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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

공자 가라사대, 부자 말고 군자가 될 것!

by 북드라망 2012. 1. 16.
즐거운 학문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를 펼치면 처음 나오는 문장이다. 공부하는 게 괴롭기만 하고 친구를 만나면 지 자랑만 해서 아니꼽고 왜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지 소주로 쓰린 속을 달래야 했던 우리가 반드시(!) 멀리해야 할 문장이다. 더구나 어떻게 공부하면 기쁜지 어떤 친구를 만나면 즐거운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언반구도 없는 아주 불친절한 문장이다. 첫 문장부터 이 지경이니 벌써 책 덮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다. 실제로 이 문장에 막혀서『논어』를 덮어 버리고 “子曰”만 기억하고 있다는 한 후배의 심경토로가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그런데『논어』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 문장이야말로 인생의 연륜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건 또 뭔가. 이 문장에 우리가 모르는 대단한 것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인가. 일단 문장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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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학’(學)이란게 뭔지, ‘습’(習)한다는 게 뭔지, 우리가 흔히 친구라고만 생각하는 ‘붕’(朋)이란 뭔지, ‘군자’(君子)란 놈은 뭐하는 놈인지 등등. 이거 다 이야기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왜냐고? 정말 이 문장만큼 공자의 삶 전체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문장도 없으니까. 70대 노인의 삶을 한 큐에 정리해 버린 문장이니 그 인생을 풀어 내자면 얼마나 많은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단 가볍게(?) 學 먼저 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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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은 공자에 의해서 생명력을 얻은 글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공자 이전에는 배우는 거[學]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본성대로 살아감을 목표로 하는 도가 쪽에서는 學이야말로 사람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대세였다. 열나게 학습지 풀고 학원 다니고 코피 터지도록 공부 안 해도 먹고살 만했다는 말이다. 따지고 들자면 우리가 지금 이토록 극심한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이유, 다 공선생님 때문이다.^^ 그런데 다들 관심조차 없던 學에 왜 공자는 일생을 바쳤을까. 도대체 왜?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자는 배워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공자는 그렇게 살다 죽는다. 설이 분분하긴 하지만 공자는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인물이다.(공자 햇빛 잉태설도 있다^^) 그런데 이때 공자는 공부하겠다는 발심(發心)을 낸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춘추시대(B.C 7~3세기)에 후달리는 태생적 스펙과 환경이라면 그냥 대충 살다 가자고 마음먹을 법도 한데 공자는 공부한다. 사실 이게 감동 그 자체다. 한 존재에게 부과된 삶의 조건이 뭐가 되었든 ‘그 자리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겠다는 마음. 허나 기죽진 말자. 공자도 처음부터 이 마음으로 공부한 건 아니니까.

일단 공자도 먹고살기 위해서 열나게 알바를 뛰어야 했다. 젊은 시절 창고지기나 목장지기 같은 허드렛일을 하면서 공자는 많은 기술을 익혀 둔다. 그걸 자산으로 어느 정도 생계가 안정되자 본격적으로 배움의 길을 떠난다. 더 대단한 건 그런 ‘배움의 길’을 평생 동안 걸어간다는 거. 배우는 일 자체를 즐긴다는 거[好學]! 취업만 돼 봐라 공부 당장 때려치운다는 말이 목구멍 밑까지 차오른 우리와는 천지차이인 셈이다. 공부를 통해 밥 벌어먹는 거 빼고는 그 어떤 삶의 비전도 갖지 못하는 시대. 공부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헌데 공부해서 세상의 그 어떤 제약도 개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만큼 기쁜[說] 일이 또 있겠나(흥분하면 말이 좀 거칠어진다. 이해하시길). 공자가 칠십 평생 항심(恒心)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기쁨 때문이다. 공부해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 學은 이 삶의 환희로 가는 입구다.

學에 대해서는 차차 자세히 알아가기로 하고 時習의 문제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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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서 時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學而時習之의 맛이 확 달라진다. 時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해석은 ‘가끔’. “배우고서 가~끔 익히면 정말(!) 기쁘지 아니한가!”(나의 스승님 왈, “골치 아프게 뭘 만날 배워~”^^)


보통은 ‘때때로, 때에 맞게’로 해석한다. 그런데 ‘때때로’보다는 ‘때에 맞게’로 해석하는 게 더 맛있다. “배우고서 때에 맞게 익힌다.” 때에 맞게 배우고 때에 맞게 행동하고. 사실 이거 쉽지 않다. ‘때에 맞게’ 한다는 건 그 상황의 핵심을 틀어쥐고 거기에 맞춰서 배우고 행동하는 건데 웬만한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여자 친구 얼굴을 보고 그날 컨디션과 감정 상태를 바로바로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쥐어 박히기 십상이다. 그저 지내 온 대로 익숙한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매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갑자기 웬 연애학개론?^^) 아무튼 時는 시공간의 중심을 장악하고 거기에 적절히 대응하는 삶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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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習. 習은 ‘익히다’라는 뜻이다. 글자의 윗부분은 깃 우(羽)이고 아랫부분은 흰 백(白)이다. 왜 이게 ‘익히다’라는 뜻이냐고? 알고 보면 재밌다. 모든 새는 태어날 때 모두 흰 색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자라면서 점점 자기 색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새들이 하얀 색 털을 벗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날갯짓을 익히는 일이다. 날지 않고서는 새가 될 수 없는 법(그럼 닭인가). 그러니 習이란 ‘새 새끼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을 이르는 글자다.

북송5자 중에 한 사람인 정이천*은 이 習을 ‘배운 것이 내 몸에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즉 배운 걸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가 바로 習이다. 우리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복습(復習)과 예습(豫習) 다 여기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習도 만만치 않다. 단순히 복습해서 익히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경지까지 밀고 나가는 게 곧 習이다. 새가 나는 것으로서 그 존재를 표현하듯 우리는 아는 것[學]을 행동하는 것[習]으로 표현한다.

* 정이(程頤, 1033년~1107년)는 중국 송나라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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朋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친구와는 좀 다르다. 그저 속상한 일이 있으면 쪼르르 달려가서 서로 위로해 주고 소주 한 잔 걸치면서 거칠게 세상을 씹어 주시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같은 뜻을 품은 동지이면서 삶의 비전을 함께 나누는 친구가 朋이다. 구체적으로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친구를 말하기도 한다.

友와도 좀 다르다. 友는 쉽게 말해서 불알친구급으로 나를 알아주는 친구, 곧 지기(知己)를 뜻한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알겠지만 朋이건 友건 만나기 쉬운 게 아니다. 그런 친구 한 명이라도 있는 게 복일 정도다. 다 지 잘났다고 난리치는 놈은 있어도 너 잘 났다고 말해 주는 놈도 별로 없다. 또 자기 어려울 때는 달려와서 온갖 수다를 다 떨다가 나 어려울 때는 외면하기 일쑤다.(여기서 인간관계 다 탄로나는군^^) 우리 시대의 우정은 그야말로 ‘이기적 유전자’인 것.

그러나! 공자에게 朋은 다른 삶을 지향하는 자들의 연대다. 특히 같이 공부하고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인 공자 학당에서 우정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어디 모여서 공부하고 같이 산다는 게 쉬운 일이던가. 모여 살다 보면 온갖 일이 다 생긴다. 서로 얼굴 붉힐 때도 있고 생각이 달라 헤어져야 할 때도 있다. 이때 그 문턱을 넘어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단연 우정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문턱이 되어서 강하게 훈련받는 게 목적인 공자의 공동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진심으로 말해 주고 잘 인도하되 불가능하면 그만두어서 스스로 욕되게 하지 마라.’ 즉, 피 터지게 싸우고 열나게 갈구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단호하게 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친구를 대하라. 이건 뭐 가히 전투적이다. 그러나 벗을 내 삶의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벗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찾아오면 또한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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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君子란 놈은 어떤 놈이기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존재인가. 사실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 봤을 君子/小人은 계급적 구별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君子는 지배계급, 小人은 피지배계급. 그런데 공자는 이것의 ‘용법’을 달리해 버린다. 쉽게 말하면 君子는 자기 자신을 다스려서 타인에게 덕을 베푸는 존재인 반면 小人은 그저 자기만 아는 존재다. 이렇게 용법을 달리하는 순간 단순히 지배계급이면 다 君子가 되던 황홀한 시대는 자취를 감춘다. 지배계급도 자기 욕심만 챙기면 小人으로 전락해 버리는 배치의 전환. 공자가 평생 위험한 지식인으로 낙인찍혀서 권력으로부터 외면받았던 이유도 이거다. 기존의 관행을 죄다 뒤흔드는 지식인. 어느 시대나 이런 지식인은 권력의 기피대상 1호가 아니던가.

그런데! 사실 군주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공자도 ‘쪼끔’(^^) 승질냈다. 제자인 자공이 좋은 값에 선생님을 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공자는 서슴없이 ‘팔아야지, 팔아야지’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정치에 나가서 세상을 바꿔 보고 싶다는 강력한 포부를 지녔던 것. 그러나 위험한 지식인인 공자에게 누가 관직을 주겠는가. 관직을 얻는다 해도 실질적인 권력은 없는 명예직이 대부분이었다. 세상을 바꿔 보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의 부재. 이때 왜 날 알아주지 않느냐고 세상을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후학들을 기르며 자신의 일상을 묵묵히 지켜나간다. 책을 보고 아무리 미천한 출신의 제자라도 자기가 아는 모든 걸 다 가르쳐 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봐주지 않아도 자기 길을 가는 것. 공자에게 군자란 자신이 믿는 바로 세상과 맞짱 뜰 수 있는 깡다구 좋은 인간유형인 셈이다.(이 문장에서 온(慍)을 쓴 것도 참 재밌다. ‘온’은 겉으로는 화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엄청 화를 낸다는 뜻이다.^^)

이제 퍼즐을 맞춰 보자. 배워서 그것을 때에 맞게 사용하는 지혜로 만들고 아는 게 곧 내 삶이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건 오롯한 삶의 ‘기쁨’이 아닌가. 뜻을 같이하고 삶의 마디를 함께할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면 그가 곧 군자가 아닌가. 學, 朋, 君子. 공자가 평생 화두[學]로 삼고 평생 함께 했고[朋] 그런 존재[君子]가 되겠다고 꿈꾼 문장. 아니 그렇게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문장. 아마도 이 문장의, 이 삶의 힘 때문에 과거에 숱하게 실패하고서 선비들이 공부를 접지 않고 계속해 나갈 수 있었으리라. 요즘처럼 공부해서 혼자 부자(군자와 이름은 비슷하다^^) 되는 게 유일한 삶의 목적인 시대에 공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강렬하다. 2500년 동안 공자와 같은 길을 가려고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적인 삶도 느껴진다.『논어』첫 문장, 그건 곧 공자의 삶이면서 동시에 공부하는 모든 존재에게 ‘스승’이 건네는 훈훈한 덕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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