산사. 반나절밖에 시간이 없으므로 각산사는 포기하고 망해정을 향했다. 망해정은 만리장성 끄트머리, 바닷가에 세워진 망루이다. 다음 여정상 돌아가는 길이어서 마부도 수레몰기를 거부하는데, 담헌은 차라리 수레를 포기할지언정 유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수레 대신 말을 타고 기어코 망해정에 오른 것이다. 망해정에 도착해서도 구경은 쉽지가 않다. 망루지기가 누각에 오르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국에서는 이거 하나면 다 통한다. 조선의 청심환! 통역관 덕유는 슬쩍 뻥을 친다. 연경에서 산해관으로 돌아올 때 20알을 주겠단다. 백발백중, 망루지기는 관람을 허락한다.


과연 망해정에 오른 보람이 있었다. 첩첩의 산등성이와 만리장성이 한 눈에 들어오니, 그 감동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마디로 전율! 어느 누가 눈시울과 머리털이 쭉 뻗치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담헌은 자신이 진정 우물 안 선비였음을 체감한다. 조선에서는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었던 천지자연의 기운에 담헌은 저절로 겸허해진다. 조선의 반도 안에서 말로만 천하를 논하던 것과 실제 사이의 거리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숨을 쉬고 있는 현재의 청나라가 담헌의 눈에 들어왔다. 담헌은 눈앞에 펼쳐진 청나라의 풍광에 마음을 열었다. 장엄한 자연 앞에 청나라 오랑캐라는 이념 따위는 눈 녹듯 사라졌다. 아니 청나라 오랑캐라는 선입견이 의식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의 산해관. 절경은 여전한 듯 하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담헌의 유람은 그치지 않는다. 아니 더 과감해진다.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중국의 변경 봉성에 도착해서다. 사행단은 책문으로 직행하는데, 담헌은 봉황산에 가기로 맘먹는다. 담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도봉산, 금강산, 청량산, 월출산 등이 기묘하고 험준하기로 이름이 났으나, 봉황산만은 못하다. 뭇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오른 모양이 마치 1만개의 횃불이 하늘 높이 활활 타오르는 듯 보였다. 


담헌은 봉황산행에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나 일행들은 담헌을 만류했다. 사행길 30여 년 동안 이 산에 오른 이는 오직 어떤 정승 한 사람 뿐. 그나마 그 정승은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마를 타고 오르내렸기에 낭패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승경 곳곳을 누볐던 노가재 선배도 이 봉황산은 오르지 못했다. 아무리 이런저런 소리를 들었어도 유람 공자 담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간도 넉넉, 은자도 넉넉하니 산 위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오르기로 결정한다.  


온갖 모험의 동반자였던 평중 김재행이 동행하기로 하고, 통역관 덕유와 정통역이 함께 봉황산을 가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막상 길로 나서자 김재행은 변소를 간다 하고는 살며시 줄행랑을 쳐버렸다. 김재행이 도망가자 정통역 또한 사람도 없는 깊은 산골로 들어가기 겁난다면서 돌아서버린다. 그래도 담헌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봉황산 유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담헌은 담대하게 외쳤다. “내가 혼자서는 못 갈 줄 아는 모양이지. 봉산 수십리 땅을 얼마나 벼르고 별렀는데 보지 않겠는가? 평중 때문에 내 할 일을 못 하겠는가?”


마침내 약 20리쯤의 산행길을 예상하고 담헌은 덕유와 마부를 데리고 길을 떠난다. 외국 사람으로 다시 오기 어려운 길이라 담헌은 두려움 없이 떠났던 것이다. 산 위로 오르면 승려와 도사를 만나고, 아름다운 승경에 황홀해했다. 그런데 해가 미시(오후 1시에서 3시 사이)를 향해가고 있었다. 내려가야할 즈음, 한 승려가 모든 승경을 볼 수 있는 곳을 안내하겠다고 나선다. 역시나 구경벽 홍공자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날려 승려를 따랐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땀이 흐르고 숨이 차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다. 승경이 다 보이는 꼭대기에 올라 관음굴, 조양사 등을 모두 구경한다. 후회는 없었다. 담헌이 이번 걸음에서 본 산수 중에 제일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담헌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담헌의 이야기에는 늘 반전이 있다. 장한 구경을 했지만 길을 잃어버린다. 담헌은 이 순간의 얼빠진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세 사람은 당황하여 서로 얼굴에 빛을 잃고 있었다. 서로 말을 잊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내려가기만을 독촉한다. 그러기를 한 참, 겁이 나고 어떻게 할지 난감하여 돌 위에 걸터앉은 담헌. 뭔가가 나타났다. 화들짝!


숲이 깊고 골짜기가 깊어서 어둠침침하니 이미 저녁인성 싶었다. 범의 똥과 발자국이 가는 곳마다 수두룩했다. 나 역시 걱정이 되고 겁이 났다. …조금 있으니 갑자기 천둥치듯 벼랑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이 나타난 줄 알고 모두 깜짝 놀랐다. 얼른 일어나 살펴보니 큰 개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사람을 보며 짖는 것이었다. 참으로 반가웠다.

돌을 디디고 바라보니, 수십 보 밖에 여자 하나가 여남은 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광주리를 끼고 나물을 뜯다가 놀라 일어나 살피며 바라보는 중이었다. 덕유를 보내 길을 묻게했다. 여자는 덕유가 빠른 걸음으로 자기를 쫓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아이와 함께 광주리를 버리고 달아났다. 덕유가 소리쳐 부르며 뒤를 쫓으니, 더욱 죽자고 갈팡질팡 도망했다. 얼마 후 덕유가 돌아왔다.

“아이는 먼저 달아나 버리고, 여자는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따르기는 했는데, 길을 물으려니까 여자가 황급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길바닥에 오줌을 질펀히 누어 놓고는 소리를 지르며 울며 달아나 버렸다.”하였다.

- 「봉황산」,「연기」, 「외집」9권, 『담헌서』


산에서 마주친 여인은 덕유가 쫓아오자 짐승이라도 본 듯, 놀라 달아나다 오줌을 싸고 만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담헌은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준다. 일행을 따라 책문을 얌전히 따라갔다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이야기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구경벽 덕분에 만들어진 웃기면서 극적인 모험담. 「연기」는 이런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담헌은 그 소소한 드라마를 가감 없이 묘사했다. 담헌은 검열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체면이고 권위고 다 내던지고 여행의 드라마에 집중한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근엄하고 딱딱하게만 인식되었던 자연과학자 담헌 선비의 이미지는 저 멀리로 달아난다. 그 달아난 자리에 경쾌하게 길 위를 횡단하며, 호기심에 가득차서 이리저리 눈을 비비는 ‘홍공자’가 새롭게 들어와 앉는다. 아이 같은 시선으로 완전히 무장 해제된 담헌을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3. 유람을 위해서라면, ‘비장의 술책’


담헌은 청나라의 심장부 연경에 도착한다. 연경은 다른 곳과 달리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모든 곳엔 길이 반드시 있는 법. 담헌은 연경 유람을 마음껏 하기 위해 만반의 채비를 갖춘다. 여행 전 모든 정보를 입수하여 구경하는 데 장애가 없게 했던 것이다. 이 또한 한 편의 시트콤이다.


명나라 때부터 연경에 들면 문금(門禁 문에 출입을 금지함)을 두어 함부로 유람하지 못하게 했다.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 이후는 전쟁 직후라 조선에 대해 문금을 더욱 엄중하게 했다. 강희 말년에는 천하가 안정되어 이 문금이 조금 풀렸지만, 유람을 공공연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담헌처럼 개인 수행원으로 간 공사의 자제들은 유람을 자유롭게 즐겼는데, 혹시 사고라도 날까 염려하여 아문의 관리들이 법을 가지고 조종했다고 한다. 자제들은 부형의 세력을 의지하여 통역들에게 나들이 길을 트도록 강요했다. 통역들은 자제에 눌리고, 아문의 위엄에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은화를 뇌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것이 관행이 되어 유람하는 자들이 연경 나들이를 자유롭게 하려면 통역을 통해 뇌물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자유롭게 연경을 구경하는 것! 그것이 담헌의 목표였다. 그림은 <사로삼기첩>으로 강세황이 사행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담헌은 이런 사정을 훤히 꿰뚫고 은화를 준비해 온다. 물론 통역들이 주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통역에게 휘둘려 돈은 돈대로 쓰고, 유람은 유람대로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역시, 준비된 자는 무엇이 달라도 달랐다. 그렇다면 담헌은 꼼수의 대왕?^^   


유관을 목적으로, 연경에 가는 이라면 통역을 믿다가는 그 유관을 잘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꾸짖다가는 그들의 원망을 사서 뇌물을 바치는 비용이 많이 들게 된다. 그러므로 너무 믿지도 말고 원망도 사지 않으면서 편리하게 행동하려면 직접 아문을 접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러나 아문을 직접 접촉하려면 역시 예물이 없으면 그들의 환심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정을 익숙히 듣고 요량하였는지라 〈수행을〉 떠나기 앞서 미리 은자(銀子) 2백여 냥을 준비하여 고거(雇車 차를 품삼) 및 유관의 잡비를 마련하였고, 관(館)에 들어가서는 40여 냥으로 각 가지의 지선(紙扇)을 우리 나라 상인에게 샀던 것이다.

- 「아문제관」, 「연기」, 「외집」7권, 『담헌서』


담헌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정공법! 통역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아문과 접촉했다. 물론 어떤 양반 자제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이었다.


“나의 이번 걸음은 오로지 유관을 위함이라는 것은 그대들이 아는 바이며, 아문이 법을 핑계로 조종하면, 그대들이 중간에 끼어서 곤란을 받는다 함은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을 통하여 아문을 찾아보고, 따라서 후한 예물로 그들을 매수하여 나들이에 관계되는 일은 직접 아문에서 해결함으로써 그대들을 괴롭히지 않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아문의 조종을 늦출 수 있고, 그대들의 곤란을 받는 것도 면할 수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었더니, 통역들이, “그렇게 하여 주시면 참으로 저희들의 다행입니다만 종전에 사행의 자제들은 이 중인(中人)들을 천하게 여기어 서로 접근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공(公)께서는 혐의하지 않으시렵니까?”

-「아문제관」, 「연기」, 「외집」7권, 『담헌서』


직접 아문의 관리들과 만나겠다는 말에, 통역들이 더 걱정한다. 양반들은 중인들을 천하게 여겨 접근하지 않는데, 아문의 관리들과 만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담헌은 노가재 선생도 병자호란 직후의 삼엄한 상황에서도 중인들과 접촉했는데, 자신이 꺼려할 일이 뭐가 있겠냐고 도리어 반문한다. 그리고는 통역의 주선 아래 아문의 관리들과 직접 만났다. 담헌은 양반이라는 체면을 세워 청나라 관리를 깔보거나 하지 않았다. 외국인으로 연경에서 유람을 제대로 하려면 청나라 관리에게 직접 허락을 받는 쪽이 가장 빠르고 당당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담헌은 먼저 아문의 대사인 사주한(史周翰)을 만났다. 담헌이 유관을 허락해 달라 청하자 사주한은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다. 담헌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정직하게 묻고 솔직한 바람을 이야기했다. 


“조공 사신이 매년 서울에 들어올 적마다 우리들이 유람하는 것은 종래 금한 적이 없었는데, 공(公)은 어찌해서 그렇듯 허락하기를 인색하게 하시오.”

“나는 수재(秀才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는 사람. 청(淸)에서는 생원이라 함)인 만큼 예성(禮性)은 좀 있습니다. 유관하기 위하여 구차스럽게 도망쳐 문을 나가서, 아문(衙門)의 누(累)가 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 말씀하신 대로 때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문제관」, 「연기」, 「외집」 7권, 『담헌서』


담헌에게는 여행자로서의 장점이 또 있었으니,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사에게 유관을 부탁하는 즈음, 양통관(楊通官)ㆍ오임포(烏林哺)ㆍ서종현(徐宗顯)ㆍ박보옥(朴寶玉) 박보수(朴寶樹) 등 여러 청나라 통관이 들어왔고, 담헌은 일일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인사하였다. 통관들은 담헌의 거침없는 중국어 실력에 더해 배운 티가 나는 문어체 중국어에 호감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예의를 다하여 허락을 구했다. 대인의 자제로 아문을 찾아온 이가 없는데 낮은 관리들에게 깍듯하게 허락까지 구하니, 통관들의 호감도는 급상승할 수밖에. 문제는 대사 사주한이었다. 대사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담헌은 아문 관리들의 성품을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긴다. 


양통관은 나이 많고 혼미(昏迷)하여서 거의 일을 보지 않았고, 오임포는 나이 50여 세, 박보옥은 나이 40여 세로서, 모두 사람됨이 순량(淳良)하였다. 서종현은 나이 30여 세로서 용모(容貌)가 아름답고 정긴(精緊)하게 보였고, 박보수는 체격이 크고 뚱뚱하였는데, 그는 사람됨이 교활하고 사나워 보였으므로 모든 통역들이 다 무서워하였다. 대사는 사람됨이 아주 간솔하고 오만[簡傲]하여서 끝내 심중(心中)을 털어 말하거나 웃지를 않았으며, 말이 유관에 미치면 눈썹을 찡그린 채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참 있다가 돌아오고 말았다.

서종맹(徐宗孟)은 6품(品)인 큰 통관(通官)이다. 그의 형 서종순이 오랫동안 사개(使价)의 권세를 쥐고 있어서 이름이 동방에 진동하였는데, 종순이 죽은 뒤에 그의 업(業)을 계승하였다. 그는 성질이 매우 사납고 탐욕(貪慾)이 많았으며, 조선말을 잘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기민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모든 통역들은 그를 범과 이리처럼 무서워하였다. 요즈음 병 때문에 아문 밖에 나가 있었다.…종맹은 나이 60여 세로서 키가 크고 얼굴은 수척(瘦瘠)하고 까무잡잡하였으며, 눈은 움푹 들어가 흰자위가 많고 수염은 짧아서 뻣뻣하기 고슴도치 같았다. 바라만 보아도 무서운 인상이 들었다. 조그마한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데 길이가 가슴에 닿을 만하였다.

- 「아문제관」, 「연기」, 「외집」7권, 『담헌서』


담헌이 쓴 관리들의 모습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림은 18세기 김윤겸이 그린 <호병도>



담헌의 사전엔 포기란 없었다. 정공법이 통하지 않으니, 두 번째 단계에 돌입했다. 대사와 통관을 만나고 그들의 성품을 파악한 후, 예물을 보낸 것이다. 예물의 성격은 선물과 뇌물 사이? 이 때는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부탁할 때도, 인사를 나눌 때도 선물을 주는 게 관례였다. 담헌은 아문을 방문한 다음날 아침 일찍 대장지(大壯紙) 1속(束), 중장지(中壯紙) 2속, 부채 5자루와 먹 세 갑, 청심환 5알을 예물로 대사와 모든 통관에게 나누어 보냈으며, 서종현에게는 특별히 붓 세 자루를 더 보냈는데, 붓은 서종현이 요구했기 때문이다. 예물을 보내자, 대사와 통관들은 담헌의 나들이를 허락했다. 이제부터 일일이 허락받지 않고도 연경을 맘껏 볼 수 있었다. 담헌이 인용한 것처럼 ‘돈이 있으면 귀신도 통한다’는 속담이 헛말이 아니었다. 담헌이 자신을 한껏 낮추고 공을 들인 덕에 아문의 단속이 완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유람에 대한 우여곡절은 투 비 컨티뉴! 여러 통관은 담헌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서종맹은 삐지기를 잘했다. 담헌은 달래기 기술의 달인이었다. 유연하고 능숙하게 중국 통관들과 관계를 풀어갔다.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깍듯함으로, 때로는 선물로 이들의 마음을 돌리고, 자유로운 유람을 누렸다. 그리고 그런 유영의 기술을 「연기」에서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담헌은 완전히 새로운 여행객이었다. 그의 여행 스타일은 이전 사람들과 전혀 달랐기에 여행록의 스타일 또한 다르게 탄생했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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