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운동에서 운동의 변화로! -그 변화의 역사

  운동을 넘어 운동의 변화로 ③  



변화를 지각하는 세 가지 방법



질문에 질문하기 


긴 여정이었다. 돌아보니, 운동의 변화를 말하기 위해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운동’에서 ‘운동의 변화’로 넘어가는 그 여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해주고 있다. 답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혹은 찾은 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답을 찾기에 앞서서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운동에서 운동의 변화로 넘어오게 된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었다. ‘이 세계에 있는 것들은 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운동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다보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은 슬퍼졌다. 부족하기에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운동하게 된다는.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전혀 다른 렌즈를 끼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눈에 비친 체계에서 운동은 자연스러웠다. 존재한다는 것, 그건 곧 운동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왜 운동하지’라는 식의 질문은 그에게 성립하지 않는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질문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했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 운동은 슬프지 않아도 되었다.


갈릴레오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질문 자체에 질문을 던지기! 사람들은 주어진 질문에 대해 답을 찾는데 분주했을 뿐이었다. 아무도 그 질문 자체를 새롭게 생각하지 못했다. 허나 갈릴레오는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이던 그 질문 자체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운동한다!



만물이 운동한다고?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식 질문의 상속자가 아닌 갈릴레오. 그렇다면 갈릴레오는 이 세계에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 그렇다. 그에게 이상한 현상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요컨대, ‘왜 정지하고 있지?’라는 질문.


사실 우리는 정지해 있는 것들을 만난다. 무엇보다 우리는 운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만물이 운동한다는 갈릴레오의 말은 뭘까? 그건 하나의 이론적 가정에 불과한 걸까? 갈릴레오는 이것을 설명해야 했다. 여기서 ‘공유하는 운동’이 출현하게 된다.


이를테면 지구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의 운동을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건 우리가 지구의 운동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산다. 그래서 지구와 함께 운동한다. 이렇게 함께 하고 있는 운동을 ‘공유하는 운동’이라 한다.


공유하는 운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조용하게 등속도로 달리는 KTX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중이다. 열차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 위에 펜을 대고 있다고 해보자. 열차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쭈우욱 가지만, 종이에는 전혀 그 경로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펜이 열차와 함께 운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 펜은 공유하는 운동을 기록하지 못한다.


갈릴레오는 이렇게 운동을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를 ‘관성계’라 불렀다. 관성계에 있는 것들끼리는 공유하는 운동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함께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차의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을 운동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조금 더 나가보자. 두 대의 KTX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물론 등속도로 달리고 있고, 덜컹거림이 조금도 없다고 하자. 자, 나는 방금 잠에서 깨어나 옆의 열차를 보았다. 그 때 나는 헛갈린다. 기차가 같이 정지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만물은 운동한다. 허나 함께 같은 운동을 하고 있으면, 서로는 서로를 정지해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왜 가만히 있지’라는 질문에 대한 갈릴레오의 대답이다.


함께 같은 운동을 할때, 서로는 서로를 정지해 있다고 느낀다.



상대적 운동


다 같이 운동하는 세계, 운동이 자연스러운 세계. 이 세계에서 운동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질문은 운동 그 자체가 아닌, 운동의 변화로 향하게 된다. ‘왜 지금 하는 운동의 변화가 생길까’ 라는.


그런데 우리가 운동의 변화를 지각할 때, 재미난 현상 하나가 생긴다. 실제로는 운동의 변화가 없음에도, 운동이 변한다고 느끼는 것!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이럴 때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힌트는 관성계에 있다. 우리는 공유하는 운동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같은 운동을 하고 있을 것들 사이에서는 정지가 경험된다. 이런 관성계가 깨지게 되는 것은 서로 간의 공유하지 않는 운동이 발생할 때다. 이를테면 등속도로 나란히 달리던 옆의 기차가 속도를 줄이게 되면, 관성계가 깨진다. 요컨대, 나는 더 이상 정지 상태라고 느끼지 않는다.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플랫폼에 정차해 있는 두 대의 기차. 나는 차창 밖으로 옆의 기차를 보고 있다. 이때 출발하는 한 대의 기차. 나는 순간 헛갈린다. 내 기차가 출발하는 건지, 아니면 옆의 기차가 출발하는 건지.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나는 마치 내 기차가 출발한다고 느낄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옆의 기차가 속도를 줄였지만, 정작 나는 내 기차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 것처럼 경험되기도 한다. 이를 ‘상대적 운동’이라 한다.


상대적 운동 상태에서 우리는 착각에 빠진다. 실제로는 나의 운동에 아무 변화가 없음에도, 변화를 경험한다. 이런 상황을 다룬 게,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특수 상대성 원리’다. 그런데 이런 경험에는 시간과 관련해 묘한 현상이 벌어진다.



사이비 운동의 변화


특수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상대적 운동은 시간상의 변화를 가져온다. 다시 한 번 기차를 타보자. 나는 지금 기차에 타 있다. 그리고 지금 옆으로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그 순간 나는 옆의 기차에 있는 시계를 보게 된다. 이 때,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다. 옆의 기차에 있는 시계가 내가 가진 시계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옆의 기차에 탄 사람이 내 기차를 봐도, 내 기차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의 운동에 따라 느끼는 '속도'가 다르다!


상대적 운동에서, 우리는 공유하지 운동을 통해 나의 변화를 경험한다. 허나 실제로는 내 운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런 변화의 경험은 시간 감각도 바꿔놓는다. 상대의 시간이 더 느리게 지각되는 것. 요컨대, 상대가 나보다 더 여유롭게 사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런 변화의 지각에서는, 언제나 상대가 부럽기 마련이다. 나는 바빠 죽겠는데, 우리 집은 뭔가 복작거리는게 정신이 없는데, 남의 집을 보면 왠지 평안해 보이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막상 그 집, 그 사람 속사정을 알고 보면 우리집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들도 지지고 볶고 번다하긴 마찬가지다. 


상대적 운동을 통한 운동의 변화를 지각하는 일은, 직접적 접촉이 발생하는 순간 여지없이 깨진다. 그런 변화의 경험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특수 상대성 원리는 운동하는 두 계가 만나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나게 되면, 서로 간에 느끼는 시간상의 간극을 해소되어 버린다.


그러니 지금 ‘그들’이 부럽다면, 한 번 생각해봄직 하다. 지금 나는 공유하지 않는 운동을 통해, 내 삶의 변화를 가늠하고 있는게 아닌지. 그 사이비 운동의 변화 속에서 내 삶의 운동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더 새롭게, 더 세게, 더 강하게?


과학을 들먹이며 구구절절 이야기했지만, 운동과 운동의 변화는 생명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오장육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대기와 물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지구는 자전·공전을 거듭하며 계절과 하루 밤낮을 오간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존재 양식이다.


그러나 산다는 것과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은 조금 다르다. 속된 말로 목숨이 붙어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는 경우가 있다. 요컨대, 살아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산다는 건,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 그 이상을 뜻한다.


생명에게 생명다움을 느끼는 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이 경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운동의 변화다. 자기 삶의 변화를 지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그리고 이런 지각에는 반드시 감정이 따라 나온다. 웃고, 울고, 화낼 때, 우리는 어떤 운동의 변화를 지각하는 것이다.


변화를 지각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앞에서 말한, 상대의 운동을 통한 변화의 지각이 있다. 이런 경험은 일종의 환상이다.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변한다고 느끼는 착각. 이 환상은 직접적 접촉이 일어나면 무너진다. 


또 다른 지각 방법에는 다른 것과의 직접적 접촉을 통한 경우가 있다. 첫 글에서 말한 놀이동산의 바이킹이 그런 경우다. 이 때 실제 운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바이킹이다. 나는 그 바이킹에 올라타면 된다. 그럼 나는 힘들이지 않고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경험하는 운동의 변화는, 상대적 운동과는 달리 실제로 내 몸에서 벌어진다. 허나 내가 직접 애를 써서 운동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변화는 내 몸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내가 생산하는 운동의 변화가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다른 것에 올라타는 일이 필요하다. 요컨대, 다른 것과의 접속을 통해서 변화를 유발하는 거다. 신상과 접속했을 때 느끼는 기분이 이런 거다. 신상 핸드백을, 신상 구두를, 신상 핸드폰을 장착해야지 느껴지는 변화. 그 장착을 통해서만 감각되는 생명다움. 주부 우울증도 다르지 않다. 이제껏 나를 나이게 만들어주던 남편과 자식들이라는 장식품이 떨어져나가면서 더 이상 어떤 존재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것과의 접속을 통해 운동의 변화를 경험하는 건 불안과 초초함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집착이 생겨난다. 혹은 무엇이든 좋으니 새로운 것과의 접촉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게 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오로지 변화의 강도만이 중요하다. 한 번 접속해서 익숙해지면, 그 변화의 감도는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더 새롭게, 더 세게, 더 강하게’만이 남게 되어 버리는 것!


지금, 우리를 추동하는 힘은 과연 무엇인가?



스스로 변화를 생산하기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바이킹은 내게 최고의 놀잇거리엿다. 그래서 한 때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놀이기구 투어를 하는 게 소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더 이상 바이킹을 찾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짜릿함이 매스꺼움으로 변한 탓만은 아니다. 지금 내게 더 재미난 놀잇거리가 생겼다. 바로 ‘책’이다.


책읽기 놀이는 운동의 변화를 느끼는데 최고다. 머나먼 놀이동산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단 몇 분만에 끝나는 짜릿함도 아니다. 더욱이 책이 주는 변화는 ‘새롭고, 세고, 강한’ 것과는 다르다. 매번 접속하는 책은 각기 다른 변화를 경험하게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책 역시 접속을 통한 변화다. 그럼에도 분명 다른 것들을 장착하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낸다. 다른 놀잇거리들과 책이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책을 다른 놀잇거리들과 다르게 만드는 첫 번째 요인은, 책읽기에는 나의 공력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아주 단순하게는 우선 책을 읽는 행위가 필요하다. 책을 펴고, 한 줄 한 줄 따라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는, TV와 별반 차이가 없다. TV 역시 TV를 켜고, 직접 봐야 하니까. 허나 책은 TV와 달리 정신줄을 놓고 마주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냥 책에 올라탈 수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 안에서는 소화 작업이 일어난다. 내 공력을 쓰지 않는 책읽기, 스스로의 작업이 없는 책읽기는 실상 불가능하다. 내 안에서 작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읽어도 읽은 게 없다. 뿐만 아니다. 밀려오는 졸음에 책 장 한 장 넘기기도 어려워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점점 이 책이나 저 책이나 다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진다. 그럼 이제 책이란 것도 별 볼일 없어진다. 


접속에 의한 변화는 나의 작업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냥 무임승차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읽기와 같은 것에서는 그런 일이 힘들어진다. 접속하나, 나 스스로 만들어내는 어떤 작업을 필요로 한다는 것. 운동의 변화를 지각하는 마지막 방법이 여기에 있다. 스스로가 운동의 변화를 생산하는 것! 이것이다.



‘읽고 쓰기’의 놀이동산


텍스트와 함께하는 운동. 읽기, 그리고 쓰기!

그러나 책읽기만으로는 아직 뭔가 부족하다. 책은 스스로 변화를 생산하고 경험하는 입구는 될 수 있다. 내 안의 작업 없이는 책읽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글쓰기 작업이 그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소화작업의 일부다. 책을 소화하고, 소화한 내용을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를 더듬더듬 알아간다.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갈 때 비로소 소화작업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더듬더듬거리는 작업. 때로는 글이 막혀서 어떻게든 뚫어보려는 더듬거림, 한참을 써놓고는 ‘이게 아닌가벼’하고 다 지워버리고 시작하는 더듬거림. 또는 글을 쫙 풀려나가면서, 그제서야 내가 아는 게 이거였구나를 알게되는 더듬거림. 이 모든 더듬거림들이 내가 생산함으로써 느끼는 운동의 변화다.


내 경험으로는 이 보다 더 멋지게 운동을 경험하게 하는 건 없다. 아니, 비단 나만이 경험하는 건 아니다. 언제가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에 연구실에 강의를 들으러 왔단다. 그러다가 글을 쓰는 프로그램을 하게 되자, 그저 앉아서 강의로 남이 해주는 얘기만 듣는 게 재미없어지더라고. 스스로 책을 읽고, 그것을 글로 써내는 그 작업이 빠지자, 심심해졌다고. 아마 내가 한편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책읽기과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거다.


상대적 운동을 통해 넋 놓고 ‘그들’을 보고 있을 필요도, 접속할 무언가를 찾아 분주하게 이리저리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스스로 운동의 변화를 생산하고 경험하는 세계. 그 세계를 경험하는 데는 크나큰 비법이 숨겨져 있지 않다. ‘읽고 쓰기’라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면 된다.  그러니 다가오는 2014년에는 ‘읽고 쓰기’의 놀이동산에 한 번 놀러가 보는 건 어떨까.^^


신근영(남산강학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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