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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18c 조선지식인 생태학

남인백수 1세대, 성호 이익이 사는 법 ①

by 북드라망 2014. 5. 27.

남인백수 1세대!

성호 이익, '절용''실용'을 사유하는 산림학자!




남인 백수, ‘성호’ 선비가 사는 법 ①


자! 이제 남인계의 백수 선비,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을 만날 차례다.

성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자, 중농학파(重農學派)라는 분류 아래, 현실 개혁에 힘쓴 학자로 유명하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조선의 학자들 중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2)만큼 각광받은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세 학자는 봉건적인, 철저히 반근대적인, 실질은 없고 공리공론의 형이상학만 난무하는 조선에 실학이라는 하나의 광명을 비춘 존재들로 근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선에 내재한, 근대로의 행로[발전]는 바로 이 세 학자들 때문이었음을 얼마나 힘주어 변론했는가?


성호 선생의 사유는 근대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다만 당대의 제도를 탈주했을 뿐이다. <성호 이익의 친필 편지>


그렇지만 단도직입, 성호는 근대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고 결단코 근대를 사유하지도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 성과를 근대적이라는 틀 안에 가두기도 어렵다. 실학=반주자주의=반봉건주의=제도개혁=근대라는 표상은 근대 100년의 학문 좌표가 만들어낸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성호는 다만 형이상학의 공리공론을 탈주하고, 주자주의를 탈주하고, 당대의 제도를 탈주했을 뿐이다. 그 궁극의 꼭짓점이 반봉건, 근대는 아니었다. 주자주의의 탈주가 곧 반주자, 반유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요, 제도 개혁이 곧 반봉건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실용적인 사유가 곧 근대적이라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성호는 다만 18세기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 시대의 표상 안에 갇히지 않은 채 다르게 생각하며 다르게 살았을 뿐이다. 성호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유의미하다면, 18세기의 현실에서 자기만의 삶과 학문의 스타일을 만들어냈기 때문일 터이다. 근대, 혹은 실학이라는 개념으로 성호의 삶과 사유를 규정한다면, 성호가 고민한 지점과 18세기 지성의 구체적 생태학은 그 추상적 구분 속에 묻히고 말리라.   



1. 다산의 스승, 성호 이익


찬란도 할사 성호 선생이시여 / 郁郁星湖子

성ㆍ명으로 찬란한 글 지었네 / 誠明著炳文

아득해서 광막함을 근심하던 터에 / 瀰漫愁曠際

세밀히 분석한 것 보았네 / 芒芴見纖分

보잘 것 없는 나 늦게 태어났으나 / 眇末吾生晩

아득한 대도를 들었네 / 微茫大道聞

다행히 풍요로운 은택에 젖기는 했으나 / 幸能沾膏澤 

성운을 보지 못한 것 애석하네 / 惜未睹星雲

보장엔 남긴 향기 가득하여 / 寶藏饒遺馥

인자와 은혜로 사람들 구제했네 / 仁恩實救焚  (정약용,「서암강학기」)         


<다산 정약용> 다산은 성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해다. 성호를 통해 삶의 이치와 학문의 길을 터득했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의 뿌리는 성호 선생이었다. 성호가 죽은 다음 해에 다산이 태어났으니, 다산은 성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성호를 읽고 '대도'(大道)를 들었다는 다산. 성호를 통해 삶의 이치와 학문의 길을 터득했던 것이다. 맹자가 공자를 사숙했듯, 다산은 성호를 사숙(私淑)했다. 다산은 15살에 성호의 학행이 순수하고 독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호의 질손 이가환과 이승훈을 따라 성호의 저서를 공부했다고 한다. 성호의 제자들은 두 파로 나뉘는데, 서교[천주교]를 이단이라 배척했던 성호우파(공서파)와 서교를 수용했던 성호좌파(신서파)가 그것이다. 안정복, 윤동규 등을 성호우파, 권철신, 이가환, 다산 등을 성호좌파라 부른다. 이가환, 이승훈은 성호의 직계제자인 녹암 권철신에게서 수학했고 다산이 이들을 따라 녹암에게 배웠다.  


다산은 성호를 뵌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에 깊이 감화되어, 그의 저작들이 방치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리하여 다산은 금정(온양) 찰방으로 제수되었을 때, 그곳에 살고 있는 성호의 질손인 목재 이삼환을 비롯해 10여명의 학자들을 불러 모아 서암의 봉암사에 열흘 동안 머물면서 경전을 강학하고, 성호의 『가례질서』를 교정·정서하는 등 성호 학문의 전승을 위해 애를 썼다. 이들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함께 시냇가에 나가서 얼음을 깨고 샘물을 떠서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였으며, 낮에는 성호의 저서를 교정하고, 저녁에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가 소요(逍遙)하면서 풍광을 즐기고, 밤에는 학문과 도리를 강론했다고 한다.(정약용, 「서암강학기」, 『다산시문집』) 다산과 그의 동지들은 경건한 자세로 성호의 저서를 강학하고 전수했다. 이들은 성호의 학문만 전수한 것이 아니었다. 성호의 삶의 태도와 학문의 스타일까지 익히고 실천했다. 


성호는 18세기 지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18세기 남인 학맥의 구심점으로 남인 지식인들의 삶과 사유의 전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성호의 삶과 학문의 스타일을 계승한 이들을 우리는 성호학파라 부른다. 성호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의 학문과 사유와 글쓰기와 삶의 방식들은 성호의 자장 안에서 탄생했다. 연암과는 다른 방향에서의, 다산의 독보성은 성호와 성호학파의 움직임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다산이 성호보다 훨씬 방대하고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남인들을 묶어주는 학맥은 다산학이 아니라 성호학이었다. 남인지식인들의 학맥을 다산학파라 이야기하지 않고 성호학파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호는 그의 생활방식과 학문적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일군의 계승자들을 만들었지만, 다산은 하나의 흐름을 만들지 못했다. 성호는 다산을 비롯한 남인 지식인들의 삶과 학문에 기원과 같은 존재였다. 다산은 성호학을 나침반 삼아 다산학이라는 독보적 성취를 일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남인지식인들에게 또 다른 출구가 되지는 못했다. 다산은 성호학의 집대성이자 완성으로 성호학파의 문을 닫는 역할을 했다. 성호는 남인들에게 선비라는 존재가치와 선비의 사는 법을 새롭게 제시한 기원이자 하나의 출구였다.      




2. '선비', 무위도식의 다른 이름



형의 죽음과 처사의 길


경술환국 후 성호의 형 이잠은 국문을 당하던 중 죽음을 맞는다. 이에 성호는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처사로 살면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길을 택한다. (그림 : 김득신 <대도도>)

송시열, 김수항을 중심으로 한 서인과 윤선도, 허목, 윤휴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의 대결은 남인 성호의 삶에도 커다란 변전을 가져왔다. 1659년의 기해예송, 1674년의 갑인예송을 거쳐 1680년의 경신환국! 남인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로 남인들이 출척되고 윤휴, 허적, 허견,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은 사사되었다. 서인들은 정계 복귀. 이때 성호 아버지 이하진은 허적을 두둔하다 유배되고, 성호의 둘째 형 이잠은 방외인을 자처하며 떠돌게 된다. 그러다 1689년의 기사환국! 송시열이 경종의 왕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올린 결과 숙종이 분노하여 서인들을 쫓아내면서 송시열과 김수항은 사사된다. 이 결과 농암 김창협은 관직에 오르지 않고 포의로 살면서 산수기행과 글쓰기에 전념했다. 


1694년의 갑술환국! 숙종은 민비 복위운동을 벌인 서인 김춘택과 소론 한중혁의 손을 들어주고, 장희빈을 사사한다. 장희빈을 옹위한 남인들은 대대적으로 출척당하고, 정계 진출 길이 완전히 끊긴다. 이 사건들을 겪으며 성호의 형 이잠은 1706년 노론계 김춘택(金春澤)의 처벌과 국정 쇄신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노론계의 반발과 숙종의 분노를 사 국문을 당하던 중 죽음을 맞는다. 그 결과 남인계의 젊은 성호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처사로 살면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일하지 않는 선비는 좀벌레?


성호는 경기도 광주 첨성리(안산)에서 평생을 살았다. 아버지가 유배갔던 시절 이후,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던 이곳에서 독서자로서, 농민으로서, 교사로서, 경세학자로서의 삶을 일구었다. 그렇지만 성호는 선비로서의 생활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호가 처사로서 살면서 가장 절실하게 고민한 것은 '책만 보는 선비'라는 자의식이었다. 성호를 하나의 변곡점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학문적 업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선비'라는 존재의 가치를 고심했기 때문이다. 성호는 '선비'의 실체를 어떤 아우라도 덧씌우지 않은 채 솔직하게 바라본 18세기의 첫 주자였다.  


열흘 동안 준비한 비가 하루아침에 내리니 / 經旬養雨一朝行

금세 물이 가득한 도랑과 밭두둑 앉아 보노라 / 坐見溝塍倏已盈

도롱이 삿갓 쓴 사람마다 모두 생각이 같고 / 蓑笠人人同意思

쟁기와 호미 들고 곳곳마다 저마다 일하누나 / 犁鉏處處各功程

하늘이 백성 불쌍히 여겼구나 함께 노래하면서 / 天應閔下謳吟協

농사일 때 놓칠까 촌각을 서둘러 논밭에 나간다 / 事怕違期分刻爭

나만 홀로 사지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못하니 / 獨我不能勤四體

집안에 앉아 음식 대하매 먹고 사는 게 부끄럽네 / 帲幪對食愧生成  (「농가의 반가운 비 8수」 중 1수) 


성호는 독서만 하는 선비의 생활을 떳떳하게 여기지 않았다. 농민들이 촌각을 다투며 일하러 나갈 때, 문득 홀로 사지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음식만 축내는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곤 부끄러워했다. 성호는 이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온 종일 글만 읽고, 한 올의 베나 한 알의 쌀도 자신의 힘으로 생산한 것이 없으니 어찌 이 세상의 한 마리 좀벌레가 아니겠는가, 하는 자책이 마음 한켠에서 떠나지 않았다. 


성호는 18세기 선비의 생활이 옛날 군자의 삶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성호의 진단인 즉슨 독서만 하는 선비는 편안히 앉아서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남들이 힘써 생산한 것을 빼앗는 존재다.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입만 먹으려 하니 벌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옛날의 군자는 지금의 선비들과 차원이 달라서 앉아서는 도를 논하고, 일어나서 일을 집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군자의 역할은 부지런히 힘써서 곡식을 생산하는 것과 그 공로가 같으므로 비록 많이 먹어도 유감이 없다. 



성호 선생은 당대의 선비들이 서인들의 노동으로 살아도 될 만한 그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비는 그저 무위도식하며 책만 읽는 서민일 뿐이다. <글 쓰는 선비> 출처 : 한국사진사연구소



성호가 보기에, 지금의 선비는 민호(民戶)에 편입된 사(士)로 벼슬 없는 서인(庶人)일 뿐이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익힌 일이라곤 책 위의 문자에 불과하므로 농사짓고 장사하는 데는 또 힘이 감당해 내지 못한다. 농사나 장사를 하려고 해도 일에 너무 서툴러 실상 할 수가 없는 게 이 시대 선비의 현실이었다. 콩과 보리나 구분할 수 있으면 다행인 정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호는 선비에게 다른 방법은 없다고 보았다. 오직 자신이 무위도식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찮은 존재로서 부지런히 사지 육신을 움직이는 존재들 덕에 먹고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 성호는 여기에서 출발하라고 말한다. "오히려 날마다 두 그릇씩 밥을 먹고 해마다 홑옷과 겹옷을 바꾸어 입되 쌀 한 톨 실 한 올도 모두 자기가 스스로 마련한 것이 아니고 오직 편안히 앉아서 남들에게 의지하니, 마땅히 어진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익, 「식소(食小)」, 『성호사설』)


성호는 선비를 특권층으로 보지 않았다. 성호는 당대의 선비들이 서인들의 노동으로 살아도 될 만한 그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비는 그저 무위도식하며 책만 읽는 서민일 뿐이다. 농공상인과 같은 서민과 다른 점은 문자에 익숙하다는 사실 뿐. 그렇다면 선비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호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남의 노동력으로 더부살이하듯 사는 존재인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사회적 존재로서 보다 떳떳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호는 선비라는 존재의 심연까지 내려가 절실하게 묻고 따졌다. 그리고 소박하면서도 실천 가능한 해법을 찾아냈다.




글. 길진숙(남산강학원)



 2편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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