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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둔하다고 했지?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by 북드라망 2013. 6. 24.

몇 해 전, 인물사진으로 유명한 카쉬의 사진전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가 찍은 인물들은 처칠, 샤갈, 앤디 워홀, 헤밍웨이, 오드리 햅번 등등 그당시 핫한(!) 유명인사가 많다. 특히 처칠을 찍었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카쉬는 손에서 시가(담배)를 놓지 않는 처칠의 손에서 시가를 빼앗아(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다소 위험한 방법을 통해) 고집스럽고 뚱해보이는 처칠의 표정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것이다. (다른 사진가들은 처칠의 멋진 모습만을 담으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카쉬가 찍은 오드리 햅번의 사진은 당시 사진전을 대표하는 포스터에 사용되었을 정도로 아름답고, 유명하다. 그런데 전시회에서 마음에 꽂힌 사진이 한 장 있었으니, 첼로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뒷모습이었다. 당시에는 그가 누구인줄 몰랐는데; 알고보니 그는 파블로 카잘스라는 첼리스트였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악보를 헌책방에서 발견해 초연한 인물이라 한다. 인물 사진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는 흔치 않은 편이다. 그래서일까, 이 사진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Pablo Casals, 1954


그 이후, 다시 카잘스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수업을 듣다 이 사람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카잘스는 90세가 넘어서도 매일 첼로 연습을 거르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하는 것이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답은 '연습할수록 조금씩 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꾸준히 한다는 것! 이러한 꾸준함이 지속되기 쉽지 않기에 카잘스가,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담은 카쉬의 사진이 더욱 좋아졌다.


일흔여섯의 노인은 손에서 공부를 좀체 놓지 않았다. 다리 부러진 돋보기를 코끝에 비스듬히 걸치고 끊임없이 베껴 쓰고, 메모하고, 정리했다. 평생 그렇게 베낀 책이 키를 넘겼다.

─어르신! 그 연세에 무슨 영화를 보시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하십니까? 이제 그만 쉬셔도 되잖아요. 바람도 좀 쐬시고요. 건강 다치실까 걱정입니다.

노인은 돋보기 너머로 눈길을 잠깐 주더니 다시 붓방아를 계속한다.

─그만두세. 누가 말리겠나, 저 고집을. 황소고집일세, 황소고집! 저 나이에 내년에는 과거에라도 나가실 모양일세. 쯧쯧!


- 정민, 『삶을 바꾼 만남』, 12쪽


일흔 여섯의 나이에도 책을 베껴쓰는 이 노인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만난 제자 황상이다. 고집스럽게 스승의 가르침을 행하는 이 노인의 모습에서, 매일매일 연습하는 카잘스의 뒷모습이 겹쳐졌다. 황상은 스승이 이야기해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황상이 다산을 만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그는 다산의 서당에 다녔다. 어느날 다산은 수업이 끝난 후 황상에게 남으라고 하며, 지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한다고 게을러서는 못쓴다고 당부했다. 소년 황상은 자신이 너무 둔하고, 앞뒤가 꼭 막혔으며, 답답한데 자신과 같은 사람도 공부할 수 있냐고 스승에게 물었다. (이부분을 읽으며 황상의 마음에 이입되고 말았다. 이해력이 낮아 늘 다시 확인해야하고, 기억력이 나빠 적어놓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시야가 좁아 늘 눈앞의 일만 보는 스스로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런 제자의 질문에 다산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한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같은 책, 35~36쪽)


감동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보면 여기까지는 익숙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황상은 이때 받은 가르침을 쭉 지켰다. 60년이 지나 황상이 쓴 「임술기」에는 그가 스승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담고 있었음을, 늘 받들어 따랐음을, 죽을 때까지도 이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노라는 선언이 담겨있다. 마음에서 왈칵, 하고 무언가 올라오는 부분은 이 지점이다. 유명한 문장가가 된 것도 아니고, 유명한 관리가 된 것도 아니지만 황상은 늘 꾸준히 공부하고, 공부하고, 공부했다.


못생긴 발, 하지만 아름다운 발.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이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어떤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또다른 목표를 찾아야만 한다. 목표가 성취되면 기쁘겠지만 새로운 목표를 찾기 전까지는 다소 시들한 상태가 될 것이고, 목표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못남을 자책하는데 신경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10년이면 뭐라도 되겠지, 라는 막연했던 내 생각을 뒤집어버린 황상. 그는 무려 60년을 꾸준히 공부했다!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늘 마음을 다하는 꾸준한 태도가 아닐까. 매일 첼로 연습을 했던 카잘스의 뒷모습에 막연하게 마음이 갔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카잘스와 황상이 보여준 삶을 닮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


언제나 허물을 적게 하려 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하니, 다만 하늘이 내린 재능이 짧고 얕음을 한할 뿐입니다. 또 하물며 쇠약한 모습에다가 나른하기 짝이 없고 보니, 관 속에 나아갈 날이 멀지 않습니다. 비록 가까운 몇 발짝 사이에도 지팡이가 없이는 일어나 갈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산방에 처박혀 하는 일이라곤 책 읽고 초서하는 것뿐입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말리면서 비웃습니다. 하지만 그 비웃음을 그치게 하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 날마다 저술만 일삼아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났습니다. 제게 삼근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것을 얻었다." 몸으로 가르쳐주시고 직접 말씀을 내려주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합니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같은 책, 554쪽)


삶을 바꾼 만남 - 10점
정민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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