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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백수 2세대 : 혜환 이용휴] ③ 구도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by 북드라망 2014. 11. 4.


[남인 백수 2세대 : 혜환 이용휴] ②

구도(求道)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이용휴의 시고 「송사계경협귀은섬곡」




1. 학문이 극에 달하면 평상하여 기이함이 없다!

혜환의 문장이 남다르다면, 그건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을 담았기 때문이다. 혜환의 삶도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혜환 주변의 사람들도 특별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혜환 글의 주인공은 그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그의 독자 또한 이들이었다. 혜환의 붓은 이 한미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직위나 신분, 그리고 사는 형편이 평범하거나 한미하지만, 이렇게 산다고 존재 자체가 평범하고 한미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사람을 남다르게 만들어주는 요인은 한미한 가운데 어떻게 생각하고 행위하느냐일 뿐, 다른 무엇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을 알아주고 기록해주는 이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혜환은 썼다. 이들의 생각과 행위를 기억해주기 위해서. 그러니 혜환의 글이 기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별함 속에서 특별함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가장 평범한 가운데 번뜩이는 그 특별함을 찾아냈으니, 혜환의 글은 새롭고 낯선 것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이함은 평범함에서 온다. 혜환은 말한다. ‘학문이 극에 달하면 평상하여 기이함이 없다.’(「송족손진민입풍악서」(送族孫振民入楓嶽序), 『혜환산문전집』상, 소명출판사, 349쪽) 혜환에게 학문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배우는 것일 터, 학문의 경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평상의 경지에서 노닐 수 있다고 한다. 도를 닦으면 어찌 되는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보통 사람도 다 하는 일인데 무엇이 다른가?  보통사람은 먹고 자면서도 무수한 망상에 시달린다. 그래서 욕심은 한없이 커지고 삶은 늘 불행하고 초조하다. 도를 깨친 이들은 먹을 때 먹는 일에만 집중하고, 잘 때는 달게 잔다. 일체 다른 잡념과 집착에 끄달리지 않고 매순간의 일에 집중한다. 욕심이 일어나지 않아 매순간 흡족하다. 그러니 학문이 최고에 도달하면 삶은 평이하다.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뿜어 무지개를 만든다. 재 가루로 달무리를 이지러뜨리고, 끓는 물로는 여름 얼음을 만든다. 나무소를 갈 수 있게 하고, 구리종을 스스로 울게 한다. 소리로는 귀신을 부르고, 기로는 뱀과 범을 오지 못하게 한다. 서쪽 끝에서 동쪽 바다까지 잠깐 사이에 생각이 두루 미치고 하늘 위와 땅 아래도 순식간에 생각이 이른다. 백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록하고, 천 세 이후도 미루어 헤아린다. 비록 지나간 옛날의 여러 철인들도 오히려 역량을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 이렇게 큰 지혜와 큰 재능을 가지고도 7척 몸뚱이에 부림을 당하여 술과 여자와 재리, 혈기 속에 빠져 있으니 어찌 크게 애석하지 않겠는가?


-「증조군운거」(贈趙君雲擧), 같은 책, 44쪽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과욕을 부리지 않으면서 소박하게 사는 것일는지 모른다. 큰 지혜와 큰 재능을 가지고 온갖 신기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경지에 오른 이들이 왕왕 있다. 옛날의 현철한 사람들도 쫓아갈 수 없는 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한 순간에 집중시키는 그런 진귀한 사람들이 있다. 끓는 물로 얼음을 만들고, 나무소를 가게하고, 구리종을 스스로 울리게 하는 등의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런 경지에 도달했다면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소박하는 사는 것



그런데 혜환은 이런 특이한 일은 특이한 게 아니라고 한다. 이런 대단한 지혜와 능력을 가졌으면서 왜 보통 사람들처럼 칠척 크기의 몸뚱이에 휘둘리는지 묻는다. 다른 사물은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으면서, 제 한 몸도 장악하지 못하고 제 욕망도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찌 특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욕망의 부림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혜환이 보기에 술과 여자와 재물과 혈기를 제압하고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는 게 진짜 어렵다. 미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평이하고 담박하게 생활을 유지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혜환은 사람들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보는 삶의 방식에서 특별함을 읽어낸다. 과욕을 부리지 않고 절제하는 삶이 진정 기이하다.



2. 몸만 돌리면 방위가 바뀌고 명암이 바뀐다네


혜환은 평상의 삶 속에 진리가 있고, 도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 구도의 장소나 방법이 어디 저 멀리에 있지 않다. 앉은 그 자리, 생활하는 그 장소가 바로 구도의 공간이며, 공부하고 생각하고 일하는 그 때가 구도의 순간이다. 구도의 길은 그 자리 그 순간에 있다. 혜환은 구도를 신비하고 초월적인 어떤 행위로 보지 않는다. 매우 일상적이고 간단하다.  


늙은 살구 나무 아래 작은 집 한 채가 있다. 방에는 시렁과 책상 등속이 3분의 1을 차지한다. 손님 몇이 이르기라도 하면 무릎을 맞대고 앉는 너무도 협소하고 누추한 집이다. 하지만 주인은 아주 편안하게 독서와 구도에 열중한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 작은 방에서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가 바뀌고 명암이 달라진다네. 구도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바뀌면 그 뒤를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네. 자네가 내 말을 믿는다면 자네를 위해 창문을 열어주겠네. 웃는 사이에 벌써 밝고 드넓은 공간으로 오르게 될 걸세.

- 「행교유거기」(杏嶠幽居記), 같은 책, 130-131쪽



"자네를 위해 창문을 열어주겠네"



협소하고 누추한 방에서도 구도가 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도가 일상과 다른 무엇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혜환이 생각한 구도는 일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바꿔 말해야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작은 방에서 구도해야 한다고. 구도는 방안에서 즉각 이루어질 수 있다. 왜? 구도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혜환은 87자의 한자로 이루어진 이 짤막한 기문에서, 구도를 간결하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작은 방에서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가 바뀌고 명암이 바뀌듯,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즉 내가 바뀌면 세상을 다르게 살 수 있다. 생각을 바꾸는 순간, 그 시공간은 바꾸기 이전의 시공간과 완전히 다르다. 호리의 차이가 천지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러니 도를 찾아 삼만리를 헤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나는 좁은 방안에서도 저 사해 밖을 주유하며,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꾼다는 건 구체적으로 뭘까? 협소하고 누추한 방에서 산다고 사람까지 누추하거나, 사람의 도량까지 좁아지는 게 아니다. 협소하고 누추한 것에 휘둘리면 그때부터 사람조차 비루해지고 편협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협소하고 누추한 방을 편안하게 여긴다면, 분명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이고 세상과 다르게 만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삶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듯 구도는 간결하고 평이하다. 그러나 구도행위를 당장 방 안에서부터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건 구도의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단지 구도 행위를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도에 관해 다른 방법을 묻는다면, 그건 안하려는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사람이 오늘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서부터 세도가 그르치게 되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단지 오늘에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은 그것을 다시 돌이킬 방책은 없고, 미래라는 것은 비록 36,000일이 계속 이어져 오지만, 그날에는 각기 그 날에 해야 할 것이 있으니 실로 다음 날에 넘길 만한 여력이 없는 것이다.
유독 괴이한 것은, 대저 한가함이란 것은 경전에도 실리지 않았고 성인들이 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맡기어 날들을 소비하는 자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우주간의 일에는 그 몫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이다. 또, 하늘은 스스로 한가하지 못하여 항상 운행하고 있으니, 사람이 어찌 한가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당일헌기」(當日軒記),『혜환산문전집』하, 52-53쪽


혜환은 진정한 나를 찾든, 구도를 행하든 당장 오늘 하라고 일침을 놓는다. 과거는 지나가서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이어져 오지만 그때는 또 그때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날의 일은 그날에 하라. 삶은 다른 게 없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낼 뿐이다. 오늘 여기, 이 평상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하면 된다. 생각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 순간 바꾸면 된다. 그리고 생각을 바꾼 대로 일상을 꾸리면 된다. 그것이 삶의 참모습이다. 내일로 미루면 영원히 생각을 바꿀 수도 삶을 바꿀 수도 없다. 




3. 일용의 떳떳함 속에 하늘의 법칙이 있다


혜환에게는 일상적인 삶이 중요했다. 거창한 이념이나 진리는 삶 너머에 있는 것, 어찌보면 삶과 무관한 추상적 가치일 뿐이다. 혜환은 매일 매일을 채워가는 삶의 과정에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혜환의 글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혜환은 아주 뛰어난 존재들의 특별한 삶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존재들이 한결같이 꾸려가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들에 주목한다. 혜환 주변에 있었던 이들 주인공은 비명에 간 젊은 열부거나 세속적 명예나 지위를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시정사람들이다. 세상에 드러날 만큼 혁혁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삶에서 세속적 명예를 가진 인간과는 다르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보여준 점을 높게 평가했다. 평범성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인간가치의 발견은 이용휴의 신념에 속했다.(안대회, 「이용휴 소품문의 미학」)



매일매일 치러내는 생활의 현장에서 덕행을 찾을 수 있다.



이른바 행과 덕이란 것은 반드시 현격하게 뛰어나거나 놀랄 만큼 폭발적인 일만이 아니라 오직 일용하는 떳떳한 일에 백성의 떳떳함과 하늘의 법칙이 실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 「증정부인 파평윤씨 묘지명」(贈貞夫人坡平尹氏墓誌銘), 같은 책, 상, 139쪽


우리는 덕행이라 말하면 아주 특별한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 상상한다. 그러나 혜환은 일용의 떳떳한 일 가운데 덕행이 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매일 치러내는 생활의 현장 그곳에서 덕행을 찾을 수 있다. 덕행은 하늘에서 내린 천재적 능력도 아니고, 어떤 한 가지 뛰어난 일로 갑자기 드러나는 행위도 아니란 것이다. 


혜환의 글에 기록된 사람들의 행위는 놀라울 정도로 폭발적이지 않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런데 혜환은 잔잔하고 일상적인 이들의 행위가 변치 않고 한결같이 이어졌다는 사실에서 그 가치를 찾는다. 덕행은 특별하고 뛰어난 이들이 지닌 독보적 능력이 아니다. 덕행은 모든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일상의 능력이다. 덕행은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낸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 기억하고, 남기고, 전하지 않을 뿐이지. 그래서 혜환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변함없는 성실한 행위들을 기록했고 이들의 행위를 영원히 전해주었다.   


시서를 배우지 않았고, 명예를 탐내지 않았으나, 허씨 집 딸은 시부모를 잘 섬겼도다. 가려우면 긁어드렸고, 요강도 깨끗이 씻어 드렸으며,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고, 잿물로 빨아 바늘로 꿰매었도다. 평생토록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달게 여겼으니, 이것은 한결 같이 힘을 다하고 뜻을 기른 것으로 아녀자 중에 증삼이라 할 수도 있다. 비녀를 꽂은 여자로서 이와 같이 할 수 있었으니 갓을 쓰고 수염이 난 자들을 일깨울 만하도다.

- 「효부허씨찬」孝婦許氏贊), 같은 책, 상, 39쪽


18세기에 부인들의 행적이 남으려면, 아픈 남편이나 시부모를 위해 단지하여 피를 내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는 행동 정도는 해야 한다. 그러나 혜환이 입전한 허씨 부인은 다르다. 허씨 부인은 잘 배우지도 못했고,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평범한 아낙네다. 혜환은 허씨 부인의 덕행을 시부모 잘 섬기는 데서 찾았다. 그런데 가려우면 긁어드리고, 요강을 깨끗이 씻어드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잿물로 옷을 빨아 해진 곳을 꿰매드린 게 덕행의 전부다. 그럼에도 허씨 부인의 행위를 기린 건, 기껍게 한결같이 시부모를 성실하게 봉양했기 때문이다. 혜환은 이런 일상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어느 한 순간의 뛰어난 행위도 기억할 만하지만, 혜환에게 더 중요한 건 평생을 성실하게 살다간 여인들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마 허씨 부인만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18세기의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살았을 것이다. 보잘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아낙네들이지만, 자기 자리를 지키며 꿋꿋하고 당당하게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평생을 보냈을 것이다. 혜환은 이 평범함이 진짜 진기함이라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활하니 쉬운 것 같지만, 사실 그 한 사람 한 사람, 얼마나 열심히 분투하며 살았겠는가?    


박사중은 자가 여집으로 반남 사람이다. 그의 부친 필윤이 이웃 사람에게 살인을 했다는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 지 오래 되었는데, 말이 여러 차례 바뀌어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박사중이 혈서를 써서 원통한 사정을 아뢰고자 하여 두루 왼쪽 다섯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피가 나지 않았다. 가슴을 두드리고 크게 통곡을 하며 하늘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다시 두루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깨물었더니 다섯 손가락 모두에서 피가 나왔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지만 잘되지 아니하자 곧 붓을 찾아 피에 적셔서 글을 썼다. 수십 수백 자를 썼는데 한 글자마다 피눈물이었다. … 혈서를 쓴 아이의 나이가 몇 살인지를 물었다. 신하들이 대략 십 세 남짓이라고 대답하니 임금이 오래도록 찬탄하고, 유배를 멀리 보내지 않아 부자로 하여금 서로 만나보게 하였다.

박사중의 나이가 어렸으니 일찍이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만약 흉내 내어 계획했다면 이는 이름을 파는 짓이니, 어찌 박사중이 될 수 있겠는가?

-「박사중전(朴師仲傳), 같은책, 상. 59-61쪽


사람이 지상에 태어나면 곧 입으로 먹게 되니, 이것은 태어난 후 최초의 몸을 꾸려 나가는 계획이다. 그런데 음식은 밭가는 것을 따라 얻는 것이니, 이것은 가장 급한 작용이다. 다만 그저 먹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곧 쪼는 새나, 새김질하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 반드시 독서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니, 이것이 가장 큰 공과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현달하여서 위에 있는 자들은 조정에서 계책을 세우느라 밭 갈 겨를이 없고, 궁하여 아래에 있는 자들은 밭과 들에서 일하느라 또한 배울 겨를이 없다. 오직 힘을 본업에 써서 이 일에 뜻을 독실하여야 하는데, 사민 가운데 이 두 가지에 겸하여 능한 사람은 우리 친구 남처사가 곧 그 사람이다. 처사는 선대에게 물려받은 밭이 있어서 몸소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여 아침 저녁을 댔으니 사문이 가르쳐 준 것이 있으므로 입으로 스스로 읽고 외워 자손에게 가르치며 말하기를 ‘이는 옛사람이 궁경(躬耕)하고 설경(舌耕)하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취하여 그가 사는 집의 이름으로 삼았다. 아, 처사의 세대에 전답은 밭두둑에 이어졌고 서가에는 만축의 책이 꽂혀 있었는데 수십 년이 안 되어 이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도박이 아니면 주육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데도 처사의 하는 일이 옛날과 같았으니 힘쓸 것을 아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이경와기」(二耕窩記), 같은책, 상, 318쪽


윗글의 주인공 박사중과 남처사도 대단한 일을 한 사람들은 아니다. 조금 충격적이라면 박사중은 열 살의 어린 아이로 혈서를 써서 살인 누명을 쓴 아버지를 구명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혜환은 이 글에서도 열 살 아이의 아이다움을 보여줄 뿐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는 아이, 놀랍긴 하지만 혜환은 그 영웅적 면모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절박한 아이의 마음이 혈서를 쓰게 했다는 것. 아이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는데 능숙하지 않다. 겁도 났을 테고, 처음 손가락을 깨물었을 때는 피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마음이 뒤섞여 통곡하며 손가락을 깨물고, 피가 나왔지만 흐르지 않으니 붓에 적셔서 상소문을 쓰는 모습을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두 번째 글, 남처사의 이야기 또한 한미한 백수 선비의 생활에 관한 것이다. 남처사는 농사도 짓고, 책도 읽는다.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 18세기 조정에 나아가지 못하는 선비는 생계를 도모해야 했다. 그러니 체면을 버리고 반은 농부로 살아야 했다. 남처사는 자격지심 같은 게 없었다. 열심히 밭갈고 씨뿌리고 수확하여 아침저녁을 대었고, 성실하게 공부하여 자손에게 가르쳤다. 남처사의 말처럼, 궁경(窮耕)하고 설경(舌耕)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누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도박과 주색잡기로 가세가 기울어졌는데도 원망하지 않고 여일하게 궁경하며 설경하는 남처사의 모습이 곧 남처사의 덕행임을 말한다. 그리고 궁경과 설경을 자기 집 이름으로 삼은 남처사에 부응하여 혜환은 기문을 지어주었다. 궁경과 설경으로 매일을 살아야 하는 고된 선비의 생활, 남처사는 불평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천명이라 여기고 묵묵히 걸어갔다. 야망은 없지만,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남처사에게서 우리는 생활인의 위대함을 본다. 요즘 뜨고 있는 드라마 <미생>의 상사원들처럼. 혜환의 글은 그래서 미시사다. 땅에 발붙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렌즈를 맞추고, 그들의 매일을 디테일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혜환의 글은 잔잔하면서 감동적이고, 미소짓게 하면서 찡하게도 한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上 - 10점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소명출판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下 - 10점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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