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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아파서 살았다

나는 왜 아픈가, '몸에 대한 무지'에서 '앎에 대한 열정'으로!

by 북드라망 2013. 6. 21.

하루 종일 비가 오던 날, <아파서 살았다>의 오창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저녁을 먹고,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데이트 코스인 삼청동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다보니 “완전 데이트 코스네요~”라며 함께 웃었습니다.



처음 궁금했던 것은 오창희 선생님이 이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었을 예전 일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래 전 힘들었던 시절의 글을 시간이 흐른 후 읽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그 시절 일기를 다시 읽었을 때 꼬박 하루를 앓았어요. 잊고 있었던 그때의 통증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거든요. 몸 안 어딘가 저장되어 있다가 일기를 읽으면서 다시 환기된 것 같아요. 최근에는 손목이 많이 아팠는데, 왜 이렇게 아플까 생각해보니 4~5년 전만 해도 늘 아파서 케토톱을 붙이고 다녔던 것이 떠올랐어요. 침뜸 치료로 많이 완화되었기 때문에 아팠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거죠. 통증으로 통해 최근 어머니 간호를 하면서 내가 내 몸을 잘 돌보지 못한 게 아닐까, 이런 신호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내 몸을 돌보면서 어머니를 돌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당시 일기를 읽으면 출구없는 미로를 헤맸던 느낌이 들어요. 아마 그래서 그때의 기억이 몸에서 반응해서 하루를 앓았던 게 아닐까 싶어요.


때로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하면서 신을 원망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생님도 내가 왜 아플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보신 적이 없는지 궁금했습니다.


고등학교때는 공부를 안 하고, 야구장을 다니거나 청백전을 보러 다니는 등 많이 놀러 다녔어요. 그래서 지방으로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딱히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예요. 국어국문과를 진학했고, 음성학에 관심이 있었어요. 막연하게 '글'이나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가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아픈 동안에도 방송통신대학을 등록하려고 했는데, 강의를 실제로 참석해야하는 것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요. '노인 상담'같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구요.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내가 왜 아플까, 를 생각한 적은 있어요. 그런데 내가 아프지 않으면 가족 중에서 누가 아파야 할까를 떠올려 보니, 부모님은 안 되고, 가장이 된 오빠도 안 되고, 언니도 안 되고… 어린 조카들도 모두 아프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때 결혼한 것도 아니고, 커서 손도 덜 가고… 이런거 저런거 다 생각해봐도 제가 제일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생각을 한 후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제가 놀랐던 부분은 이 지점입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처음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그러다 체념하게 되고,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는 공식(?) 비스무레한 것이 큰 병에 걸린 사람들의 태도라고 들은 것 같거든요. 그런데 오창희 선생님의 말씀에서는 체념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도 굉장히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기운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아파서 살았다’라는 코너명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난 아닌데~”라고 생각했다는 오창희 선생님. 하지만 글을 쓰면서 마음의 변화가 일었다고 합니다. 지난 포스팅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수업 중 루쉰의 '적막'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늘 아프기만 하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즐거운 일도 많고, 웃을 일도 많았다는 것. 어쩌면 저는 오창희 선생님의 20대가 너무 힘들고, 괴롭게만 보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죽도록 아픔을 겪었는데도, 늘 아픈 상태인데도 자기가 왜, 어떻게 아픈지를 모른다. 장기 하나를 뚝 잘라내는 대수술을 하고서도 자기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른다. … 몸이 아프면 성질도 나빠지고, 존재의 축이 자꾸 허물어지는데도 자기를 돌아볼 줄을 모른다. 기껏 한다는 게 한탄과 원망, 죄의식과 무력감 등, 니체가 비웃어 마지 않았던 '노예의 도덕'으로 충만해진다. 자기수련이란 이 배치에 대한 저항과 탈주로부터 시작된다. 단순히 통증이 사라진다는 의미의 치유가 아니라, 왜 아픈지, 이 고통의 의미가 뭔지, 이것이 나를 둘러싼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 '무지의 늪'에서 '앎에 대한 열정'으로의 대전환.


─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439~440쪽


그리고 지금, 오창희 선생님은 스스로의 몸에 대해 너무 몰랐음을 알게 되면서, 이것이 '앎에 대한 열정'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같은 이름의 병은 비슷한 특징을 보이지만 어떤 사람이 겪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병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듣기에 너무 힘들 것 같은 병도 누군가에게는 견딜 만한 시간이었고, 별로 심해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병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병은 '온통 쇠로 된 방에서 홀로 갇혀 외치는 적막 속 외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태도로 병을 만날 것이냐, <아파서 살았다>에서 만나는 생생한 이야기들을 통해 조금씩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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