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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상상력에 가려진 세계

by 북드라망 2013. 11. 6.

#기만·상상력-눈-파스칼



상상력에 가려진 세계



나는 평생 공부를 잘 해 본적이 없다. 독서실 옥상에서 친구들과 성적을 탄식하던 장면 말고는 학창시절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다. 참 별 볼일 없었다. 하지만 개중에 탄식은 같지만 성적은 늘 월등히 앞선 이들도 있었다. 내가 중위권의 탄식이라면 그들을 몇 개 차이로 1, 2등을 놓쳐 내뱉은 우월자의 탄식이었다.


꼭 있다, 이런 친구들. 공부 하나도 안 했다고 하고 만점 받는 건 대체 뭐임? ㅠㅠ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다. 분명히 시험보기 전에는 아파서 하나도 공부하지 못했다던 친구였다. 그래서 이번 시험은 망칠 거라 자포자기했었다. 나는 정말 그 친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시험 결과는 완전 달랐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한 두 문제 말고는 퍼펙트하게 시험을 봤다. 천재였다. 그후로도 그 친구는 매번 공부량에 비해 성적이 좋았다. 아, 정말 훌륭한 친구구나,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게 놀라워, 뭐 이런 경탄이 절로 나왔다. 그럴수록 내가 더 비천하게 보였다. 보이지 않는 내상(內傷)이다. 이 상처로 고등학교 내내 그 친구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던 것 같다. 그에겐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친구가 하는 모든 것이 정당하고, 멋지게 보였다. 내 눈에는 그 친구의 허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그 친구처럼 되고 싶었다. 나에게 친구는 강력한 힘으로 존재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


세상의 가장 불합리한 것이 인간의 착란으로 인해 가장 합리적인 것이 된다.


─파스칼, 『팡세』, 단장 208-(320)


파스칼(1623-1662)의 말이다. 파스칼은 사람들의 위계가 어떻게 생성되고, 굳어지는지 예리하게 설명한다. 일단 서로 싸운다. 그 싸움은 지배적인 자가 생길 때까지 계속된다. 여기까지는 힘이 센 자가 이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지나 지배자들이 싸움을 원치 않게 되면 이 지점부터 '상상력'이 작동한다(단장 207). 달리 말하면 지배자들이 현재의 승리를 싸움 없이 유지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상상력은 이성과 달리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훌륭하고, 나쁘고, 멋지고 흉하고, 정의롭고 부당한 것들이 상상력에 의해서 규정된다. 지배자들은 상상력에 의해서 자신의 힘을 유지한다. 자신들을 위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원래부터 왕이었던 것처럼 피지배자들이 자신을 경탄하게 만든다. 사물에 대한 매혹, 찬양, 두려움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역할에 의해 생성된다. 이런 것을 동원해서 상상력은 이성을 믿게 하거나 의심하게도 하고, 또 부정하게도 한다. 즉 상상력은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를 만든다(단장 81).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다 '습관'이 개입한다. 통치를 통해 왕을 두려운 사람으로 믿도록 길들여진다. 신앙을 통해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도록 길들여진다. 습관적으로 지배자를 찬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위계는 강고해진다. 이성은 이렇게 상상력에 의해 길들여진다. 이제 피지배자는 이 위계에 의해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 위계를 뒤집으려면 오래도록 단련되어 온 이 습관을 뒤집어야 한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습관은 곧 우리의 본성이다(단장 194)." 경탄이 습관이 된다. 위계가 본성이 된다. 이제 눈은 이 본성에 따라 세상을 본다. 착란이 만든 합리다.

공부 잘하는 그 친구는 아파서 공부 못했다는 말로 나의 상상력을 장악했다. 나는 사실이 그럴리 만무한 것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의 신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였다. 내 눈은 내것이 아니었다. 그와의 삶은 볼수록 기만이 된다.


나의 눈은 무언가에 장악된 상태인가?!


눈은 장부의 정기가 모인 곳이다. 정기들이 눈의 맥락과 합쳐지며 목계(目係)를 만든다. 이 목계가 위로 올라가 뇌에 닿는다. 또 눈은 영기와 위기, 그리고 혼백이 작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장의 변화된 신기가 눈의 시각을 이룬다. 물론 눈은 간과 관련된다. 그러나 광채를 환하게 비춰볼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신정(腎精)과 심신(心神)에 의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눈은 신체 곳곳에 퍼져 있는 정(精)이 모여서 작동하고, 마음에 있는 신(神)에 의해서 명확해진다. 그런데 심(心)은 군화(君火)로서 사람의 신(神)을 주관한다. 고요하고 안정되어야 상화(相火)가 잘 작용할 수 있다. 이 상화는 포락(包絡, 心을 감싼 것)이다. 포락은 모든 맥이 모두 눈을 영양하도록 한다(『동의보감』, 외형편 眼). 그래야 눈이 제대로 본다. 제대로 보려면 정을 보하고 신을 안정시켜야 한다. 상상력이 휘청거린 것은 바로 심과 정이 무너진 탓이다. 그 친구는 내가 중위권 성적에 허덕거릴 때, 나의 상상력을 흔들었다. 상상력이 기만이라는 사기(邪氣)에 물든다.

물론 친구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위계는 그 친구 허영심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가 그만큼 똑똑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그런 기만을 행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를 찬양해 줄 사람을 갖고 싶어 한다(단장 94-150)." 그러기 위해 자신의 결함을 타인들에게나 자신에게나 숨기기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즉 내 눈과 귀를 조작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기만이 실제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위계 위에서 자신의 신체를 확장했다. 타인들이 자신을 경탄하게 만들어 그 주변을 자신의 신체로 만들었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배당함으로써 그와 친하게 지내며 그에게 인정받았다. 그의 신체가 되어 줌으로써 인정받았다. 이건 공공연한 공범 관계다.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이런 공범 관계에 의해서 친구들과 맞잡고 허영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력으로 조작된 눈을 가지고서. 하여, 모든 것은 흔들린다는 생각을 가진 흔들리지 않는 눈이 필요하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자신의 눈을 의심하자. 놓친 순간이 있었는지. 눈에 보이는 세계는 광대한 자연에 비하면 한낱 점일 뿐이다.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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