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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백수 2세대 : 혜환 이용휴] ② 진짜 나로 돌아가라!

by 북드라망 2014. 10. 21.


[남인 백수 2세대 : 혜환 이용휴] ②

진짜 나로 돌아가라




1. 글쓰기, 진짜[眞]를 찾아가는 길


혜환 이용휴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문장가이기를 원했으며, 문장가로서의 자의식 또한 남달랐다. 혜환은 백수 선비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글을 쓴 것도 아니고, 세상을 계도하거나 도를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쓴 것도 아니었다. 조선시대 선비에게 글을 쓰는 일이야 기본 중에 기본이지만, 선비라면 당연히 쓰는 글을 썼기 때문에 혜환 스스로 자신을 문장가라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혜환에게 문장가는 특별한 무엇이었다. 그래서일까? 혜환의 글에는 불우한 지식인의 음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혜환은 오직 문장가로서 충만해 있을 뿐, 어떤 결핍도 느끼지 않았다.    


혜환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를 지녔기에 문장가인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것일까? 혜환에게 문장가는 어떤 존재인가?     

시문에는 남의 도움을 받아 견해를 세우는 경우와 제 스스로의 힘으로 견해를 세우는 경우가 있다. 남의 도움을 받아 견해를 세우는 것이야 비루하여 논할 바가 못 되거니와, 제 스스로의 힘으로 견해를 세우는 사람도 고루하고 편벽됨이 뒤섞이지 않아야만 곧 참된 견해(眞見)를 만들 수 있다. 또한 반드시 참된 재능(眞才)으로 이 견해를 도와야만 하니 그런 후에야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

품계가 올라 일품에 이르더라도 아침에 벼슬을 거둬들이면 저녁에는 서인이 되고, 재물을 늘려 만금을 소유하더라도 저녁에 잃어버리면 아침에는 알거지가 된다. 그러나 문인재자가 소유한 것은 한번 소유하게 되면 비록 조물주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다. 이것이 곧 참된 소유(眞有)이다.

- 이용휴, 『송목관집서(松穆館詩集序)』, (박준호,「혜환 이용휴의 眞문학론과 眞詩」에서 재인용) 


이 글은 혜환 이용휴가 제자 이언진의 문집에 써준 서문이다. 이언진은 27살에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연암이 쓴 「우상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언진은 73살의 혜환을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이 글은 시문에 뛰어난 제자 이언진을 격려하고 그 시문을 칭송하는 글이지만, 혜환은 이 글에서 문장가란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한다.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고 싶고, 만금의 재물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 결과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고, 만금의 재물을 소유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영원히 나의 것이라 그리도 확신했건만 관직도, 재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지위도, 재물도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부러워하고, 이것을 소유하기 위해 안달복달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소유할 수 있는 참된 것은 과연 있는가? 혜환은 말한다. 문장가가 소유한 것은 믿을 만하며 참된 것이라고. 문장가가 소유한 것이라면 바로 문장일 터. 문장은 한 번 만들어지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혜환이 이 글에서 강조하는 바는 따로 있다. 문장이 썩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다. 참된 견해를 간직한 문장이어야 소중하며, 더 나아가 참된 재능을 지닌 문장가의 견해라야 조물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문장가가 소유한 참된 것이란 무엇인가



혜환이 말하는 바, 참된 것은 무엇인가? 참된 견해, 참된 재능, 참된 소유로 표현되는 이 진(眞)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것이다. 그래서 진짜다. 재물이나 관직은 가짜다. 이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추구하는 사회적 욕망으로 모방에 불과하다. 


결국 진은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독창성을 말한다. 따라서 진을 다르게 표현하면, 기(奇)다. 이 기를 추구하는 존재가 문장가다. 따라서 혜환은 문장가가 아닌 그 무엇이 되기 위해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글 쓰는 자체가 이미 무엇이 된 것이었다. 남과 다른 나가 되는 길, 그것이 문장가의 길이었다. 문장가는 "남의 자취를 도습하지 않고, 남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아 스스로 으뜸이 되는 자"들이었다.(「이화국유초서문(李華國遺草序), 『이용휴 산문전집(상)』) 



2. 성인의 그림자들, 나로 돌아가라


혜환은 성호 집안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보가 참으로 달랐다. 성호와 그의 제자들이 세상을 걱정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면, 혜환은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성호가 세상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고심할 때, 혜환은 어떻게 하면 진짜 나로 돌아갈지를 고민했다. 


진짜 나로 돌아가라는 혜환의 목소리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이럴 때 혜환은 양명 좌파, 이탁오의 말에 의탁한다. 성인을 따라하는 나는 진짜 나가 아니다. 그저 성인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탁오처럼 표현하자면 이런 나는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는 한 마리 개’다.  


옛날 나의 초심은 천리가 순수했네. 昔我之初。純然天理。

지각이 생겨나면서 해치는 것 분주히 일어났네. 逮其有知。害者紛起。

식견이 해 되었고 재능도 해 되어서 見識爲害。才能爲害。

뻔한 맘과 뻔한 일들 얽어서는 풀 길 없었네. 習心習事。輾轉難解。

다른 사람 받들기를 아무 어른, 아무 공하며 復奉別人。某氏某公。

무겁게 추켜 대면서 멍청이들 혼 쏙 뺐지. 援引藉重。以驚羣蒙。

옛날의 나 잃고 나자 참된 나도 숨었다네. 故我旣失。眞我又隱。

일 꾸미기 좋아하는 자 내가 돌아가지 못한 틈을 탔네. 有用事者。乘我未返。

오래 떠나가고픈 맘 생기니 꿈 깨자 해 떠 있는 것 같도다 久離思歸。夢覺日出。

훌쩍 몸을 돌이켜 보니 이미 집에 돌아와 있도다. 翻然轉身。已還于室。

광경이랑 다를 것 없다지만 몸 기운은 맑고도 화평했도다. 光景依舊。軆氣淸平。

차꼬와 형틀에서 벗어나니 오늘은 살아난 것 같구나. 發錮脫機。今日如生。

눈은 밝아진 것도 없고 귀도 밝아진 것도 없지만 目不加明。耳不加聡。

하늘이 준 눈 귀 밝음이 옛날과 같아졌을 뿐이라네. 天明天聡。只與故同。

많은 성인 그림자처럼 지났으니 나는 나로 돌아감만 구하리. 千聖過影。我求還我。

어린애나 어른이나 그 마음은 다를 것 없다네. 赤子大人。其心一也。

돌아와 신기한 것 없게 되면 딴 생각으로 달리기 쉽다네. 還無新奇。別念易馳。

만약에 다시금 떠난다면 돌아올 기약 다시 없으리. 若復離次。永無還期。

향 사르고 머리 조아리며 신과 하늘에 맹서 하노니, 焚香稽首。盟神誓天。

이 한 몸 다 마치도록 나와 함께 주선하리라. 庶幾終身。與我周旋

-「환아잠(還我箴)」, 『혜환 이용휴 산문전집(상)』, 231-232쪽


「환아잠」은 혜환이 신의측(申矣測)이란 문인에게 주는 글이다. 신의측의 자가 환아(還我)인데, 환아의 뜻을 새기며 경계하고 있다. 특정 인물과 관련된 글이지만, 혜환의 평생 화두는 바로 나로 돌아가기였다. 태어난 그대로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진짜 나다. 처음의 나, 순연한 천리의 마음은 노장(老莊)에서 주장하는 자연의 의미에 가깝다. 저절로 그렇게 이루어진 존재들의 상태, 따라서 저마다 다른 고유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태어난 그대로의 마음으로 살지 못한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외부세계를 보고 듣는다. 밝은 귀와 밝은 눈 덕분에 많은 식견이 쌓이지만 이 식견이 오히려 해가 된다. 즉 고유한 나만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식견을 따르느라 분주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성인의 자취라면 무조건 따르며, 조그마한 의심조차 품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 내 목소리와 내 자취는 어디론가 사라져 종국에는 나는 내가 아니다. 그저 뻔하게 살아가는 그림자일 뿐이다. 이렇게 산다면 나는 나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나와 남을 마주 놓고 보면, 나는 친하고 남은 소원하다. 나와 사물을 마주 놓고 보면 나는 귀하고 사물은 천하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도리어 친한 것이 소원한 것의 명령을 듣고, 귀한 것이 천한 것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욕망이 그 밝은 것을 가리고, 습관이 참됨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이에 좋아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성냄과 행하고 멈추며 굽어보고 우러러봄이 모두 남을 따라만 하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 심한 경우에는 말하고 웃는 것이나 얼굴 표정가지도 저들의 노리갯감으로 바치며, 정신과 의사와 땀구멍과 뼈마디 하나도 나에게 속한 것이 없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아암기(我菴記)」같은 책, 상, 47-48쪽





남과 나를 비교할 때 나를 우선하고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살아가면서는 나에 속한 것은 소홀히 하고 남만을 높이고 남만을 따라한다. 심지어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을 일으킬 때조차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한다. 웃고 울고 말하고, 표정 짓는 것 하나하나 내 것이 없다. 나는 주체로 사는 게 아니라, 푸코의 말처럼 주체화되었을 뿐이다. 남들의 명령에 따르고 복종하면서 마치 주체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대중을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다. 이치를 따라야 한다. 이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에 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마음에 물어야 한다. 마음이 편안하면 이치가 허락하는 것이니 그것을 행하고, 불안하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수려기(隨廬記)」, 같은 책, 346-347쪽


사회나 집단의 명령이 아니라, 대중들을 따르면 되는가? 혜환은 대중도 믿지 않는다. 대중추수주의 또한 미혹이다. 대중도 나와 다르지 않다. 그들도 다른 삶을 모방하면서 주체적인 삶인 양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혜환은 마음의 이치를 따르면 된다고 한다. 정말 하고 싶은가, 행할 때 마음이 편안한가를 묻고 따져야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누구 때문도 아니요, 인정받기 위해서도 아니요, 오직 나의 충만한 생명 의지를 따를 것. 혜환이 글을 쓰는 이유이자, 글을 쓰는 방법이었다.     



3. 범인(凡人) vs 다른 나, 그 한 끝 차이


혜환의 문집에는 지인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주는 일상적 차원의 글들이 주로 수록되어 있다. 문장 종류로 따지면, 길 떠나는 사람들에게 덕담이나 당부의 말을 건네는 송서(送序)나 증서(贈序), 시문집의 서문, 어떤 사람의 서재나 집의 유래를 서술한 기문(記文), 죽은 이를 애도하는 묘지명과 제문에 집중되어 있다. 

혜환이 글에서 다름을 추구했다는 것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간다는 뜻이지, 글의 종류나 글의 소재 혹은 글을 건네는 대상이 파격적이란 말은 아니다. 혜환은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문체로, 남들이 추구하는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로 세상과 접속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혜환은 진짜 나를 찾기 위해 세상의 여느 사람들과는 확실하게 변별되는 ‘독자적’ 형상을 그려낸다. 혜환이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그 다름, 그 진짜는 어떤 모습일까? 그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자. 


혜환은 진짜 나, 여느 사람과 다른 그 특별한 내가 저 높이, 저 멀리 있을 거라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유머 가득한 글로 일침을 놓는다.   


이 거처는 이 사람이 사는 이곳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고, 이 사람은 나이가 젊으나 식견이 높으며 고문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다. 만약 그를 찾고 싶으면 마땅히 이 기문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비록 무쇠 신발이 다 닳도록 대지를 두루 다니더라도 마침내는 찾지 못할 것이다. 

此居, 此人居此所也. 此所卽此國此州此里, 此人年少識高, 耆古文, 奇士也. 如欲求之, 當於此記, 不然, 雖穿盡鐵鞋, 踏遍大地, 終亦不得也. 

- 「차거기(此居記)」, 같은책, 65쪽


혜환의 글 중 자주 거론되는, 전부 53글자로 이루어진 기문(記文)이다. 기문은 주로 서재, 정자 등에 이름을 붙이고, 그 장소와 그 이름의 의미를 풀어주는 형식의 글이다. 그래서 다소 천편일률적이다. 이름과 장소만 다를 뿐, 들어가는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어느 마을, 어느 좋은 자리에 있는 정자나 집, 그리고 그 이름의 유래를 쭉 나열하는 것이 보통의 기문이다. 그래서 수십편의 기문을 읽어도 딱히 남는 게 없다. 


혜환은 이 기문에서 사람도, 장소도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짧은 기문이 웃긴다. ‘此’만 8번 사용한다. 여기를 강조한 것이다. 이 사람과 이 거처를 알려면 저기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 있는 이 거처와 이 사람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명성도 화려함도 없는 사람과 장소. 그저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거처에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이 사람이 있다. 


그러니 그를 찾으려면 저기,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저 높은 곳에서 찾으면 안 된다. 혹은 여기가 아닌, 저 세속의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보잘 것 없지만 소박하고 평이한 여기 이곳에서, 고문에 열중하는 기이한 선비! 이로 보아 그는 세속의 명예나 부귀 따위에 관심이 없을 터, 고매하고 청렴한 정신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하여, 다른 데서 그를 찾으면 철신이 다 닳도록 온 대지를 다 누비고 다녀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소박하고 평이한 생활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생활은 사람들이 아무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만은 이런 생활을 편안하게 즐긴다. 물론 이곳은 욕망과 욕심이 들끓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어지러운 이곳에서 이렇게 소박하게 생활하는 이 사람야말로 진짜 나로 돌아갔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진짜 나는 저 멀리, 혹은 저 바깥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잘 것 없는 여기 이곳이야말로 진정 특별한 곳이라는 이 기문은 웃기면서, 뭉클함을 안겨준다. 해학이 살아있는, 이 문장이 진정 혜환스러운 글처럼 느껴진다.  

금강산은 명성이 드높아 거마탄 자들이 답지(遝至)하므로 먼지와 오물이 날마다 쌓여만 갔다. 정유년 가을 8월, 하늘이 큰비를 내려보내 한번 금강산을 씻어내자 본래 자태가 그제야 드러나게 되었다. 

글 잘하고 기이함을 좋아하는 선비 신문초(신광하)가 그 소식을 듣고 길을 떠난다. 이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이전에 본 금강산은 병든 모습에 땟국 절은 낯짝이요, 이제 볼 금강산은 세수하고 몸단장하여 의젓하게 손님을 맞는 때다. 문초가 바로 이 때에 유람하니 다행이로다!

문초가 동해로 떠나는 때는 바로 나란 안의 자격 갖춘 선비들이 과거보는 그날이다. 이는 또 仙人과 凡人이 다른 길을 가는 갈림길이다.

-「송신문초유금강산서(送申文初遊金剛山序)」, 같은 책, 257쪽


이 글은 혜환이 금강산으로 떠나는 신문초와 전별하면서 쓴 산문이다. 신문초는 문인 신광하다. 신광하는 금강산 일대, 설악산 일대를 유람하고 동유기행, 풍악록 등을 남겼다. 이때 당시 금강산 유람은 하나의 유행이었다. 문인이나 벼슬아치들이 한번쯤 다녀오는 곳이자 꿈꾸는 곳이 금강산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발길로 금강산은 어지럽고 더럽혀졌다, 그런데 신문초가 가려는 즈음 큰 비가 내려 모든 더러운 걸 씻어준다. 신문초가 청렴한 고사(高士)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으리란 건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 표훈사도> 숙종, 영조때의 화가 최북이 그렸다.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신문초가 출세에 연연하는 인물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보는 날, 문초는 금강산으로 떠난다. 문초의 지향이 어디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인품과 지향을 이렇게 기습적으로, 이렇게 간결하고 분명하게 드러내기는 어려운 법. 혜환의 이 치고 빠지는 기술은 절묘하기 짝이 없다. 과거보는 날 금강산으로 떠나는 문초는 실로 범인이 아니라 선인이다. 세속의 가치에 저항하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다. 세속의 가치를 추수하지 않고 돌아서면 된다. 그 순간 나는 진짜 나로 돌아갈 수 있다. 나로 돌아가기 신공, 그것은 순간의 일이다. 혜환은 그걸 높이 샀다. 


이 글은 모두 106자로 이루어졌다. 짤막한 글속에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간이함 속에 구체를 살린 글. 글이 의미 심장하고 묘미가 있다. 그래서 기궤하다. 도덕을 말해서가 아니라 삶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하나만 더 보자. 진짜 나로 돌아가는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활기 넘치는 서울 경내에서 성문을 지나는 수많은 발걸음 중에 오는 사람은 있어도, 가는 사람은 없다. 혹시라도 가는 사람이 있다면 좌천당하거나 쫓겨나는 사람뿐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그칠 줄을 알아 물러나는 것을 좋아하는 군자이니,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평창 이공은 젊어서 조정에서 벼슬을 하여 위계를 쌓아 정헌에 이르렀고,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지금 늙은 것을 고하고 소성(인천시에 속한 지역)의 옛집으로 돌아간다.

대저 시속에 휩쓸리는 자들은 세상의 사물에 얽매인 바가 되지 않으면, 조물주에게 휘둘림을 당한다. 오직 얽매이지 않고 휘둘리지 않으면서 스스로 주인이 되어 스스로 운행을 하는 자는 바로 정심(定心)과 정력(定力)이 있어서이니, 공이 바로 그런 분이다.…요천에서 양치질하고 송화를 먹으면 몸은 더욱 강령해지고 기는 더욱 왕성해질 것이니 또한 장차 재상인데다가 신선이 될 것이다.

-「봉송지중추이공귀인주서(奉送知中樞李公歸仁州序)」, 같은 책, 45쪽


어떤 시선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족하는 삶. 쉽지 않은 일이다.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기는 쉬워도 때를 알아 자발적으로 물러나기는 힘들다. 그런데 지중추 이공은 벼슬은 그만두고 인천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글에서도 혜환은 지중추 이공의 행동이 얼마나 특별한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서울 경내의 성문에는 오는 사람은 있어도 나가는 사람은 없다’는 한 구절로 다 표현해버렸다. 벼슬자리의 수직상승에서 자발적으로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다. 그런 중에 한 사람이니, 얼마나 특별한가? 


혜환이 보기에 벼슬을 하느냐 안하느냐를 따질 필요는 없다. 수직상승의 끝 모르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면 적어도 그런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시속에 휩쓸리지 않고 벼슬자리에서 때맞춰 내려오는 행위만으로도 진짜 나로 돌아갈 수 있다. 그 진짜 나의 삶이 곧 신선의 삶이다. 신선은 불로장생의 비법을 닦거나 단약을 먹어야 되는 존재가 아니다. 벼슬자리에서 돌아서는 순간, 이공은 신선이 된다. 근심, 걱정이 없으면 신선이 아닌가? 이처럼 신선과 범인은 실로 한 끝 차이다.  


혜환은 촌철살인, 아주 짧은 문장으로 우리들에게 삶의 이치를 깨우쳐준다. 그리고 용기도 준다. 진짜 나로 돌아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과거보는 날 금강산으로 떠나고, 알맞은 때 벼슬자리에서 내려오는 일처럼, 아주 쉽다. 단지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렵게 느끼고, 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이는 진짜 나를 추상의 저 너머에 잡아두기 때문이며 특별한 어떤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진짜 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옥에 떨어진 그 때가 성불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즉 욕망이 들끓는 그 자리가 진짜 나로 가는 지름길이다.  


불경에 이르기를, “천당은 즐겁고 즐거워서 고통이 다하면 취미가 생기므로 그 성불하기가 어렵고, 지옥은 괴롭고 괴로워서 그 마음의 발함을 극진히 창도하기 때문에 그 성불이 쉽다”고 하였다. 만약에 그것이 쉬운데도 쉽게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

- 「이제(姨弟)인 이우경에게 주는 서문(贈姨弟李虞卿序)」, 『혜환 이용휴 산문전집(하)』, 158쪽


혜환에게는 글쓰기와 삶이 별개가 아니었다. 글쓰기에서 전범을 거부하는 것은 세상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글을 모방하는 문제는, 생각을 모방하고, 삶을 모방하는 문제와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글은 우리들의 인식이자 세계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니 남과 똑같이 글을 쓴다면, 세상을 똑같이 보고 똑같이 해석할 게 뻔하다. 혜환에게 그 누구도 아닌 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문장을 바꾸는 일이자, 삶을 바꾸는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의 목소리와 나의 사유를 담는 문장을 쓰면, 삶에서도 나의 목소리와 나의 사유대로 살 수 있다.  글과 삶이 이렇게 연동될진대 혜환을 단순히 기궤함만 추구하는 문장가로 보기 어렵지 않겠는가?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上 - 10점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소명출판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下 - 10점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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