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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아파서 살았다

내게 힘이 된 것들 -부모님과 책읽기, 일기 쓰기

by 북드라망 2013. 6. 7.

내게 힘이 된 것들




어린 시절엔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역시 놀이를 참 좋아했다.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다닐 동안엔 발길 닿는 곳이 모두 놀이터였다. 학원이 없던 복된(!) 시절, 학교가 파하면 운동장에서 해가 설핏 기울 때까지 놀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땅따먹기, 오케바닥(돌차기?) 같은 건 물론이고 남학생들이 주로 하는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도 참 많이 했다. 몸집이 좀 커진 중학교 시절에는 십자가생, 사다리가생(‘가생’이 무슨 뜻인지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같은 여럿이서 함께 하는 역동적인^^ 놀이들을 하며 자랐다. 탁구도 즐겨 쳤는데 누우면 천장에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고 책을 펼치면 그 위로도 공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좋아했다. 방학이면 오빠들이 축구나 농구를 하는 주변을 맴돌았고 스케이트도 타러 갔다. 집으로 갈 때도 신작로로 가는 지름길을 두고 산길을 걸으며, 봄이면 송기(소나무 속껍질)를 벗겨먹고 여름이면 산딸기도 따 먹으며 놀며 쉬며 오 리를 십 리로 늘여서 다녔다. 이렇듯 놀이로 단련된 체력 덕분에 병상에서 지내는 긴 시간을 그럭저럭 버텨 온 것 같다.



부모님


놀이로 단련된 체력도 체력이지만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다시 두 발로 걷고 밥벌이를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싶다. 기미생이신 어머니와 신유생이신 아버지는 각각 열일곱과 열다섯이 되던 1935년 봄에 결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신학문을 하시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큰아버지가 지으셨다는 『少女必知』 한 권을 베끼며 한글을 깨치셨고, 당시 아녀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과 가정을 운영하는 방법 등을 배우셨다. 신학문을 한 신랑과 학교라고는 문전에도 못 가본 신부, 전형적인 신식신랑과 구식신부의 결혼.
 

어머니. 어머니가 안 계셨더라면 오늘의 내가 있기는 아마도 힘들었을 거다. 어머니는, “그 동안 니가 신세를 한탄하거나 자포자기했더라면 가족 모두가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하시며 참 고맙다고 하신다. 그렇지만 이런 내 모습은 그대로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 어머니는 옛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셨듯이, 삶이 힘에 겨워도 불평도 원망도 없이 묵묵히 지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당신 앞에 놓인 고통을 감내하며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 또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식사 준비에 정성을 쏟으셨고 식탁에는 갓 조리한 따끈한 음식들이 올랐다. 도마 소리와 음식 냄새, 침대에 누워서 소리와 냄새로 무엇을 요리하는지를 추측해 보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도마와 재료, 칼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로 호박을 써는지 당근을 써는지, 채를 써는지 납작납작하게 써는지가 눈에 선하게 보인다(덕분에 나는 후각과 청각이 무척 발달했고 때론 이것 때문에 괴롭기도 하다^^).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행복한 시간. 어머니가 마련한 따스한 식탁의 그 정성을 먹고 이만큼 힘을 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읊조리시던 시조나 가사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시며 곧잘 시조와 가사를 외셨는데,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나 때문에 심히 괴로우신 건 아닌가보구나 싶어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심란한 마음을 달래시느라 이런 것들을 외셨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가투를 하며 시조를 외기 시작하셨는데, 가투는 술래가 시조 100수가 적힌 공책을 들고 시조를 외면, 나머지 사람들이 바닥에 펼쳐진 그 시조의 종장이 적힌 종이를 줍는 놀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시조를 많이 외시게 된 것. 지금까지도 이 시조들을 기억하고 있는 건 시집 온 이후에도 마음이 울적할 때나 일을 할 때 즐겨 시조를 외웠기 때문이란다. 신혼 시절 아버지가 서울(한양)로 유학을 가신 뒤, 8년 동안 네 분 어른을 모시고 살며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나 구여성이라 이혼 당할까 마음 졸일 때도 시조로 마음을 달래셨고, 막내딸의 기나긴 투병 기간에도 어머니는 시조를 외시며 심란한 마음을 달래셨던 것. 나뭇가지 위 눈꽃이 피는 겨울이나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꽃이 만발한 봄날이나 낙엽이 지는 가을에도 어머니에게서는 끊임없이 그 분위기에 맞는 시조나 가사들이 흘러나왔다.   


클림트, <아테제 섬>



소심하고^^ 정직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남기신 자산은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이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떠올릴 때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살다 가신 분으로 기억한다. 원하는 게 그다지 없었기에 원하는 것을 거의 가질 수 있으셨던 분이다. 부자는 물질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물질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유산이다(아버지가 ‘의식적으로’ 남기신 건 아니다^^). 오빠, 언니들 학비에 아버지 월급은 늘 부족했지만 부모님이 그 문제로 다투는 걸 본 적은 없다. 아버지는 성실하게 일하셨고, 모자라는 부분은 어머니가 알아서 꾸리셨다. 아버지가 40년 교직 생활을 마치고 퇴직하실 때 우린 공무원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런 점 때문에 기가 죽거나 하지 않으셨다. 그런 건 아버지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채소 위주의 담백하고 소박한 식단을 좋아하셨고 늘 소식을 하셨다. 음식 타박은 별로 안 하시는 편이었는데(젊은 시절엔 좀 하셨다고 한다.^^), 식탁에 반찬이 여러 가지 올라오는 건 싫어하셨다. 섭생뿐만이 아니라 생활도 단순하셨다. 기상 시간도 취침 시간도 퇴근 시간도 식사 시간도 일정했다. 어머니가 밥상을 두 번 차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장식품 같은 것도 없었다.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만 늘 제 자리에 정리 정돈하여 두어서 밤에 불을 켜지 않고도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다닐 때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 좋았고 필요한 물건이 늘 제 자리에 있어 생활의 불편함도 많이 덜어주었다(휠체어를 타고 필요한 물건을 찾으러 갔는데 그게 제 자리에 없을 때, 그것만큼 짜증나는 일도 없다)
 

이처럼 아버지 어머니의 정성과 규칙적인 생활습관은 통증으로 흔들리는 나의 일상을 붙들어 주었다.
 


책 읽기와 일기 쓰기


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서 또는 멀리서 나와 함께 했지만 내 안에 맴돌고 있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맘껏 나눌 상대는 없었다. 당시 일기장을 보면 누군가와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 싶다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그 당시 읽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수없이 반복해서 읽은 책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언제부터 이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한용운의 시에는 일기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감정들이 다양한 언어로 담겨 있었다. 특히 우울하거나 마음이 가라앉을 때면, 여성 화자의 목소리에 마음을 실어 여든 여덟 편의 시를 큰 소리로 주욱 낭송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면서 힘이 솟았다.
 

독서를 일상으로 삼기 시작한 건 P병원에 입원을 하면서부터였다. 책은 일요일마다 병실을 순회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어선지 종교 관련 서적들이 많았다. 『천국의 열쇠』, 오쇼 라즈니쉬의 책들, 이해인 수녀의 시집. 퇴원을 해서도 주로 신앙 서적을 읽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녀, 소화 데레사』, 『다미안 신부』, 『무상을 넘어서』(故김홍섭 판사의 신앙 유고집), 『부처님이 계신다면』(탄허 스님) 등등. 돌이켜 보면, 느닷없이 닥친 상황을 절대자의 힘에 의지해서 견뎌보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신앙 서적 속 인물들은 나와는 좀 다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세계 명작을 읽기 시작했다. 작품 속 인물들의 고민과 갈등에 내 힘겨움을 얹어보기도 하고,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구절에선 고마움까지 느꼈다. 『좁은 문』,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테스』, 『부활』 등 각양각색의 사랑이야기들을 읽을 땐 작품 속 주인공들이 부럽기도 했고, 『데미안』, 『어린왕자』, 『이방인』 같은 작품들은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작가가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뜻도 모르고 읽은 사르트르의 『구토』와 카프카의 『심판』.
 

93년 여름, 길 가다가 만난 언니 친구의 소개로 느닷없이 시작한 식이요법과 활원(活元)운동(자율신경계에 자극을 주어 내 몸의 자연 치유력을 일깨우는 신체 운동)으로 투병 생활 중 처음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고, 자연 치유력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그와 관련된 건강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불멸의 건강 진리』, 『활원 운동』 『기적의 요료법』 같은 책들을 읽고 그대로 실천도 했다. 그 이후로 식단에서 인스턴트식품이 사라졌고 활원운동은 지금까지도 가끔씩 하고 있다.
 

위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책들도 읽었다. 『간디 자서전』, 『시민의 불복종(데이빗 소로우)』, 『전태일 평전』, 『백범일지』,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프랑스 혁명가 시몬느 베이유의 전기)』, 『상처받은 용(루이제 린저와 윤이상의 대화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을 읽으면서 건강 이외에도 인생에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할 것들이 많다는 것에 나의 힘듦이 가볍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책을 통해 만난 다양한 세계들



책을 읽으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시공간의 넘나듦이 자유로워서 좋았다. 지금 여기에서 그때 거기를 경험하기도 하고 평생을 살아도 못 만날 것 같은 나와는 참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걷지 못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넘칠 때는 일기장에 털어놓았다.
 

일기. 지금 보관하고 있는 열다섯 권의 일기장은 주로 82년부터 95년 사이의 기록이다. 투병 초기에는 쓰는 것이 힘들어서 뜸했고, 96년 독립 이후 일을 하고 나서는 일기를 쓰지 않고도 살 만해서 뜸했다. 일기는 그 당시 유일한 출구였다. 쓰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일기장에 시도 베끼고 명언도 베끼고 해서 국어 선생님께 혼이 난 적도 있는데, 아픈 동안에는 하루에 몇 번씩도 썼다. 친구들도 하나 둘 결혼을 했고, 형제들도 각기 가정을 꾸렸다. 친구가 보고 싶을 때도, 미래가 불안할 때도 일기를 썼다. 책을 읽고도 일기를 썼고, 영화를 보고도 일기를 썼다. 날씨가 좋아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꽃들이 만발해도 단풍이 곱게 물들어도, 눈이 내려도, 통증이 심해도, 엄마한테 죄송해도, 아버지가 미울 때도, 뉴스를 보고도 일기장에 내 맘을 털어 놓았다.
 

일기장에 남아 있는 그 시절의 내 모습 몇 컷.
 

나의 자유는 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의해 구속당하고 있다. ‘自己로부터의 해방’ 나에게 너무도 절실한 問題이다. …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답답하기만 하다.(84. 1.25)

밤이 주는 이 푸근함. 빛은 모든 걸 들추어내지만 어둠은 그냥 그대로 묵인해준다. 하지만 한 가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 그리움눈을 감는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물체에 빼앗겼던 시각마저도 합세하여 더욱 더 궁지로 나를 몰아넣는다. 라디오의 스위치를 켠다.(85.3.3)

밤새도록 통증에 시달리다 아침만 겨우 먹고 또 이불 속으로 기어들다. 정말 심한 통증이다. 종일 그렇게 찡그린 얼굴로 지내다가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두 시가 넘어서야 세수를 하고 또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저녁때가 되어 엄마가 안 계셔서 식사 준비를 했다.(86. 4. 2. 일기)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 백기완. 홍숙자. 신정일. 김선적. 나에게 주어진 한 장의 투표용지에 무엇을 생각하며 어디에 기표를 할 것인가? 의무가 나에게는 권리보다 더 크게 느껴져 한층 더 부담이 된다. 4.19, 5.16, 10.26, 12.12, 5.17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또 6.29 선언인지 항복인지가 있기 전까지 이 한반도를 뒤덮었던 함성과 최루탄 가스는 무엇을 얘기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외치다가 죽어간 무수한 영혼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박종철, 이한열, 이밖에 이름조차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그 많은 젊음들. 그들의 생명과 바꾼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어느새 우리들 사이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듯하다.(87.11.29)

저녁에 감자국을 끓였다. 우선 멸치를 넣어 끓이다가 납작납작하게 썬 감자를 넣고 파와 양파를 넣어 맛을 보니, 너무 맹맹한 것 같아 고춧가루를 조금 넣었다. 엄마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맛보고 요것 좀 조것 좀 하면서 맛을 창조하시는구나 싶었다.(87. 3. 12. 목. 맑음)
 
보행기에 의지하고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걷는 연습을 했다. 50cm(5m가 아니라^^) 정도를 앞뒤로 두 번 왕복했는데 눈썹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88.3.23. 무릎 인공관절 수술 뒤)

‘씨알의 소리’. 책을 통해 저자를 만난다는 것은 아주 흥미 있고 때로는 수사를 하듯 혼자 의문을 품고 예상을 하고 답을 맞춰보는 아슬아슬한 기분까지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선입견의 탑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고.....그가 사귀고 생각을 나눈 사람들을 나도 만날 수가 있다.(90.5.12.더운 날씨)  


생명 유지의 기본이 먹고 배설하는 것이듯, 나 또한 생명체인 다음에야 허기 진 몸과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읽어야 했고 배설의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니 무엇이든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읽고 쓰는 건 순전히 굴신(屈身)이 어려운, 그리하여 마음마저 쪼그라들던 내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선택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추억들도 힘이 되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기억나는 건 성적표의 점수도 아주 특별한 이벤트도 아닌, 일상 속 관계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장면들이다. 방학이면 오빠 언니들과 함께 도넛과 호떡을 만들던 일, 창호지로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겨울 오후, 삶은 밤을 까먹으며 가족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때의 그 느낌들, 하루에도 몇 번씩 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해가 구름 사이로 들어가면 “해야, 해야, 나오너라 김칫국에 밥 말아 먹고 장구치고 나오너라”며 물에 젖어 새파란 입술을 하고서 친구들과 입을 모아 빌던 일, 경고 표시로 빨간 깃발이 꽂힌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가 관리인이 옷을 싣고 가는 바람에 친구들과 팬티만 입고 뛰던 일, 썰매를 타다 넘어져 젖은 엉덩이를 말리려다 바지를 태워 썰매로 가리고 오던 일 등등.
 

자연이 내게 준 즐거움과 위로 또한 크다. 대구 앞산 아래 아파트 내 방 깊숙이 드리우던 초여름의 싱그러운 초록 그늘, 밤이 되어 힘든 몸을 침대에 누이면 그 넓은 창을 통해 머리에서 저 발끝까지 환하게 비치던 새하얀 달빛, 태풍이 휘몰아칠 때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시원히 날려주던,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던 가로수들, 병원 생활의 지루함을 달래려고 날마다 창가에 붙어 앉아 바라보던 서산으로 지는 붉은 해, 대광주리에 담긴 호박이며 무말랭이 위에 내리쬐던 습기를 걷어낸 투명한 가을 햇살, 갈색의 부드러운 붓을 거꾸로 세운 듯 침묵으로 빠져들던 겨울 산들, 봄이 되면 아기 손톱만한 연둣빛 잎새들을 매달던 나무들. 이런 자연을 대하는 그 순간만은 아무런 불안도 통증도 없는 완벽한 평화가 주어졌다.
 

그리고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들고 와 그 순간만은 통증마저 잊게 해주던 친구들과 친척 언니, 특히 유머가 많은 한 살 위인 外육촌 언니와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방학이면 찾아와 심부름도 하고 친구도 되어주고 때로는 숙제를 봐 달라면서 내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던 조카들, 부모님 곁을 떠나 동부이촌동 K병원에 입원했을 때 당번을 정해서 돌봐주던 세 오빠와 올케들, 바쁜 출근길에도 택시를 불러 무거운 휠체어를 실어주던 형부와 휠체어를 밀고 교생실습을 함께 나갔던 언니, 그리고 류머티즘에 좋다고 하면 한겨울에도 산에 가서 약을 구해 주시던 삼종 조부님, 지금까지도 나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첫 주치의 선생님, 무릎 수술로 다시 걷게 해 주신 의사 선생님, 신부님과 수녀님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자랑스런 친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르고 그날그날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극하며 힘이 되어 준 ‘그 친구’. 이 밖에도 기억나지 않는 참 많은 사람들.


샤갈_<꿈의 꽃다발>



병과 함께 살아가리라 마음먹고 홀로서기를 하기까지 참 많은 것들을 새롭게 만났다. 부모님과 친구들이 새삼 더욱 살갑게 느껴졌고, 그 존재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치유력도 발견했다. 그저 재미로 호기심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읽던 책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그렇게도 쓰기 싫어하던 일기는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책이 없었다면 긴긴 여름 해를, 더 길고 힘든 겨울밤을 무얼 하며 보내며,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시도 때도 없이 들끓던 오만 가지 상념들을 누구에게 쏟아놓았을까 싶다. 그리고 오고 또 떠나간 수많은 인연들. 때로는 아픔도 주었고 또 그리움도 있었지만 그리움과 아픔들이 크고 작은 마디를 만들며 또 다른 마디들을 넘는 힘이 되었다. 사람들과 사물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빛깔과 리듬들. 이런 것들이 뿜어내는 힘들이 비틀거리는 나를 지탱해 주었고 홀로서기를 가능케 했다.



_오창희(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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