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물리학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

한 권의 책, 세 개의 시선



『보이지 않는 세계』, 이강영, 휴먼사이언스


마흐는 원자론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자의 태도를 견지했다. 그의 관점에서 원자와 같이 우리의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 존재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열이란 우리의 감각으로 분명하게 느껴지는 현상이므로 과학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원자의 존재는 우리가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원자를 이용하여 열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설이며 과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원자론을 주장하는 볼츠만과 젊은 과학자들은 원자의 움직임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열과 압력이라는 다양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를 이용하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흐에게는 온도와 압력과 같이 측정한 물리량만이 과학의 근거가 될 수 있고, 그 다음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남아있을 뿐이다. 원자의 움직임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마흐의 철학에 의하면 과학이란 확인이 가능한 사실들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렇게 얻어진 결과만이 자연현상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설명한다고 믿었다. (98쪽)


과학의 역사를 다룬 책들 중에는 종종 따분한 책들이 있다. 악당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긴장감 없이 주인공이 이긴다고 할까. 주인공 과학이 오류나 실수, 비합리성을 물리치고 세계의 진리를 밝혀내며 승리한다는 전형적인 경우가 많다. 헌데 스릴 넘치는 영화일수록 악당 캐릭터가 매력적이고 그가 꿈꾸는 세계가 수긍이 가게 된다. 그럴 땐 거꾸로 선악의 이분법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 악당은 정말 악당인 걸까, 주인공의 활약을 위해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과학사 속 긴장감 넘치는 ‘원자론 논쟁’씬에서도 그렇다. ‘원자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여기에 ‘원자가 있다’고 대답하는 쪽이 선(善)을, 없다는 쪽이 악(惡)의 역할을 맡는다. 대표적으로 원자론을 주장한 볼츠만과 반대한 마흐가 있다. 이 논쟁은 볼츠만의 승리로 끝났고 마흐는 ‘과학의 적’ 혹은 고집불통이라는 악평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원자의 실재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사를 좀 더 꼼꼼히 볼 필요가 있다. 마흐는 왜 원자를 반대했을까, 과학사는 정말 선악의 대립구도일까?


원자론을 주장한 볼츠만 VS 원자론을 반대한 마흐
_ 논쟁은 볼츠만이 이겼다. 하지만 마흐가 '왜' 원자론을 반대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19세기 말, 당시 물리학에서 원자는 열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다. 열이 올라가는 현상을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의 부딪힘으로 가정했다. 원자들이 서로 격렬하게 부딪힐수록 온도가 상승한다는 것. 하지만 원자는 어디까지나 열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이었다. 누구도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를 실재하는 사물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저 원자를 가정하니까 이해하기 편하더라, 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여기서 볼츠만이 등장한다. 볼츠만은 자신의 통계역학을 개진하면서 원자가 실제로 있다고 주장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경험적 근거도 전혀 없는 원자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볼츠만의 주장은 즉각 많은 반발에 부딪혔다. 그 중 가장 근본적이었고 심도 있는 비판자가 마흐였다. 경험적 근거가 전혀 없는 개념이 어떻게 실제로 있을 수 있겠는가. 원자는 이론적 모델로 상정되는 것에 그쳐야지, 그것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은 착각인 셈이다. 마흐는 과학이 관찰 가능한 사실들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흐의 생각을 이렇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친절한 편에 속한다.

볼츠만과 마흐는 원자의 실재성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볼츠만이 죽은 후, 실험에 의해 물질이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이 밝혀진다. 이를 계기로 원자론에 대해 불신을 품었던 이들이 원자를 인정하게 된다. 논쟁은 종결된 듯 보였다. 하지만 마흐는 끝까지 원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응? 실험으로 밝혀졌는데도?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

마흐의 별명이 ‘과학의 적’인 것은 이때문이다. 사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악당을 이해해보기로 했다. 그러니 이 지점을 좀 더 살펴봐야 한다. 마흐는 도대체 왜 이미 실험으로 확인된 (것 같은) 원자에 반대했던 것일까.

우리는 눈앞에 있는 물체를 이렇게 생각한다. ‘나와 물체가 먼저 있고 내가 물체를 보거나 만지면서 감각한다.’ 이 땐 나도 물체도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마흐가 보기에 실상은 반대다. ‘희다’거나 ‘딱딱하다’는 감각이 먼저 있고 물체는 그 감각들이 연결되면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관계들이고, 우리는 이 관계들을 통해 물체와 자신,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마흐에겐 원자도 원자를 만드는 물질적 관계가 모여서 이루어진 상이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관계인데, 관계를 빼놓고 물체를 이야기하는 원자론에 반대할 수밖에. 그러니 관계만을 기술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도 받아들일만한 주장인 것이다.

마흐는 우리에게 ‘실재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져준다.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가’란 질문에 대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하는 것이다. 마흐의 답이 감각과 관계였다면, 볼츠만은 관계 보다 물체 자체에 주목한다. 관계들에 우선하는 물체, 이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았기에 원자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물체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눈에 보인다고 모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화경 속 그림처럼 보여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마흐가 과학의 적이 되면서, 어쩌면 우리는 ‘있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의 역사는 쉽게 선과 악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앎의 영역을 확장시켜가기만 하는 단선적인 흐름도 아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과학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각축장의 느낌이다. 정해진 방향이 있지 않고, 다양한 흐름들이 충돌하고 부딪힌다. 만약 누군가 이해되지 않고 비합리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가 지금 우리와는 다른 과학을 꿈꾸었기 때문일 수 있다. 마흐의 질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원자, 주체와 대상, 실재한다는 것의 의미 등등 많은 것들이 새로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질문은 돌아오고 우리는 다시 묻는다. “원자는 정말로 실재하는가?”



글. 박영대(남산강학원)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말은 보통은 빛을 통해서 눈으로 정보를 얻는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이를 확장해서 어떤 종류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든 대상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는 일은 모두 “본다”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왔다. 그런데 블랙홀은 어떤 물질이나 빛까지도 내놓지 않으므로 진짜 ‘보이지 않는 천체’이며 완전히 까만 존재다. 그러면 우리는 블랙홀을 볼 수 있는가? 블랙홀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블랙홀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이론적인 상상의 존재일 뿐인가? …… 아마도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유명할 과학자일 스티븐 호킹은 1974년 <블랙홀의 폭발>이라는 논문에서 “블랙홀은 그다지 까맣지 않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블랙홀은 빛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흡수하기만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는 물질과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호킹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호킹방사다. …… 그러니까 호킹방사를 통해 블랙홀을 본다는 것은 블랙홀의 에너지를 바깥 공간의 양자 효과를 통해 보는 것이다. 마치 동양화에서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내는 홍운탁월과도 같다.(260쪽)


어렸을 적, 동생과 나는 과학자가 꿈이었다. 우리는 장차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 여러 시도(?)를 했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우리는 숲에 가서 나뭇잎의 모양, 곤충들의 생김새를 유심히 관찰하며, 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패턴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곧 지루해져서 포기했다. 네잎클로버만 잔뜩 찾았을 뿐.
 
또 우리가 했던 가장 재밌었던 놀이는 일명 ‘창조놀이(?)’였다. 동생과 나는 어떤 세계, 어떤 기계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자랑하며 그 생각을 맘껏 실현시키는 놀이를 했다. 어린이 과학책에서 본 것,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동원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동생은 방 안에 가상으로 블랙홀의 공간을 만들어 내 장난감을 다 빼앗아 가기도 했고, 나는 과학상자와 레고블록으로 모터에 의해 작동하는 어설픈 성문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생각한 걸 직접 만들어 놓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블랙홀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을 보며, 갑자기 어렸을 적 과학자를 꿈꾸던 우리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하는 활동이 우리의 ‘창조놀이’와 유사해보였다. 물론 과학자들의 연구는 우리랑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일이지만.^^;;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블랙홀이란 존재를 창조하고 있었다. 고도로 압축되어 높은 밀도로 존재하는 별들. 그 조그만 공간에 상대적으로 엄청난 질량이 존재한다. 압축되어 있으니 밖으로 나가려는 압력이 있고, 또 질량 때문에 생기는 안으로 뭉치려는 중력도 있다. 엄청난 질량으로 인한 중력은 내부압력보다 세다. 점점 그 별은 안쪽으로 수축되고 점과 같이 매우 좁은 공간으로 엄청난 질량이 몰린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그것은 시공간을 강하게 휘게 만든다. 움푹 들어간 시공간이 바로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고만 생각해왔다.


무언가 블랙홀 속에 들어가면, 거기서 다시는 나올 수 없다. 블랙홀과 그 주변의 공간은 전혀 다른 시공간이다. 시공간이 패여서, 그 속에 또 다른 독립적인 시공간이 생기다니. 과학자들은 과학이론의 힘을 빌려, 기존의 상식과 감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그려내고 사유한다.
 
그러나 아직 블랙홀은 과학자들의 상상과 사유일 뿐. 그들에겐 블랙홀이 존재할 것이란 확신만 있었다. 그들은 이제 블랙홀의 존재를 실현시켜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블랙홀은 정의상 빛을 포함한 모든 걸 흡수하고 흡수한 것을 내놓지 않는 점. 우리는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전자기파)과 우리 눈의 시세포가 상호작용함으로써 그 대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빛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복사하지 않는 블랙홀은 아예 볼 방도가 없다. 그러기에 이론 상 블랙홀의 존재를 예견하면서도, 이를 볼 수 없다는 난관에 빠져버린다. 과학자들에겐 보이지 않는 건 생각은 할 수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블랙홀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확신, 그들이 사유한 세계를 실현시키려는 꿈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난제를 뛰어넘어 과학자들을 움직였다.
 

블랙홀 주위에서도 빛알갱이 쌍이 끝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어떻게 보냐구? 바로 블랙홀 주변의 공간을 통해서다. 그곳엔 공간이라 해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지 않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그 곳엔 양자적 요동이 존재한다. 그곳엔 “허가된 만큼의 에너지가 있을 수 있고, 이 에너지는 입자-반입자 쌍을 만든다”(262). 이렇게 쌍생성되는 물질들이 한쪽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머지 한쪽은 방출된다. 결국 블랙홀이 빛을 복사하지 않지만, 그 주변에서 입자를 방사하므로, 마치 블랙홀이 입자를 방사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나타낸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희한한 방식이 아닌가? 블랙홀을 블랙홀이 아닌 것 때문에 본다니.^^;;
 
블랙홀을 현실화시키려는 과학자들의 노력과 마주하면서, 그들이 마치 창조자같다고 느꼈다. 내가 야심차게 기획한 새로운 장난감의 모습을 온갖 노력 끝에 완성시켰다면,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으로부터 유도되는 이론적 발상을 어렵사리 양자역학을 응용함으로써 실현시켰다.

과학자들은 이론적인 상상물이었을 것을 존재하게끔 만들었다. 존재해야하는 것을 존재화시키기. 이는 블랙홀이라는 새로운 존재,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과학자들은 그토록 보는 것에 매달렸다. 그들에게 ‘본다’는 행위는 존재해야하는 것을 존재화하도록 만드는 창조의 노력이었다.

‘본다는 것’은 자연 속에 숨겨진 비밀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서 유심히 관찰하는 행위가 아니다. 블랙홀은 무지란 장막 속에 가려져 과학자들이 밝혀주기를 기다리면서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보이는 것을 단순히 수용해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기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세계를 그려내고 만들어 냈다. 자연 앞에서 그것이 어떤 힌트를 주기를 기다리는 과학자들, 이 얼마나 수동적인가? 내가 본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한 광고의 문구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세계를 “생각대로, 띠링띵” 만들어 간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어렸을 적 가만히 나뭇잎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동생과 무언가를 만드는 걸 더 좋아했던 이유는 이 창조의 쾌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것이 과학의 힘이자 매력이라 생각했다. 완전히 다른 존재와 새로운 시공간의 세계를 상상하고, 이를 스스로 창출해내는 과학을 꿈꾸었던 것 같다.


글. 정철현(남산강학원)




그런데 물질이 4차원 시공간에만 속한다면, 여분의 차원이란 것은 대체 뭐에 필요한 것인가? 있으나마나 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도입하는가? 일반 상대론에서 중력이란 시공간의 기하학적인 구조 그 자체라고 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물질은 4차원 시공간에만 속한다 해도, 중력은 모든 차원에 걸쳐 있으며, 따라서 다른 차원의 효과는 중력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론에서 꽤 커다란 다른 차원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4차원 시공간에서 중력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346쪽)


이강영 선생님의 『보이지 않는 세계』는 말 그대로 이 세계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책 말미에 가면, 이와는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가 등장한다. 그 세계는 ‘이 세계에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세계는 원리적으로 볼 수 없는 세계, 우리로서는 절대로 경험불가능한 세계다. 한 마디로 말해, ‘허구’의 세계,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뻥’인 세계다. 이 세계가 ‘여분차원’이라는 것이다.

지금 최첨단의 이론 물리학은 이 뻥인 세계를 연구한다. 뻥인 세계를 연구하는 물리학이라……. ‘물리학’하면 자연의 가장 사실적인 면을 다룬다는 느낌을 주는 학문이 이런 연구를 한다는 건 당황스럽다. 혹은 과학을 부정적이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거봐, 물리학이란 건 이 현실세계와 아무 상관없는 헛소리라고’라며 승리의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물리학은 대체 왜 이런 허구의 세계를 연구하는 것일까?


이것은 현실인가, 현실이 아닌가?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중력’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중력’이란 것에 대해 이런 이미지를 가진다. 우리를 끌어내리는 힘, 우리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는 힘, 벗어날 수 없는 것 등등. 여하간에 중력은 우리에게 마치 어떤 숙명의 이미지, 그래서 강한 어떤 힘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중력은 절대 그렇게 강한 힘이 아니다. 강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약하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노트북을 산산조각 내려면 큰 힘이 필요할 거다. 이 노트북을 이루는 물질을 한 데 뭉치게 하는 힘은 전자기력이다. 전자기력을 끊는 데는 큰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난 이 노트북을 한 손으로 번쩍번쩍 들 수 있다. 노트북을 부수는데 드는 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작은 힘으로 말이다. 이뿐 아니다.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걷는다. 그런데 걷기 위해 발을 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로 중력을 끊어내는 거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중력을 이긴다. 반대로 말해, 중력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힘들에 비해 너무 약하다!

이렇게 약한 중력을 설명하기 위해 여분차원이 도입된 것이다. 여분차원으로부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중력이 다른 힘들보다 엄청나게 작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원래 중력도 다른 힘들과 비슷한 크기인데 중력만은 여분의 차원에까지 작용하기 때문에, 즉 다른 커다란 차원으로 새어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4차원 시공간에서는 매우 작게 느껴지는 것이다”(346).


그렇다면 ‘차원’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4차원 시공간에 산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려면 4가지를 정해야한다는 거다. 가로-세로-높이라는 공간상의 좌표와 시간. 만약 이중 한 가지라도 빠지면 만날 수 없다. 엉뚱한 옆 건물에, 또는 앞 건물에, 또는 층에 가 있을 수 있고, 엉뚱한 시간에 혼자 멀뚱히 서 있게 된다.


그런데 차원은 ‘자유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번에는 친구를 만나는 것과는 약간 다른 상황을 생각해보자. 형사가 범인을 잡는 경우. 형사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서도 이런 4가지가 확실해야 한다. 이 4가지 중 한 가지라도 잘 모르게 되면 범인을 잡는 일이 어려워진다. 여기서 좀 더 나가보자. 형사와 범인 사이의 쫓고 쫒기는 관계를 두뇌 게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범인이 예측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 허를 찔렸다고 말한다. 그건 형사가 예상한 범인의 경로와는 다르게 범인이 활동했다는 거다. 이 때, 범인은 형사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에 있다. 그 한 차원이 범인을 검거되지 않도록, 즉 자유롭게 해 준거다.


차원이 많다는 것은 자유도가 높다는 뜻이다. 중력을 뺀 물리학의 세 힘, 전자기력, 약력, 강력은 자유도가 4이다. 즉, 그 세 힘은 지금 우리 세계만을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중력은 다르다. 중력이 여분차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중력은 그 힘들보다 다른 세계들을 다녀올 수 있는 능력, 즉 자유도가 높은 거다.
 

차원이 많다는 것은 자유도가 높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여분차원이 진짜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맞다. 분명 현재 물리학에서 말하는 여분차원은 뻥이다. 그러나 하나. 범인이 잡히지 않는데는 지금 이 차원과 다른 차원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 요컨대, 4차원이라는 것은 가장 큰, 그렇지만 가장 성글은 이 세계의 차원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4차원은 우리가 가진 최소차원을 나타낼 뿐이다.
 
그리고 둘. 여분차원, 즉 뻥차원은 분명 상상이다. 그러나 그 상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상상력이란 그런거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은 중요치 않다. 우리는 그런 뻥의 세계를 통해 이 세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기발한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저 먼 미래의 발전을 위해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삶을 더 잘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한 상상력. 물리학이 여분차원을 연구하는 의미다.



글. 신근영(남산강학원)



보이지 않는 세계 - 10점
이강영 지음/휴먼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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