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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자유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으로서의 '운동 그자체'

by 북드라망 2013. 11. 27.

#삶의 양식 - 신형, 정·기·신 - 가라타니 고진



신체의 공산주의



나에게 삶의 양식은 여러 개다. 우선 ‘가족’. 아침 일찍 ‘안녕!’하고 떠나서, 밤늦게 다시 ‘안녕ㅡ’하고 돌아와 잘뿐이지만, 그래도 내 삶의 오랜 양식이다. 그리고 ‘회사’. ‘안녕하세요!’하고 들어가, ‘내일 또 봐요’라며 자리를 뜨는 불안한(?) 곳이지만, 가족보다 더 오래된 삶의 양식이다. 또한 세미나나 강의를 들으러 가는 연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나의 정신적 영토는 이곳에 점령당한지 오래다. 또 이런 것도 있을 수 있다. ‘업무 파트너’. 일을 하면서 맺어진 동료나 고객 같은 사람들이다. 또 매달 통장에서 회비가 나가는 동창이나 동향 ‘모임’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당장이라도 몇십 개의 양식들로 쪼갤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때는 가족 문제가, 또 어떤 때는 회사 문제가 삶을 움직인다. 삶은 어느 하나로만 바라볼 수 없다. 그때그때 보다 중요한 것이 그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을 돌리면 몸도 예외는 아니다. 머리, 목, 팔, 다리 등이 모인 생명양식이기도 하고, 정신과 육체가 서로 맞물려 구성된 생명양식이기도 하다. 석가는 사람이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이 사대(四大)가 잠시 합쳐진 것이라고 말한다. 모발·치아·뼈·손발톱은 땅에서, 콧물·정·혈·진액은 물에서, 열기는 불에서, 영명과 활동은 바람에서 빌려 몸이 구성된다(『동의보감』 , 「身形」, 202쪽). 몸은 물질들이 운동하며 일시적으로 결합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몸을 하나의 결합양태로 보고 ‘한 나라’와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나라’[國]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 개념에 가깝다. 이런 관점에서 몸은 정(精)·기(氣)·신(神)으로 구조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비적인 사고에 따라 신은 임금, 혈(=정)은 신하, 기는 백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집중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정·기·신이 서로를 중층적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동의보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은 하나의 나라와 같다. 심장은 군주, 재상은 폐… 등 오장육부와 정기신의 중층적 관계로 구성된다.


정은 몸의 근본이고, 기는 신의 주인이며, 형체는 신이 깃들어 사는 집이다.


─『동의보감』, 「身形」, 207쪽


정·기·신 상호간의 중층성은 그야말로 역동적이다. 인체의 기는 선천의 정기, 음식물의 정미, 자연계의 청기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선천의 정기’는 남녀의 교합을 통해 생명이 탄생할 때 구성된 것이다. 그 순간 천지의 기가 생명으로 결합된다. 기로부터 정이 생기는 것이다. 이 정이 몸을 구성한다. 따라서 정은 몸의 근본이다. 그런데 이 정이 다시 인체의 기를 만든다. 이른바 하초의 기는 정에서 화생된 것이다. 이 기가 명문에 저장되어 삼초의 근본이 된다. 또 음식물의 정기는 영기와 위기로 나뉘어 생성된다. 이와 같은 기와 형 사이의 상호 전화과정을 ‘기화작용’이라고 부른다. 기가 정을 거쳐 형이 되고, 형이 다시 기가 된다. 그런데 또 이 기는 신(神)의 주인이다. 신(神)은 포락(包絡)으로 싸여 있는 심에 모인 정화(精華)가 불로 변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신은 정인 셈이다. 경광(驚狂), 경계(驚悸) 같은 정신적인 문제는 혈허나 신정이 약하여 생긴다. 따라서 정·기·신은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정이 없이, 기·신이 머무를 수 없으며, 기가 없이 정·신이 생성될 수 없으며, 신이 없이 정·기가 안정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중층적으로 결정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를 복수적인 문제로 바라본 사람은 가라타니 고진(1941~ )이다. 고진은 우리 시대를 ‘자본’이라는 잣대로만 고찰하지 않는다. 국가와 네이션(공동체)을 같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세계사를 교환양식의 변주로 바라보았다. 고진이 설명하는 교환양식은 세 가지다. 먼저 음식, 재산, 여성 등을 무조건 증여하고, 상대편은 알아서 답례하는 ‘호수적 교환양식(A)’이다. 다음은 약탈자가 약탈재산을 피지배자에게 재분배하는 ‘국가적 교환양식(B)’이다. 여기서 피지배자는 국가에 복종하고 그 대가로 보호를 받는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폐를 대가로 상품을 사고파는 ‘자본주의적 교환양식(C)’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회구성체이든 복수의 교환양식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는 상품교환양식(C)이 주요한 양식이다. 그런데 상품교환만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와 국민’을 동시에 거느리고서야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사회구성체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로 표현되어야 맞다. 자본 없이 지금의 ‘네이션=스테이트’는 없으며, ‘네이션=스테이트’ 없이는 지금과 같은 ‘자본’도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자본은 “네이션=스테이트”가 구성되고 난 후에야 가능했다.
 

그런데 고진은 여기에다 ‘교환양식 D’를 도입한다. 바로 ‘공산주의’다. 이 과정에서 놀랍게도 고진은 칸트를 ‘사회주의자’로서 호출한다.


호수원리에 기초한 세계시스템, 즉 세계공화국의 실현은 용이하지 않다. 교환양식 A, B, C는 집요하게 존속한다. 바꿔 말해, 공동체(네이션), 국가, 자본은 집요하게 존속한다. 아무리 생산력(인간과 자연의 관계)이 발전해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인 교환양식에서 유래하는 그와 같은 존재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존재한다면, 교환양식 D[=공산주의, 인용자] 또한 집요하게 존속한다. 그것은 아무리 부정하고 억압해도 좋든 싫든 회귀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칸트가 말하는 ‘규제적 이념’이란 그런 것이다.


─『세계사의 구조』, 434쪽


디에고 리베라, 「Frozen Assets」, 1931


칸트의 보편적인 도덕법칙은 “타자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뤄라”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를 실현한 상태가 ‘목적의 나라’다. 여기서 ‘타자를 목적으로서 다룬다’는 것은 ‘타자를 수단이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 다룬다’(『세계사의 구조』, 333쪽)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타자의 존엄을 인정한다. 서로를 자유로운 상대로서 존엄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상호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셔니즘)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사회주의는 호수적 교환양식(A)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련식 국가나 복지국가처럼 단순히 재산을 재분배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변주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부의 격차가 생기지 않는 교환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환양식 D(=공산주의)는 규제적 이념으로 존재한다. 실현될 리는 없지만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으로서의 이념. 사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공산주의 운동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교환양식 A가 되돌아오는 것)’로서 매번 도래한다. 이 목소리는 작지만 현실에 실현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칸트가 말하는 ‘의무’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정·기·신 상호간의 중층성이 인정된다면, 신은 그냥 신이 아니고, 정·기의 신이다. 기도 정·신의 기이며, 정도 기·신의 정이다. 아울러 몸은 원래 천기가 형체를 갖춘 것이다. 결국 천기를 현실의 지평 위에서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것,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될 때 정·신도 바뀌고, 신체도 바뀌는 것이다. 굳이 명명한다면 ‘신체의 공산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세계사의 구조 - 10점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비(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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