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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18c 조선지식인 생태학

남인백수 1세대, 성호 이익이 사는 법 ②

by 북드라망 2014. 6. 10.

남인백수 1세대!

성호 이익, '절용'과 '실용'을 사유하는 산림학자!




남인 백수 1세대, 성호 이익이 사는 법 ②


3. 안빈(安貧)과 자족(自足)


김득신 <귀거래도(歸去來圖)>김득신 <귀거래도(歸去來圖)>

"나는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재물이 없음을 일컬은 것이니, 재물이란 부지런히 힘쓰는 데서 나오는 것이며,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란 어릴 적부터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익, 『성호사설』, 「食小」



책만 읽는 선비는 가난하다. 녹봉도 받지 않고 생산하는 일에도 종사하지 않으니 가난하게 사는 건 당연하다. 독서 자체는 아무런 생산의 힘이 없으니 선비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선비들이 독서를 통해 글을 생산하는 경우야 다반사지만 글로는 먹고 살 수 없었다. 그러니 18세기 조선 땅에서 문장으로 먹고살려면 관직 아니고는 길이 없었다. ‘상업적인’ 전업 작가의 길이 열리기 전, 책 읽고 글 쓰는 일은 선비의 주업이지만 생업의 기능을 전혀 부여받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호 이익에게 선비는 책을 읽고 글을 쓰더라도 무위도식하는 자에 불과했다. 성호는 자기 시대 선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성호가 살았던 이때, 연구가 돈이 되고 글쓰기가 생업이 되는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하여, 성호의 시대는 선비로 살기가 참으로 애매했다. 선비로서 사회적 책무를 망각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선비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는 그런 때였다, 권리는 없고, 무한 책임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가 선비였던 것이다.


성호는 다행히도 물려받은 땅이 조금 있어 몇 섬의 쌀을 받아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섬의 쌀마저도 농민들의 노동력에 의지하여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선비는 그렇게 무능한 존재다. 독서는 한사(閑事)인지라 노동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건 어불성설. 성호는 이렇게 생각했다. 넉넉지는 않아도 자급자족했다면 떳떳했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하여, 늘 농민을 의식하며 살았다. 농민들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는 가난한 생활에 대해서도 자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선비의 삶이 비록 가난하지만 부지런히 일하는 농민들에 비하면 얼마나 편안한가? 찌는 무더위에 괴로워 부채질을 연신하지만, 땡볕에서 일하는 농민을 떠올리면 좁은 초가집조차 감사할 밖에. 또한 굶주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시절에 주리지 않는 것이 곧 배부른 것과 같은 법. 소박한 음식만큼 맛있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성호는 실로 안빈하고 또 자족했다.   


온몸에 종일토록 땀이 줄줄 흘러내리니 / 渾身竟日汗漿流

부채질이 제일 좋은 것 잠시도 쉬지 않는다 / 揮扇功高不暫休

여름 들판의 일꾼들 고생에 생각이 미치니 / 想到夏畦人正病

초가집 비록 좁아도 괴로워하지 말아야겠네 / 茅廬雖窄亦寬愁  - 「혹심한 더위」 2수


숙맥을 내가 변별할 줄 아노니 / 菽麥吾能別

때를 만나니 곡식 풍년이 즐겁구나 / 逢時樂稔豐

좋은 음식은 얻음에 운명이 있고 / 肥甘求有命

담박한 음식은 그 맛 다함이 없어라 / 淡薄味無窮

편안하려면 모쪼록 애써 일해야지 / 欲逸勞須作

주리지 않으면 배부른 것이나 같네 / 非飢飽與同

한 번 보리타작 노래를 부르노니 / 一回歌打穀

장참에게 모든 공로를 돌리노라 / 長鑱付全功  -「보리타작」 4수


존재 자체가 민폐인 선비. 이런 처지를 알면서도 선비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가난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것. 아무런 생산도 하지 않으면서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는데, 여기에 더해 부자까지 되려고 한다면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그러니 백수 선비의 생활 윤리는 안빈(安貧)이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가난은 자유를 얻은 대가인 셈이므로. 그러니 가난을 원망할 일도 사회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4. 식소(食小), 매 끼니 곡식을 줄이자!


성호는 절용과 검소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매뉴얼로 매 끼니마다 한 홉씩 줄여 먹기를 제시한다. 이것은 가난한 선비가 자신을 지키고, 사회에 대해 최소한의 책무를 담당하기 위한 분투에 다름 아니었다.


성호는 자족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무위도식하는 선비로서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성호는 지극히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선비의 생활 윤리를 만들어냈다. 생산을 못할뿐더러, 일 년에 들어오는 수입이 한정되어 있다면 지켜야 할 것은 뻔하다. 아끼고 검소한 것 외에 더 무엇이 있겠는가? 어찌 보면 소극적인 대응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성호는 이 방법 외에 다른 뾰족한 대안을 궁리할 수 없었다. 절용과 검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 방법이었다. 


빠듯한 살림살이 속에서, 식량을 절약하여 많이 먹지 않는 것으로 첫 번째 경륜과 양책을 삼고 있다. 한 그릇에 한 홉의 쌀을 절약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 도움이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루에 두 그릇을 먹으니, 두 홉이 절약된다. 한 집이 열 식구라면 하루에 두 되가 절약되고, 한 고을이 1만 집이라면 2천 말의 많은 식량을 저축할 수 있다. 더구나 한 사람이 한 끼에 한 홉 정도만 더 먹는 것이 아닌 데 있어서랴? 또 한 사람이 1년 동안 더 먹어치우는 식량이 모두 합하면 매우 많은 데 있어서랴? 헛되이 먹어치우는 것은 한 푼, 한 홉도 아까운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서 흰 죽을 먹는 것을 조반이라 하고, 한낮을 당하여 단단히 먹는[頓食] 것을 점심이라 한다. 부귀한 집에서는 혹 하루에도 일곱 차례를 먹으므로 술과 고기가 흥건하였고[淋漓] 진귀한 음식과 색다른 찬이 높이 쌓여서 그 하루의 소비로도 1백 사람을 먹일 수 있다. 하증(何曾)의 교일(驕溢)함이 집집마다 다 그러하니, 민생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는가? 한탄스러운 일이다.


나는, 일의 공효(功效)가 빠른 것은 굶주림을 참고 먹지 않는 것만 같음이 없다고 본다. 한두 번 굶는다 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굶는 데 따라서 한 되 두 되의 쌀이 불어나게 되는 것이다. 약간의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쌀이 떨어져 먼저 병든 사람과 비교한다면,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어떠하겠는가?  - 이익, 『성호사설』, 「食小」


성호는 절용과 검소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시하는데, 바로 매 끼니마다 한 홉씩 줄여 먹기. 우리가 보기에 눈물겹고 짠하지만 이것은 가난한 선비가 자신을 지키고, 사회에 대해 최소한의 책무를 담당하기 위한 분투에 다름 아니었다. 성호는 재물 중 곡식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하루에 두 그릇의 밥은 입이 있는 자는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데, 저마다 노력을 다한 데서 얻어진 것만은 아니므로, 재물이란 항상 모자라고 없어지는 것이 걱정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농사에 전념한다면 식량이 모자랄까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제한된 사람의 노동력에 의해 곡식이 재배된다. 그러니 놀고 먹는 처지에 한 끼 한 홉을 덜어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하루에 두 끼만 먹고, 한 끼마다 한 홉씩을 덜어내면 적어도 굶주릴 걱정은 없다. 자칫 굶어 죽기 십상인 현실에서 약간의 굶주림을 견디면 적어도 기근 때문에 병들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저축한 곡식으로 굶주려 죽는 이를 구제할 수도 있다. 가만히 앉아서 밥만 축내는 선비로서 이 정도는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성호는 밥도 떳떳이 양껏 먹지 않았다. 한 톨의 쌀알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한 순간도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다.  



5. 콩죽 먹고 절약하기!


"빈천은 근검을 낳고 근검은 부귀를 낳으며 부귀는 교만과 사치를 낳고 교만과 사치는 빈천을 낳으니,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말한다." - 이익, 『성호사설』, 「빈천생근검(貧賤生勤儉)」 


이 윤회의 고리를 끊으려면 가난할 때 당연히 근검해야 하고, 부자일 때도 근검해야 한다. 성호의 논리대로, 검소하지 않으면 사치한 것이고 사치하면 분수를 넘게 되고 분수를 넘으면 바로 죄에 빠진다. 사치는 점점 더 탐욕을 키워 나가는데, 성호는 사치로 죄에 빠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합리적인 소비를 외치는 21세기에 무조건 절약, 무조건 검소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성호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궁상처럼 느껴질 정도다. 


콩은 가장 흔하지만 기근을 구제하는데는 콩만한 것이 없다.


곡식 중에 중요한 것이 세 가지로 벼와 보리와 콩인데, 콩은 가장 흔하지만 기근을 구제하는 데는 콩만 한 것이 없다. 『춘추(春秋)』에서 벼가 익지 않거나 보리가 익지 않으면 기록하였으니 그를 민망히 여겨서요, 서리가 내리되 콩이 죽지 않으면 기록하였으니 다행으로 여겨서이다. 벼가 다 떨어지고 보리가 없으면 봄에 무엇을 가지고 연명하겠으며, 보리가 마르고 콩이 없으면 가을에 의지할 바가 없으니, 이 콩은 가난한 살림이 살아 나갈 계책이다. 콩은 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죽이 가장 흔하다.


죽은 넉넉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으로, 맷돌로 갈아서 물을 넣어 끓여 양이 많이 불어나기를 바라는데 그 양을 따라 보면 삼분의 일이 더 늘어나서 20일의 양식으로 한 달 동안 먹고살 수 있으니 도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빈천한 몸이므로 반드시 사물 중의 천한 것을 택하여 종사하고 있다. 하루는 마을 내의 종족들을 부르고 집안사람에게 반상을 마련하라고 명하였는데 차림이 황두(黃豆) 한 종류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였다. 황두는 콩의 별칭이다. 콩죽 한 사발과 콩나물로 담은 김치 한 접시, 된장으로 만든 장물 한 그릇으로, 이름을 삼두회(三豆會)라고 하였다. 어른과 아이가 모두 모여서 다 배불리 먹고 파하였으니, 음식은 박하지만 정의는 돈독한 데에 무방하였다.


장차 이 모임을 드러내 밝혀서 자손들에게 남겨 주어 우리가 이처럼 검약을 잘했음을 알리고자 한다. 뒷날 비록 창고에 남은 곡식이 있다 할지라도 또 모름지기 정식으로 삼아서 1년에 한 번은 이런 모임을 마련하여 보름이나 열흘간 아침이나 저녁을 이렇게 먹어서 대대로 규범으로 삼도록 전하고 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이익, 『성호전집』. 「삼두회시 서문(三豆會詩序)」


어느덧 쌀이 지천인 시대에 살게 되었다. 쌀 한 톨이 귀하고 아쉽던 때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20세기에도 쌀밥보다는 잡곡 넣은 혼식을 권장했던 적이 있었다. 까마득히 그랬던 시절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 18세기에는 어떠했으랴? 서민들에게 쌀은 늘 모자라 쌀밥으로 배를 채우는 경우란 거의 드물었다. 게다가 쌀이 떨어지는 때도 빈번했으니, 서민들은 봄과 가을을 기근에 시달렸다. 간신히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작물이 있으니 보리와 콩이 그것이다. 보통 보릿고개는 알지만, 콩으로 가을을 난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성호 선비는 보리가 없으면 어찌 봄을 나며, 콩이 없으면 어찌 가을을 날지 걱정한다. 성호가 살았던 시절 콩은 잡곡이 아니라 쌀의 대체물이었다. 그래서 콩도 그냥 먹지 않고 죽을 해먹었다. 죽으로 식사하면 20일치를 30일로 늘려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김득신 「천렵도(川獵圖)」


일가 친지와 친구들이 모였을 때 곡식이 넉넉지 않으니, 성호는 콩으로 대접했다. 가난을 헤쳐 나가면서도 함께 나누는 정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아주 검소하고 단출하게 정을 나누었다. 콩죽에 콩나물 반찬에 된장국. 이름하여 삼두(三豆). 이렇게 먹는 모임을 일컬어 삼두회. 성호는 후손들에게도 제안한다. 창고에 남는 곡식이 있더라도 검약으로 가난한 시절을 헤쳐 나갔음을 몸으로 기억하라며 삼두회를 제안했던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친지들이 다 모여 열흘 정도를 함께 하면서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끼는 콩죽과 콩나물과 된장국을 먹는 모임. 검약을 몸에 새기는 훈련. 이 훈련을 통해 욕심 때문에 위태로움에 빠지거나, 당연한 것을 누리듯 교만해지기 쉬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종이로 이불을 삼는 것은 / 維紙爲衾

마공의 명시에 실려 있고 / 馬公銘詩

종이 이불로 염습하는 것은 / 周身庀斂

누군가 말한 바 있지 / 人或謂之

물건은 하찮아도 쓰임은 귀중하니 / 物薄用重

가난한 집에 적합하도다 / 貧室愜宜

나는 이것을 따를 것이니 / 我則遵焉

자손들은 알아야 하리 / 後嗣攸知   - 이익, 『성호전집』, 「종이 이불에 대한 명(紙被銘)」

  

성호는 절용과 검약을 죽을 때까지 실천했다. 명주나 삼베가 아니라 종이로 염하기. 가난한 선비에게 명주나 베는 사치품, 종이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선비로서의 자의식을 버리지 않았던 성호, 혼자서만 살 수 없는 이 세상이지만, 노동하지 못한 자로서 성호는 최소한만 먹고 걸치고 떠났다. 성호는 자신을 살게 해준, 타자들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무덤으로 가는 순간까지 지켜냈다. 


세상을 경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선비로서 최소한의 책무는 지키는 것.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 미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기 어려운 것을 성호는 아주 경건하고 아주 철저하게 지키고 갔다. 적게 먹고 소박하게 살기! 성호는 사람들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 실천만으로도 성호는 18세기 지성사의 성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18세기 선비의 현실을 직시하고, 선비의 윤리를 만들어낸 성호. 선비는 무엇으로 사는가? 혹은 선비,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대답이 궁금해진다.  



글. 길진숙(남산강학원)



김득신 「농촌풍일(農村豊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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