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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데리다, 타자의 출현

by 북드라망 2014. 7. 9.


타자의 출현 : 불가능성으로서의 유령



만약 그것,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단지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삶 속에서만도, 죽음 속에서만도 아니다. 둘 사이에서,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와 같이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은 어떤 환영과 함께함으로써만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어떤 환영에 대해서, 어떤 환영과 함께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혼령들(esprits)에 관해 배워야 할 것이다. 비록 그리고 특히 이것, 곧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록 그리고 특히 실체도 본질도 실존도 아닌 이것이 결코 그 자체로 현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는 법을 배우기’의 시간, 현존하는 교사가 없는 시간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귀착되는데, 머리말이 우리를 여기로 이끌어 오고 있다. 곧 유지하기/대화하기 과정에서, 동행이나 견습 과정에서, 환영들과의 교류 없는 교류 과정에서, 환영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다르게, 더 낫게 살기, 아니 더 낫게 살기가 아니라 더 정의롭게 살기. (…) 그리고 이러한 유령들과 함께 존재하기는 또한, 단지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기억과 상속, 세대들의 정치인 것이다. 

-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12쪽.


데리다는 사는 법을 오직 타자로부터,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복잡한 문장을 보면, 데리다에게 ‘사는 법’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사는 법’이란 지금보다 더 윤택하게 사는 법을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말하는 ‘사는 법’이란 지금과 다르게 사는 것, 그리고 정의롭게 사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타자와 함께 살아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만일 타자와 관계가 어긋나면(out of joint), 우리 자신도 함께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의롭게 산다고 할 때, 그 ‘정의’는 곧 ‘타자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자크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텔레비전에 관하여』, 김재희, 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56쪽) ‘타자로서의 타자’로 경험한다는 말도 결국 타자를 폭력적으로 내 안에 합체하지 않고, 타자 자체로 존중하며 정의롭게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법’이란 어긋난 것을 바로잡고 정의롭게 사는 법이다. 만일 어긋나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살던 대로 살면 되니까. 어찌 보면 ‘어긋남’이야말로 타자로서의 타자에게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오로지 타자와 관계가 어긋났을 그 순간에야, 비로소 타자는 배워야 할 것과 함께 출현한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과는 다르게 살기 위해서 삶을 배우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배움 자체가 타자와의 관계 맺기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타자와 함께 살아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 ‘타자로서의 타자’로 경험한다는 말도 결국 타자를 폭력적으로 내 안에 합체하지 않고, 타자 자체로 존중하며 정의롭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지금까지 죽어간 사람들이 만들고, 남겨놓은 유산을 상속받아야 살 수 있다. 살아있는 나는 죽어간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돌아가신 조상 덕에 산다. 또한 동시에 이런 문화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후손들에게 상속시켜야 할 책임도 가진다. 따라서 이미 죽은 존재자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는 존재자들과 모두 정의롭게 관계를 맺어야 한다. 유산을 상속받는데 소홀해서도 안 되고, 유산을 상속하는데 무책임해서도 안 된다. 예컨대 생태학적인 잘못(원전사고 등)을 저질러 미래 세대와의 관계를 정의롭지 않게 맺어서는 안 된다. 이때 타자는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유령처럼 출현하여 우리와 관계 맺는다. 그것들은 이미 죽었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런 사물로서 애초부터 유령적이다. 우리는 그런 환영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긴 인용문에서 데리다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죽음)으로부터 배우고 있으며, 또 그것이 언제나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애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처럼 자아 어딘가 지하 납골당에 매번 안치될 타자들(예컨대 조상들)은 결코 그 자체로 현전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죽음 이후라서 현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불가피하게 환영의 형태로서만 우리 앞에 (재)출현하게 된다. 


결국 유령은 죽음 이후에 (재)출현한 우리들의 타자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타자는 유령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기억해야 할 것과 상속해야 할 것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만, 다시 말하면 ‘세대들의 정치’로서만 (재)출현한다. 정치 없는, 상속 없는, 기억 없는 “유령의 출현”은 발생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은 상속할 것을 가지고 있는 타자이다. 만일 상속할 아무것도 보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령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정의를 위해서 출현한다. 그런 유령은 우리와 관계 맺을 아무런 것도 없기에, 자신을 드러내어 출현시킬 아무런 이유도 갖고 있지 않다.

 

이처럼 유령은 불가능성으로서, 하지만 하나의 상속해야할 것을 지닌 것으로서만 출현한다. 데리다는 이를 가지고 맑스주의의 재출현을 설명한다. 만일 ‘당·국가 체계로서의 맑스주의’(구 소련식 사회주의)가 사라졌거나, 한계에 봉착했음(맑스주의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유령들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맑스주의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것이 상속해야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이미 ‘가능한 것’으로서, 그래서 이미 현실적 제도의 교조적 프로그램으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상속해야할 그 무엇도 찾을 수 없게 된다. 해체는 결코 가능한 어떤 것으로 현전화되지 않는다. 해체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어떤 경험이다.(자크 데리다, 『프시케:타자의 발명들』 Psyché: Inventions de l'autre, 한국판 『법의 힘』, 문학과지성사, 74쪽에서 재인용) 그것은 언제나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서만 출현한다. 그래서 불가능성으로서의 유령이다. 그것 자체가 불가능성의 출현인 것이다. 



글.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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