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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주역서당

<주역탐구> 『주역』은 점치는 책일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7. 19.

『주역』은 점치는 책인가?



자공 왈 : 스승님 주역을 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자는 자신의 도를 펼칠 나라를 찾아 중국 천하를 주유한다. 하지만 춘추시대, 수많은 나라 가운데 공자가 뜻을 실현할 만한 곳은 없었다. 공자는 조국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를 가르치고 옛 서책을 정리하며 때를 기다렸는데 바로 그때 『주역』(또는 역)을 만났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주역』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는 책이 죽간을 이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죽간을 연결하는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였다.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위편삼절'(韋編三絶)이다. 평소에도 학문을 좋아하는 스승이었지만,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주역』을 애호하는 공자의 모습에 제자들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루는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질문을 한다.


선생님께서 옛날에 이 제자에게 가르치시길, 덕행이 없는 자는 신령에 쏠리고 지모가 모자라는 자는 복서로 점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것을 지당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말씀을 취하여 이를 열심히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늙어 가시면서 복서를 좋아하십니까?


─ 마왕퇴한묘백서(馬王堆漢墓帛書), 요(要)


지금과 마찬가지로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주역은 복서(卜書) 즉, 점치는 책으로 알려졌었나 보다. 그래서 자공은 예전 같으면 점치는 책을 멀리 했을 공자가 갑자기 ‘위편삼절’하는 까닭을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주역에 심취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주역〔은 점치는 책이었을까? 먼저 『주역』이 어떤 책이었는지부터 알아보자.
  


복희와 문왕 - 역을 짓다


팔괘를 만든 친절한 복희씨

처음 역을 지은 사람은 복희씨다. 복희씨는 7000년 전, 중국을 다스린 전설상의 인물로 성은 풍씨다. 이름하야 풍복희씨! 구수한 이름답게 그는 뛰어난 현군이었다. 문자가 없던 당시에 새끼 매듭으로 정치상의 법령부터 사사로운 거래까지 가능하도록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창조했고, 백성에게 가축을 잡아 길들이는 법을 가르쳤으며 시초로 점치는 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복희씨는 백성의 삶을 문명으로 이끌었고, 생활을 윤택하게 했다.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탐욕이 싹텄다고 한다.


복희씨 이전의 백성은 매우 순수하고 소박하고 누워서도 안정되고 앉아서도 만족하였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살았으며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았으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복희에 이르러 백성들은 자못 지식이 있게 되었으며 지식이 있는 자가 무식한 자를 속이기 시작하였다.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자를 두렵게 하고 구박하였으며 힘이 강한 나라는 작은 나라를 침범하였고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여 복희씨는 팔괘(역)를 만들어 그것을 통치하였다.


─ 논함, 제세편


복희씨가 어지러운 세상을 제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팔괘다. 팔괘는 문자가 없던 당시에 백성에게 인륜과 도덕을 일러주고 분쟁의 시비를 가리기 위한 표상체계였다. 그럼 팔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옛날에 복희씨는 천하의 왕이 되어 머리를 들어 하늘의 모양을 관찰하고 머리를 숙여 땅의 법칙을 관찰하고 새와 짐승의 무늬를 관찰하여 땅의 도리와 함께했으며 가까이는 자신의 몸의 각 부분에 근거하고 멀리는 여러 물건에 근거하여 팔괘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신명의 덕을 통해 만물의 상황을 분류하였다.


─ 『주역』(周易), 계사하전(繫辭下傳)


64괘 서당에서 차차 설명하게 될 팔괘입니다~

복희씨는 천지자연의 비의를 읽는 탁월한 관찰자였다. 그래서 팔괘는 단순히 복희씨의 창작물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이치를 읽고 유형화한 것이다. 예컨대 팔괘 가운데 첫 번째 괘인 건(乾)괘는 하늘을 나타낸 것이고, 두 번째 괘인 곤(坤)괘는 땅을 나타냈는데 이처럼 팔괘와 그것이 분화된 64괘가 모두 천지의 이치를 담고 있다. (앞으로 64괘 서당에서 괘를 하나하나 파헤쳐 볼 것이니 기대하시라!~) 이처럼 팔괘를 기본으로 구성된 역은 시대를 달리하며 변화하고 발전하다가 주나라에 이르러서 지금과 같은 역의 형태로 나타난다.


주나라의 문왕과 주공 부자가 바로 역을 완성한 인물이다. 우리가 흔히 역을 주역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나라 때 완성된 역’을 뜻한다. 그들의 치적을 살펴보면, 문왕은 복희씨가 만들어 놓은 64괘의 차서를 정하고, 괘명(掛名)을 붙이고, 괘를 설명하는 괘사(掛辭)를 만든다. 주공은 아버지 문왕의 유업을 이어받아 64괘를 구성하는 효에 대한 설명인 효사(爻辭)를 만들어 역의 완성을 도왔다. 


그런데 문왕이 역을 지을 때도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때는 주지육림으로 유명한 은나라의 폭군 주왕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문왕은 기산(岐山) 일대를 다스려서 기백(岐伯)으로 불렸다. 그런데 정치를 잘한 탓에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그것을 시기한 주왕의 눈 밖에 나서 유리옥(羑里獄)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문왕은 한 치의 원망도 없이 감옥에 앉아서 주역의 괘사를 지었다. 문왕은 주왕을 원망하거나 세상을 탓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 짓는 일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는 이 무도한 세상도 천지에 이치에 따라 언젠가는 바른 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그때 자신의 역이 천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대로 주역은 후대에 공자를 만나 사람들에게 ‘지천명(知天命)’의 길을 열어준다.    



공자, 지천명하다


공자는 『주역』을 보고 ‘아! 복희씨가 천지의 이치를 본떠 팔괘를 만들고, 문왕이 괘의 이치에 따라 괘사를 짓고, 주공이 효사를 지었구나’하고 감탄한다. 그리고 자신도 후세 사람들이 역을 쉽게 이해하게 하려고 열 가지 해설전을 짓는데 바로 ‘십익전(十翼傳)’이다. 익(翼)은 ‘날개’ 혹은 ‘돕다’라는 뜻으로 공자는 후학들이 자신의 해설을 날개 삼아 광대하고 깊은 역의 바다를 가로지르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공자는 십익전을 술이부작(述而不作) 했는데, 술이부작이란 ‘옛 성현의 말을 전술하지(述而), 잘 알지 못하면서 지어내지 않는다(不作).’는 뜻이다. 천하의 공자도 세 성현(복희, 문왕, 주공)의 가르침을 본받을 뿐, 마음대로 창작하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에 복희씨도 천지에 펼쳐진 자연의 이치를 팔괘로 나타냈을 뿐, 함부로 지어내지 않았으니 술이부작의 시작은 복희씨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성인이 지은 글을 경(經)이라고 하고, 성인보다 한 단계 낮은 현인이 지은 글을 전(傳)이라고 하는데 십익전은 성인인 공자가 지은 글이지만 전이라고 했다. (복희, 문왕, 주공의 역은 역경이라고 하고, 공자가 지은 십익전을 역전이라고 한다.) 공자가 『주역』의 가르침을 큰 스승으로 삼고 존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이렇듯 『주역』을 ‘위편삼절’하고 ‘술이부작’하여 역전을 쓰면서 역의 이치를 몸에 새겼다. 북송의 형병(932-1010)에 따르면 공자가 『주역』을 공부한 시기가 공자의 나이 47~50세 무렵이라고 하니, 그의 기록대로라면 약 3년 만에 『주역』을 통달한 셈이다. 그리고 공자는 드디어 “나이 오십에 천명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쉰 살을 지천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공자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천명이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의 명을 아는 것,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원리를 안다는 말이다. 만물의 원리라고 해서 어려울 것은 없다. 그것이 바로 ‘역'(易)이기 때문이다.


지...지천명???


역은 ‘바뀔 역’ 혹은 ‘쉬울 이’라고 쓰이는데 그 말처럼 정말 쉽다. 달이 차면 기울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것처럼 쉬지 않고 변화하는 게 역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주 그것을 잊어버린다. 아무리 강성한 제국도 극에 이르면 망하고, 천하를 주름 잡던 영웅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제후에서 범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귀와 권세를 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공자는 숱하게 보았다.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이 고정불변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단 하나,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을 뿐이다. 죽음마저도 끝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 시대의 사람들은 탐욕에 집착하여 천지의 이치를 망각하였다. 주역의 본의는 퇴색된 채 점서로만 활용됐던 것이다. 이쯤에서 앞에 언급했던 자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을 들어보자.


공자가 답하길 ‘군자는 곡척(직각으로 굽은 자)으로 말하는 법이니, 앞길이 길하면 그냥 가면 되는 것이고 불길하면 재주로 피할 수 있다. 그 요지를 살피는 자는 덕을 그르치지 않느니라”라고 했다. 이어 공자는 상서에는 결손이 많지만 주역은 망실된 곳이 없어 옛말을 전하고 있다. 나는 주역의 점술적 사용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다.


─ 마왕퇴한묘백서(馬王堆漢墓帛書), 요(要)


공자는 『주역』의 점술적 사용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주역』이 자신의 일신의 영달을 위한 점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공자는 천지자연이 변화하듯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천지가 부여한 일(덕)을 묵묵히 수행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여 천지의 흐름을 알기 위해 주역을 공부했던 것이다. 예컨대 문왕이 유리옥에 갇혔을 때 하늘이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역을 지었던 것도 세상에 덕을 펼치기 위한 행위였다. 천지의 흐름을 먼저 안다는 것은 길흉화복을 알아서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그 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소명을 펼치는 것이다. 이렇듯 공자는 『주역』을 통해 사람들이 천지자연의 이치를 알게 하고, 그 이치가 세상의 덕으로 펼쳐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옛날부터 역은 동양학의 뿌리 혹은 만학(萬學)의 제왕이라고 불렸다. 그만큼 동양에서 역의 영향력은 깊고도 넓은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주역』은 점치는 책이나 미신으로만 치부된다. 『주역』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곳도 점집이나 특정 종교단체다. 동양 최고의 지혜가 점, 미신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갇혀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아깝다. 그래서 우리 '64괘 서당'이 나섰다! 『주역』의 지혜와 삶의 비전을 함께 찾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험준하게 버티고선 『주역』이란 산맥 앞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황이라 앞으로 많이 좌충우돌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발자국 내디딘 게 어딘가. 『주역』은 3대가 적선을 해야 배울 수 있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주역』을 만난 것만 해도 조상님의 크나큰 공덕 덕분인 것 같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도 64괘 서당의 글을 읽고 함께 공덕을 쌓아 가길 바란다. 


64괘 서당은 8월 2일에 다시 찾아옵니다.



곰진(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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