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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

노자에게 '정치'를 묻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

by 북드라망 2013. 6. 19.

하늘의 시대, 노자와 황제



무위의 정치


흔히 정치라고 하면 어떤 국가 혹은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 또는 어떤 제도를 통해 자유나 평등이라는 가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일종의 ‘작위’를 떠올리기 쉽지만, 작위 대신 ‘무위’를 강조한 사상가가 있다. 바로 노자다. 잘 알다시피 노자는 대략 기원전 5세기의 인물로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노자의 철학은 그동안 도(道)라던가, 무(無)라던가 형이상학적 논의로 평가되어 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자연철학을 실천적 영역을 배제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고대 철학과 마찬가지로 노자에게서 역시 자연과 인간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자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인간의 영역, 즉 정치의 영역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거꾸로 인간에 대해 말한 것은 자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 즉 이는 둘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연 철학을 정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이유다. 이처럼 고대 중국의 철학은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관찰 속에서 사회원리의 규범, 정치원리의 규범을 제시하고자 했다. 따라서 노자에게 정치란 천지만물이라는 신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자는 어떤 맥락에서 '무위'의 정치를 이야기했을까?


이처럼 자연과 생명이 사유의 근원이라면 생명의 본질 속에서 법칙과 원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병이 왜 발생하는가라는 문제와 정치에서 왜 혼란이 발생하는가는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다른 방식의 대답이었다. 따라서 노자의 정치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자연관, 그리고 신체관을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

흔히 노자의 정치사상을 이야기할 때 드는 예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최상의 군주는 백성들이 다만 임금이 있다는 것을 알 뿐인 군주이다. 백성들이 다정함을 느끼고 칭송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지배자를 두려워하는 정치는 그 아래이며 백성들이 업신여기게끔 되면 가장 낮은 지배자다. 지배자에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실함이 부족하면 백성들로부터 신용을 얻지 못한다. 최선의 군주는 ‘무위의 정치’를 하기 때문에 공을 이루어도 백성들에게 자랑하지 아니하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노자, 『도덕경』


‘무위의 정치’! 임금이 있다는 것을 알 뿐, 공을 이루어도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군주야말로 최상의 군주라는 것이다. 노자가 “간섭이 적어야 스스로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계속 불 수 없고, 소나기도 종일 내릴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바로 천지가 하는 것이다. 천지도 그런 일을 오래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라고 말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그의 사상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이처럼 무위의 사상이다. 천지도 오래동안 간섭을 할 수 없듯이 정치란 어떤 인위적인 간섭이나 지배가 아닌,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위란 자연의 원리를 따라 만물이 스스로 하도록 도울 뿐 인위를 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게 하며, 욕심을 없게 하되 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항상 백성을 무지, 무욕하게 하고, 무릇 지혜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작위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무위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백성을 무지, 무욕하게 하고, 통치자는 작위를 삼가는 것이 노자의 정치사상의 기본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무지는 단순히 지혜없음이나 백성을 무력하게 만들어 통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우민화와는 다르다. 오히려 이 때의 무지는 ‘앎을 비워내는 지혜’라는 의미에서의 ‘무지’를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무지는 ‘지의 없음’이 아니라, ‘분별지의 그릇됨을 아는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일까?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


이처럼 노자에게 바람직한 군주란 “만물이 스스로 하게 도와줄 뿐, 감히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일러 정(靜)이라 하는데, 명(命)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명을 회복하는 것은 늘 그러한 이치라 하고, 늘 그러한 이치를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늘 그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제멋대로 나쁜 일을 하게 된다. 늘 그러한 이치를 알면 포용하게 되고, 포용력이 있으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할 줄 알면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왕 노릇을 하는 일은 곧 하늘에 부합하는 것이며, 하늘에 부합하는 일이 곧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하면 오래 갈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노자, 『도덕경』


<원령공주>속 신의 모습, 신의 발밑에 닿은 식물들의 소생과 소멸이 교차되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즉 왕 노릇을 하는 일은 하늘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 하늘에 부합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정치란 이 이치를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정치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어 가게 놓아두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소유하려고도, 자랑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주재하려 하지도 않는다. 단지 낳고 기를 뿐이다. 


도는 높고 덕은 고귀하지만, 만물에 군림을 하지 않고 항상 저절로 되어 가게 놔둔다. 그러므로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기르고 양육하며 안정시키고 성숙시키며 돌보고 덮어준다. 무엇을 낳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무엇을 길러 주고도 그것을 주재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을 현덕이라고 한다.


노자, 『도덕경』


따라서 이때 말하는 도와 덕은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생명이 그저 만물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과정이라면 도와 덕 역시 낳고 길러주는 생명현상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때의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생명을 낳고 기르는 행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재하려 들지 않음을 일컫는다. 절대화와 고정화된 가치와 개념으로서의 통치가 아닌 생명의 방식을 따르게 하는 것이 무위다. 즉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위적인 개입이 아닌 자연 그대로 살아가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이 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물을 꼽고 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사는 곳으로는 땅 위가 좋고, 마음은 못처럼 깊이 것이 좋고, 벗은 어진 사람이 좋고, 말은 믿음이 있어야 좋고, 정치나 법률은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 좋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능숙한 것이 좋고, 행동은 적당한 시기를 아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물은 이에 제일 가깝다.


노자, 『도덕경』


모든 곳에 스며들어 모든 것과 연결되지만 위계적이지 않은 물의 특성!


모든 곳에 스며들어 모든 것과 연결되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듯이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이데아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물의 특성은 타자와의 공존, 곧 포용과 관용의 측면에서 생명정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이나 바다가 이 세상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은, 아래이기를 좋아해서이다. 그래서 모든 계곡의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구절처럼 왕은 가장 아래에 처하는 자이다. 이처럼 생명의 특성은 그대로 정치에 배속된다. 


사람이 태어나서는 부드럽고 약하나,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초목도 태어나서는 부드럽고 연하나, 죽어서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들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들은 삶의 무리이다. 그래서 병력이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여지며, 크고 강한 것은 아래에 처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처한다.


노자, 『도덕경』


이처럼 생명은 부드럽고 연한 것인 반면, 죽음은 굳고 딱딱한 것이다. 굳어버려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따라서 병력이 강하면 오히려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죽어있는 신체들의 합으로서의 국가와 하늘을 닮아가기 위한 살아있는 신체들로서의 노자식의 공동체의 대비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노자에게서 삶이란 땅을 본받고, 하늘을 본받고, 도를 본받고, 자연을 본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도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임금도 크다. 우주 가운데는 이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왕도 그 하나에 속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


노자, 『도덕경』


이때 ‘자연(自然)’이란 말은 요즘 쓰는 방식과 같이 단순히 외부의 환경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요즘 쓰이는 자연보호라는 말에서 자연은 nature를 의미하지만, 이 nature의 번역어로서 자연이라는 말은 근대에 만들어진 번역어일 뿐이다. 원래 자연은 한자 그대로 自-然, 즉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의미다. 즉 자연은 도에 내재하는 필연의 힘으로서 자기 전개의 과정으로, 존재 자체의 존재방식, 운동방식을 지칭한다. 이는 인위, 작위에 반대되는 말로, 무위라는 말과 유사하다. 즉 그에게 무위란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에서의 자연, 천지만물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무위란 자연의 이치를 본받는 것으로,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생명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무위인 것이다!



하늘의 시대, 질병의 의미


그렇다면 노자가 이토록 무위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위를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던가,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방관적 태도가 아닌 방식이라고 할 때 이때 무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보기 위해서 당시의 사유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보기 위해 고대 동아시아에서 신체와 질병관을 살펴보자.  

노자가 살았던 당시의 의서들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마황퇴묘에서 발견된 의서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이 역시 노자가 살던 시대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고,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아직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동아시아에서 체계적인 의학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아마 『황제내경』을 그 시작점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황제내경』은 노자의 『도덕경』이 나오고 한참 후에 편찬된 저작이다. 그러나 『황제내경』의 일부 내용은 전국 시대에 쓰여졌다고 평가되며, 이를 책으로 묶은 시기가 전한 중기이거나 말기인 것으로 보이지만 고대 동아시아에서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원형적 인식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황제내경이 도가 계열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노자의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내경』에서 중요한 것은 하늘이라 할 수 있다. “무릇 사시(四時)의 음양변화는 만물의 근본이다. 그래서 성인은 봄, 여름에는 양기를 기르고 가을, 겨울에는 음기를 길러 그 근본을 따랐다. 그리하여 만물과 더불어 생장수장의 문에서 부침하였다. 그 근본인 음양을 거스르면 몸의 근본을 해쳐서 진기가 무너진다”라거나 “사시의 음양변화는 만물의 시작이자 끝이며 죽음과 태어남의 근본이다. 이를 거스르면 재해가 생기고 이를 따르면 혹독한 질병이 생기지 않으니 이를 득도(得道)라고 한다”라는 구절에서처럼 천지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시 음양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건강의 핵심이었다. 이를 따르면 질병 없이 오래 살 수 있지만 이에 거스르면 재앙이 이른다.

이처럼 고대의 병이란 주로 하늘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이때의 하늘은 단지 천체상의 하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에 하늘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땅의 이치를 사용하지 않으면 재해가 이른다” 내경 소문의 구절처럼 하늘과 땅을 포함한 음양의 기운을 의미한다.

우주의 1년인 129,600년은 사람의 호흡수, 맥박수와 같다. 평균적으로 사람은 1분에 18회 정도 호흡하고 72회 정도 맥박이 뛰는데, 이 두 수를 합하면 90이 나온다. 여기에 한 시간에 해당하는 60분을 곱하면 5400이라는 수가 나오고, 여기에 하루 24시간을 곱하면 129,600이 나온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을 소우주라 하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하늘과 땅은 사람과 하나이며, 이 자연의 기운에 거스르는 것이 병을 발생시킨다고 보았다. 내경 소문에서 “겨울에 한에 상하면 봄에 반드시 온병을 앓고, 봄에 풍에 상하면 여름에 손설하게 되고, 여름에 서에 상하면 가을에 반드시 해학하고, 가을에 습에 상하면 겨울에 해수하게” 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그렇다. 하늘에는 사시와 오행이 있어 생장수장하고 한서조습풍을 생하는데, 이것이 사람의 오장의 오기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때에 맞게 사는 것, 그것이 건강이고 질병에 대한 대처방식이었다.

즉 이 시기 건강과 질병의 핵심은 하늘의 변화하는 기운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당시의 건강과 질병에 관한 이론인 운기론이란 이처럼 때를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관한 학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경에는 증 자체가 많이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있더라도 증상 그 자체의 배열이 아니라 때에 맞춰 증상이 배열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해에는 이런 병이 있다거나, 어떤 때는 기후가 이렇기 때문에 비기가 허하고, 간기가 실해 이런 증세가 나타난다는 식이 그렇다.

아직 체계적이고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지 않았던 상고시대는 이처럼 하늘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주요 질병은 하초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 당시 생명이란 생물학적 생명력이 중심이 된 시대였다. 즉 어떻게 하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가 건강한 삶의 핵심 문제였다. 달리 말하자면 정(精)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때 정을 담당하는 것은 하초, 장부상으로는 간(肝)과 신(腎)이다. 여기서 신장은 생식, 간은 근육을 담당한다. 이는 눈치 챘을 수도 있겠지만 동물성의 기본을 이룬다. 즉 이 시기는 야생스러움을 잘 가지고 있는 몸이 건강한 몸이었고, 이를 지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건강 역시도 인위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주가 아니라, 이 본래의 정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하늘의 시대, 그들에게는 어떻게 정을 잘 보존할 것인가, 하늘의 변화에 잘 순응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황제내경』에서도 어떻게 수기, 정을 잘 보존할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 조수가 하루에 두 번인데 비해, 사람의 호흡은 하루에 13,500번이기에 바다는 영원하지만 사람은 100년도 못되는 수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이 시간성을 자연과 동일하게 끌고 갈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호흡수련을 통해 최대한 하늘의 호흡과 유사하게 맞추려 했던 것이다. 즉 건강에서 역시 자연에 따르는 무위가 중요한 것이었다. 



무위의 공동체


이렇게 볼 때 도가에서의 무위는 단순히 하지 않음이라거나, 비행동의 차원이 아니다. 사람의 건강과 질병이 어떻게 하늘에 잘 적응할 것인가의 문제라면 정치의 문제 역시 어떻게 하늘의 뜻에 잘 부합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천지만물을 따르는 것, 즉 스스로 그러함에 따르는 것이다. 인위적인 치료가 신체를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오히려 이상적인 신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처럼 정치 역시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만물의 이치인 도로 돌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지나친 개입이 아니라 다시 그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장 뤽 낭시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어떤 비행동으로서의 무위, 수동성과 열림으로서의 무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락시스’의 의미로 ‘행동’을 이해한다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 행동이 아마 ‘비-행동’ 일 것이며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도래하게 내버려둠’ 또는 ‘존재하게 내버려둠’-그것은 자유주의에서 오직 생산적 행동이 만들어낸 생산물들에 대한 관심에 따라서만 말하는 ‘하게 내버려둬, 그냥 내버려둬’가 아닙니다-과 같고, 우리의 생산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것-그것을 ‘척도 없는 것’, ‘이름 붙일수 없는 것’, ‘무한’, 나아가 ‘불가능한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은 우리 위에 직접 ‘영향을 주지도’ 않으며, 우리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행동입니다.


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물론 장 뤽 낭시가 바타이유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한 무위(désœuvrement)를 노자의 무위와 등치시켜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둘이 이야기하는 무위에서 어떤 동일한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위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비-행동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작위와 반대되는 것으로, 오히려 소극적인 방식이 아닌 적극적인 방식의 안함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자신을 변형시키는 어떤 비행동으로서의 무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자신을 변형시키는 '비행동'으로서의 무위!


이를 장 뤽 낭시는 ‘도래하게 내버려둠’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 무위라는 수동성은 단지 아무것도 아닌 방식이 아니라 하늘을 받아들이는 노자식의 적극적 무위와 연결지어 사유할 수 없을까? 아니, 노자는 이러한 무위를 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다. 노자식으로 말하자면 무위의 공동체란 천지만물이 그러한 것처럼 스스로-그러함 이라는 자연이라는 의미에서 살아있는 생명의 신체로서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_담담(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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