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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남들과 같은 삶을 살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을 고민할 것인가

by 북드라망 2013. 6. 12.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해체하라 !
 


 1. 매달리거나 내동댕이쳐지거나


프롤레타리아는 항상 불안정에 내던져진다. 부르주아지가 만들어 놓은 일자리를 온종일 찾아 나선다. 꿈과 삶은 상품이 되어, 경쟁과 변동에 이리 저리 움직인다. 불안정의 그물에 내던져진 위태로운 존재. 그야말로 정처 없다.


정리해고, 개인들에게 이 단어의 파급력이란?!


정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온통 한심해진다. 아이와 엄마는 입시 도박에 휩쓸리고, 꽃다운 청춘들은 취직준비로 함정에 빠진 생쥐마냥 버둥거린다. 직장인들은 월급과 승진이 자신을 갉아 먹는걸 눈뜨고 지켜본다. 서점 가판대에 깔려있는 자기계발서들은 오직 잘 매달리는 법일 뿐이다. 하지만 기막히게도 대부분 도로 빼앗기고 만다. 학생들은 산더미 같은 사교육비만 남기고 판돈과 시간을 빼앗긴다. 대학생들은 껍데기 스펙만 남기고 아름다움과 정신을 빼앗긴다. 직장인들은 빚과 불안만 남기고 건강과 웃음을 빼앗긴다. 매달린 것들의 정점에는 항상 부르주아의 용의주도한 계산과 프롤레타리아의 예정된 실패만 서성거린다.

아무 신문이나 집어 들어도 이는 쉽게 보인다. 사회면 기사 한 자락. ㅡ 기사의 주인공은 운영하던 식당이 망해 현재 5,600만 원의 부채를 지고 있다. 월 소득은 60만 원. 공공임대주택의 보증금으로 들어가 있는 1,000만 원이 그의 전 재산인데 자활센터에서 받는 소득으로는 부채를 갚아나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개인파산을 진행키로 결심했다. 한마디로 아득바득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도 희한하게 삶은 거꾸로 궁핍을 향해 간다. 생존 그 자체가 마이너스인 셈이다. 자신들의 최소한의 삶마저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국가는 스피커를 들고 이렇게 떠든다. : “지금은 위기입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 졸라매야 나중에 파이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스피커로는 소비를 권하며 대박의 꿈을 부추긴다. 이 가증스런 선전과 함께 허망한 허위가 사회 곳곳에 자라난다. 너도 나도 주식과 부동산 같은 한탕에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한다. 우리들의 감각은 한탕주의에 쉽게 젖어든다. 그래야 사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보았듯, 서민들의 소득은 빚을 갚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설상가상으로 금융위기는 한 푼 두 푼 모아둔 종자돈까지 고스란히 날려버린다.

이제 국가의 ‘위기’는 우리들의 미래까지 가져가 버렸다. 과거만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삶도 담보로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삶은 매달리거나 내동댕이쳐진다. 지켜야 할 자신의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자들, 프롤레타리아는 이제 더 뒤로 갈 곳도 없다.



2. 미래를 움켜진, 참으로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부르주아의 그럴듯한 삶은 갈고리를 품은 삶이다. 도처에 드리워진 낚시 바늘. 이곳에서 30평짜리 아파트는 부르주아가 던지는 미끼다. 몇 푼의 월급은 그 미끼를 동여맨 부르주아의 낚싯줄이다. 이를 물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것은 부채와 노동뿐이다. 부르주아 중산층의 꿈을 쫓을 때, 우리는 갈고리에 꿰인 물고기마냥 점점 생명력을 잃어간다.


장 베로, <사교계의 밤>



갈수록 패배가 명확해지는 싸움이다. 하지만 물고기는 매번 미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로또보다 희귀한 신분 상승의 꿈을 안고, 저 미끼는 낚시꾼의 미끼가 아닐 거라고 믿고 오늘도 달려야 하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럴 이유가 있었다면 계속 달려야 하겠지. 하지만 남들 눈에 그럴 듯한 삶을 꾸리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었다면, 별 생각 없이 그것이 바른 삶이라 믿어온 것에 불과하다면, 어찌해야 하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잃을 수밖에 없는 도박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나.

되돌려 생각해보자. 야근에 헉헉거리며 긁어모은 돈으로 사교육을 시키는 대신, 내 자식이 진짜 어떤 삶을 살고 무슨 지식을 얻으면 좋겠는지 고민하는 것. 집사고 주식투자하느니, 당장 내 옆에 있는 이웃과 어떻게 지내고 무슨 활동을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그럴듯한 차를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는 대신, 대중교통으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전용차선을 실컷 달려가는 것. 요컨대 부르주아의 그럴듯한 삶을 꿈꾸는 대신, 갈고리 품은 삶을 허우적거리며 따라가는 대신, 패배가 명확한 도박을 계속하는 대신, 내가 진짜 행복해질 방법이 뭔지 근본부터 고민하는 것. 부르주아의 삶은 멀기만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의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맑스의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가 되려고 뼈 빠지게 노동하는 그런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부르주아의 삶의 양식을 거부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들은 자기 자신의 지금까지의 전유 양식, 따라서 또 지금까지의 전유 양식 전체를 철폐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력들을 장악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지켜야 할 자신의 것이라고는 없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적 안녕과 사적 보장을 파괴해야만 한다.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1』, 「선언」, 박종철출판사, 411p


그들은 부르주아의 삶을, 그럴 듯한 아파트와 풍요로운 가족으로 상징되는 중산층의 삶을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다. 그것 대신 자신들의 실질적 행복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 그 자체다”(「헤겔 법철학 비판」, 선집 1권, 15p). 이들은 부르주아 세계의 모습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삶의 비전과 경로를 꿈꾼다. 부르주아가 만들어 놓은 ‘위기’와 ‘미래’를 해체하고, ‘지금 여기’에서 즉시 새로운 ‘미래’를 움켜진다. 참으로 혁명적이라는 것, 그것은 부르주아가 되지 않는 것이다!


기존의 삶을 해체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은 새로운 삶의 비전과 경로를 꿈꾸게 만든다.



당신, 부르주아 맞나요? 가만히 있어도 집값 오르고, 아이들을 높은 확률로 명문대에 보낼 수 있고, 돈으로 건강관리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요? 만약 아니라면, ㅡ행여 착각이라도 이런 착각은 정말 위험합니다ㅡ 그런 사람이 되려는 꿈을 버리자. 불가능하다. 대신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 저 옆으로 난 프롤레타리아의 느린 산책로로 들어 가자. 맑스의 프롤레타리아가 그랬듯, 기존의 삶을 해체하고 새 삶을 꾸리자. 잃을 것은 차용증이요 환상뿐이지만, 얻을 것은 이 세계 전체이다. 그래서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해체하라 !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1 - 10점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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