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떠나자! 나를 녹슬게 하는 공부, 타인을 위한 공부로부터

자기배려와 공부



중간고사 시즌이 되면 집안은 항상 정적이 감돈다. 아이는 인강(인터넷강의)을 듣고 있고, 엄마는 그 뒤 소파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다. 아이가 자꾸 딴 짓을 했던 모양이다. 내가 아내 옆에 바싹 다가가서 “당신 꼭 여간수 같아”라고 속살대며 킬킬 거렸더니, 집사람도 쓴웃음과 함께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나도 갈수록 예민해진다. 몇 주 전 아침 식탁에서 큰 사단이 나고 말았다. 오랜만에 학업을 묻자 아이가 너무 예의 없이 대하는 것이다. 그만 나도 격해져서 순간 언성을 높였다. 급기야 생애 처음으로 아이 뺨에 손이 나가고 말았다. 놀란 아내가 아이 손을 끌고 슬피 운다. 이제 우리 사이도 살부드러운 시절을 뒤로 하고 사나워 가기만 할 것이다. 식탁 위 천장에서 내리쬐는 형광등불빛이 면구스럽다.
 

이 모습은 영락없이 감옥의 풍경이다. 거미가 허공에 집을 짓고 스스로 갇히듯, 나와 아내는 예측치 못하게도 우리들의 감옥을 짜버린 꼴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를 낳고 그 거미줄에 매달아 놓은 자괴감마저 든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이제 그 거미줄에 갇힌 아이도 우리랑 똑같은 형상을 갖춰가는 끔찍함이다. 아이도 이제 간수의 욕망대로 학업에 몰두해서 좋은 성적을 얻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거미줄에서 벗어나고픈 것은 아니다. 단지 졸거나 게임하는 진통제가 필요할 뿐인 거다.
 

이건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스스로 감옥을 짠다. 그리고 나와 같은 형상을 낳고 이 감옥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길 반복한다. 어쩌면 공부가 우리의 욕망을 아이에게 실어 나르는 복제기계라는 생각마저 든다. 공부살이가 어처구니없이 힘겹고 슬프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너무 많은 생을 쏟아 붓는다는 생각에 철지난 후회가 밀려든다. 공부가 삶을 더 녹슬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 신종 감옥, 아니 신종 가구도 출시되었다는 놀라운 사실!



공부라는 통념에 빠지다


하지만 세상 살아본 사람은 안다. 학과공부는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다. 물론 실무와 엇박자인 지식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나마 그것들을 바탕으로 해야지만 일들이 굴러가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성적 좋은 사람이 높은 소득과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사실 성적이란 사회에 필요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오랜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나부터도 성적이 낮은 조종사, 의사라면 그 비행기, 그 수술에 내 몸을 맡기기 망설여질 것 같다. 겉으로는 성적이 그리 중요하냐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 중요한 것은 학과공부를 강조하는 것이 높은 소득과 존경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성적이 높았던 사람이 뭘 해도 잘한다는 통설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한 것이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좀 더 의젓하고, 생각도 반듯해 보인다. 아무래도 성적을 올리려면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고, 자기 의무를 잘 수행해야하기에 어느 누구보다 자신의 품성을 잘 관리해 왔을 것이다. 무엇보다 같은 품성들이 모여 있을 ‘좋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틈에서 그런 품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학과공부를 잘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통념이 그리 잘못된 것 같지 않다.
 

이 지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변론』 중 형량을 제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소크라테스 자신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테네인 여러분! 그런 사람[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음을 쓰는 사람=소크라테스]이 영빈관에서 식사 대접을 받는 것만큼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군가가 올림피아 경기에서 말 두 필이 끄는 전차 경주나 네 필이 끄는 전차 경주로 우승을 했을 경우보다도 훨씬 더 적절합니다. 그는 여러분을 행복해 보이게 만들어 주지만, 저는 여러분을 실제로 그런 사람이게 만들어 주며, 또한 그는 부양이 전혀 필요 없지만, 저는 그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변론』, 36d~e


경기우승자는 단지 사람들을 ‘행복해 보이게’(dokein einai) 만들어 줄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신은 사람들을 ‘실제로 그런 사람이게’(einai) 만들어 준다. 따라서 자신이야말로 벌을 받기보다 오히려 극진히 식사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두 가지 중대한 관점이 숨어 있다. 먼저 기만성. 경기우승자는 사람들을 실제로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그저 행복한 느낌이 들게 할 뿐이다. 심지어 경기우승자의 행복이 우리들에게도 행복일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가 기뻐하니 우리도 덩달아 그처럼 행복해질 거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것은 출발부터 가상에 근거한 것이다. 즉 ‘가상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유용성. 그의 우승이 궁극적으로 나의 행복을 위해 유용한 것은 아니다. 즉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행복이다. 가상의 행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흩어져 버린다. 따라서 유용한듯하지만 궁극적으로 유용하지 않다. 결국 경기우승자는 우리에게 기만적인 유용성만을 제공할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돈'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고 만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 차라리 우리가 그들에게 유용한 것은 아닐까? 자신들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자신들이 우월해진다. 우리는 그들이 우월해지는데 유용한 것이다. 또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위계는 더욱 공고해진다. 행복을 위해 유용하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그들을 위해서 행복해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현대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에게 유용한 것을 내가 유용한 것인 양 착각하며 공부한다. 행복해 보여야만 타인을 위해 공부할 수 있다. 아마도 소득이라든지 존경이라든지 하는 것이 그런 것일 게다. 우리가 그들을 추종하여, 행복해 하며, 그들의 척도에 맞춰 공부하는 동안, 그들은 우리들의 유용성을 사용한다. 이런 구도에서 공부는 타인을 위한 공부이고, 타인을 위해 유용해지는 공부다. 결국 공부는 나를 녹슬게 하는 공부, 나를 예속시키는 공부가 되고 만다.



공부는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다. 일반교육에서 벗어난다고 타인을 위한 공부에서 쉽게 해방될 것 같지는 않아서다. 주변에선 일반 교육과정을 벗어나 기껏 검정고시를 보거나, 유학을 가서 대학에 들어간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구도로 본다면 그것은 ‘기만적인 유용성’ 환상은 그대로인 채 좀 편안한 환상경로를 찾는 것에 불과하다.
 

나에겐 탈학교, 대안학교의 경우도 의문이다. 물론 일반학교와 다르게 가르치려는 노력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에 의해 훈련을 받았다는 아이들도 많은 경우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 그 환상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그들도 타인의 유용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녹슬게 하는 곳으로 회귀하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타인을 위한 공부’에서 쉬이 벗어나기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일반학과에서 습득해야 할 지식들은 습득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식이란 이데올로기가 없는 법이다. 어떤 배치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색깔이 바뀔 뿐, 지식 홀로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회계학(부기학)조차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그것과 공산주의사회에서의 그것이 다르다고 말한다. 다른 배치 속에서 활용되기에 그럴 것이다.


지식 그 자체로 부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 공부를 벗어나야 하지만, 또 거꾸로 기존 공부의 성과들을 흡수해야 하는 이중적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만적인 유용성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기만에 의해 포획되어 타인을 위해 사용되는 ‘앎’을 탈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배치에서만 가능한 일종의 전투적인 교정이다.

어떤 배치에서인가? 푸코는 이 지점에서 다른 감각의 철학을 전한다. 그것은 가족 교육을 비롯한 통념적인 교육을 비판하고 벗어나려는 자기배려로부터 출발한다.


너 자신을 안전한 곳에 위치시키고, 너 자신과 만나도록 노력해라. 너희 부모가 이와는 다른 것을 너에게 바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네 가족이 네게 염원하는 바와 다른 바를 너에게 염원한다. 네 부모들이 네게 풍요롭기를 염원하는 바에 대해 너그럽게 경멸하기를 나는 네게 염원한다.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134쪽


키케로와 세네카는 훌륭한 영혼은 오류 이전에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오류를 교정하기를 요청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은 ‘교육과 습관 환경의 정화’(같은 책, 133쪽)다. 이 차원에서 자기배려는 먼저 가정이 부과하는 가치체계를 재검토해야 한다. 그러면서 세네카가 급진적으로 제시하는 요청은 바로 ‘부모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세네카는 아이에게 아이의 풍요를 원하는 부모의 염원조차 경멸하라는 말로 아이의 의식을 급진화시킨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실제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만적 구조로 끌어들이는 부모의 욕망을 공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감옥으로 끌어들이는 부모를 공격하라는 뜻이다. 부모의 감옥과 다른 배치에서 앎을 획득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아주 기묘한 지점이다.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누구보다 부모의 욕망이 해체되어야 한다. 부모의 욕망이 해체되지 않고서 아이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그 순간에야, 그 배치에서야 새로운 욕망에 따라 기존 지식을 재배열하여 획득할 수 있다. 즉 오류가 교정되는 것이다.
 

결국 아이의 공부는 모범을 따라 실행하면 해결될 문제이거나, 단순히 일반교육을 떠나면 해소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부모, 교사들이 자신의 욕망조차 해체해야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의미에서 아이의 공부는 동시에 부모의 공부, 교사의 공부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공부는 공부라고 할 수조차 없는 공부다. ‘기만적인 유용성’을 돌파하려 한다면 말이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공부라 하지 말고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모두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공부는 아이가 부모의 욕망으로부터 떠나는 것일 뿐 아니라, 부모도 기존의 자기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따라서 공부는 지금 있는 곳을 떠나는 것이다. 떠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공부는 지금 있는 곳을 떠나는 것이다. 떠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두려웠노라고 말해야겠다. 노예인 너의 아버지가 매가 두려워 너의 공부에 용기를 갖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더 슬픈 일도 함께 전해야 한다. 이미 그 노예가 너에게도 젖어들었다고 말이다. 아울러 너에게 젖어든 그 노예가 사실은 나에게서 갔다는 것도 숨기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사실 나는 너에게 젖어든 내가 두려웠노라고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용기 내어 이 이야기를 건네야겠다. 너도 너의 노예와 싸워야 한다고, 그리고 그 싸움은 아마 오래도록 계속 될 것이며, 그게 너 자신을 위해 할 진정한 공부일 것이라고 말이다.



글.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10점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서광사
주체의 해석학 - 10점
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옮김/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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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gini 2014.04.30 17:55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격하게 동의합니다~!

    • 약선생 2014.05.01 12:19 신고 수정/삭제

      공감해주시니 정말 기쁘네요! 다른 글도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좀 계시면 좋으련만...ㅎㅎ

  • 김소영 2014.05.01 12:23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부모의 풍요롭기 염원하는 바를 오랜기간 경멸하고 거부하며 시작한 다른 일에서
    풍요롭고 싶은 나를 발견합니다.
    부모는 행복해보이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너도 행복하라고 말합니다.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으리라, 거부하던 그 욕망을 다시 욕망하고픈 욕망이 생깁니다.
    반항을 위한 반항이나 거부를 위한 거부는 아니었는지,
    혹시 나 스스로가 진정 욕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그 욕망을 흡수해버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지금 상태가 마음에 들지않고 힘들게 느껴질때면 자신이 없고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집니다.
    이미 젖어 들어버린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서글퍼지네요.
    실제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될까요

    • 약선생 2014.05.01 20:41 신고 수정/삭제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심하게 젖어 있지요. 말려도 말려도 다시 젖어요. ㅠㅠ 할수 없는 것 같아요. 매번 우리들 안에서 되살아나는 노예성과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 세경 2014.05.02 13:54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약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아버지로서 이야기지만 그 두려움을 저도 비스무레 느꼈습니다. 특히 학생 때는 공부라는 이름으로 정말 많은 것들, 기대, 바람이 뒤섞이는 것 같습니다. 예속되고 낡아지는 공부를 하고 있지 않나 제게도 좋은 질문거리입니다^^

    • 약선생 2014.05.03 00:13 신고 수정/삭제

      여러 생각 끝에 저에겐 다음 두 가지 두려움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아이가 정말 나와 닮아질까봐 두려운 게 첫 번째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두려움이 그 뒤에 숨어 있습니다. 아이가 소크라테스처럼 정말 훌륭해질까봐(!) 두렵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전자는 내가 노예임을 알기 때문에 아이가 나의 노예성을 닮아갈까봐 두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좀 다릅니다. 내가 여전히 노예이고, 동시에 노예인 내가 ‘훌륭함’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이가 소크라테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면 아이가 고통받을까봐(?) 두려워서 그 길을 가지 않도록 유도합니다. 소크라테스의 훌륭한 삶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통상의 부모들은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슬프게도, 우리는 자신들의 두려움 때문에 아이를 훌륭하지 않은 길로 인도합니다. 머리로 알면서도 손은 아이를 감옥으로 끌고 갑니다. 결국 사회적 통념과 규범이 용인하는 길로 아이를 끌고 가죠. 이 모든게 문제를 사유하지 않고, 덮어놓고 처리하려고 해서 생기는 예속인 것 같아요. 전부 나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저도 언제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세경샘, 읽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복 받을거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