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죽음의 정치, 계속 살아나는 '함께함'의 정치

근대를 넘는 근대의 가능성, 집합적 신체



우리는 이미 집합적 신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미 우리는 ‘집합적 신체’이다. 스피노자는 이처럼 운동/정지의 비율로서의 신체를 파악한다. 전통적인 개별적 신체가 그 형상이나 유기적 기능에서 어떤 본질적 특징을 찾는다면, 스피노자는 바로 운동과 정지라는 속도 속에서 신체를 파악한다. 이를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 신체는 그것을 규정하는 형식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고, 규정된 실체나 주체로도, 그것이 소유하는 기관이나 수행하는 기능에 의해서도 정의되지 않는다. 일관성의 평면에서 신체는 경도와 위도로만 규정된다. 곧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특정한 관계에서 신체에 속하는 물질적 요소들의 집합과 특정한 역량이나 역량의 정도로 신체가 할 수 있는 강도적(强度的) 정서들의 집합에 의해서 정의된다. 오로지 정서들과 국지적 운동들, 미분적 속도들만 존재한다.


─들뢰즈, 『천개의 고원』


이처럼 신체란 운동과 정지의 비율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집합적으로 구성된 신체라는 의미는 우리의 몸이 일정하게 배열된 요소들의 일시적으로 안정적인 아쌍블라주(배치, assemblage)임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라는 개체적 양태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말한대로 ‘표현’이다. 우리의 신체는 각각의 다른 개체들이 이루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로서의 표현인 것이다.

들뢰즈가 사용하는 ‘기계’ 개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이 기계는 다른 기능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가령 우리의 입이 음식물과 접속할 때, 즉 무엇을 먹을 때는 소화기계가 되고, 다른 사람의 입과 접속할 때, 즉 키스할 때는 성욕기계가 되는 것처럼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신체는 다양하게 변주를 하는 기계다. 이처럼 운동과 속도에 따라 우리는 다른 신체가 되며, 어떤 것과 마주하느냐에 따라 다른 신체가 되는 것이 스피노자가 보는 신체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에게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고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이란 없다. 그것은 개체들간의 결합의 비율 혹은 관계들의 효과 내지 표현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은 언제나 모든 힘과 욕망의 착종체로서 집단적인 삶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나라는 개인은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때 관계는 단순히 다른 타인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가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 속에서 어떤 비율과 어떤 배치 속에서 놓여져 있느냐에 따라, 즉 그 힘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우리들은 흔히 통상 사물을 고립시켜 파악한다. 개인이라는 주관의 감옥 속에서 원자화된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바대로 상호 촉발하고 촉발받는 힘의 관계 내에서 개체를 사고하는 것, 우리는 이미 다수 혹은 다양체로서 주어져 있음을 파악하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의 인간론 또는 개체론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스피노자에게는 고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은 없다!



개체들의 개체로서의 사회체


스피노자에게 법, 권리, 정치는 그의 신체관과 동일한 논리하에 이어진다. 그에게 법이란 의무와 심판이 아니며, 권리 역시 천부적으로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운동과 정지, 조성과 해체라는 물리적 법칙하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체는 하나의 신체이며, 이 신체를 구성하는 비율과 역능의 정도 속에서만 구성된다. 따라서 사회 역시 계약론에서 보듯이 개체들간의 연합으로 해석할 수 없다. 사회나 공동체는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것이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이 그런 것처럼! 오히려 그 관계 속에서 ‘이탈’되고 ‘고립’된 개체를 상정하고, 그 이후 다시 ‘관계’를 만든다는 발상은 역사적으로도 허구이자 오류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 개체는 오히려 그 ‘관계’ 속에서‘만’ 만들어진다. 

따라서 사회 혹은 국가 역시 개체들의 단순한 의지의 결합이라거나, 제도화의 차원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활동력의 증가와 감소를 통해 인간을 파악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라는 것 역시 이 관점에서 만 파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본성이 똑같은 두 개체의 결합은 단독 개체보다 두 배의 능력을 가진 개체가 된다고 말하며, 인간은 서로의 도움으로 필수품을 훨씬 더 쉽게 조달하고, 오직 연합된 힘에 의해서만 도처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때 사회체, 정치체는 바로 그런 연합된 힘, ‘개체들의 개체’다. 여기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사회를 신체라고 말할 때 이것이 단순히 비유나 은유의 차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들 수 있다. 왜 우리는 자신의 활동력을 추구하는 코나투스라는 존재의 본질과는 달리 사회체라는 집합적 신체 속에서는 슬픔과 공포 속에서 우리의 관계와 역능을 제한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권력의 속성을 들고 있다. 권력은 슬픔의 정념을 전파함으로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권력은 우리를 복종시키기 위해 우리들의 비애를 필요로 하는데, 이 때 비애, 슬픔의 정념이란 우리들의 행동하는 힘을 떨어뜨리는 모든 것이다. 직접 스피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는 공통적 생활양식을 규정하며 법을 제정하는 실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법은 정서를 억제할 수 없는 이성이 아니라 형벌의 위협에 의하여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법에 의해서 그리고 자기 보존의 힘에 의해서 확립된 이 사회는 국가라고 하며,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보호되는 자는 국민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우리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의 동의에 의하여 선하거나 악한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음을 쉽게 이해한다. .. 자연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공동의 동의에 의하여 어떤 것의 주인일 수 없으며, 또한 자연에는 이 사람에게 속하고 저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에서는 각자에게 그의 것을 인정하려고 하든가 어떤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의지는 생각될 수 없다. 즉 자연 상태에서는 정의 또는 불의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생기지 않는다.


─스피노자, 『에티카』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국가를 이루는 것은 자유로운 결사체로서 공통관계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가 “이성에 따라 인도되는 인간은 오직 자기에게만 복종하는 고독 속에서보다는 공통된 결정에 따라 생활하는 국가에서 훨씬 더 자유롭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인간은 공포를 통한 국가라는 홉스적 관계 속으로 쉽사리 ‘미신’에 빠져든다. 


'희망'이야말로 우리의 눈을 가리게 만드는 게 아닐까?



죽음의 정치와 삶의 정치


이를 죽음의 정치와 삶의 정치로 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신체 역시 죽음의 신체와 삶의 신체로 나눌 수 있다면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의 신체란 자신의 역능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내달리는 과정에 있다면, 삶의 신체는 항상 변화하며 재생산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역능을 증가시키는 기쁨의 과정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가 말한 ‘기관없는 신체’를 참조할 수 있다. 


사람이 진정 사랑하면서 섹스를 할 때에는 언제나 자기 혼자서, 그리고 한 명의 타인 또는 타인들과 함께 기관 없는 신체를 이루게 된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몸체가 아니다. … 따라서 기관없는 신체는 기관들에 대립한다기보다는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죽은 몸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체이며, 유기체와 조직화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더욱더 생동하고 북적댄다. … 기관 없는 충만한 몸체는 다양체들로 북적대는 몸체이다.


─들뢰즈, 『천개의 고원』


여기서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없는 신체’란 유기체와 대비된다. 이는 기관들이 조직화되기 이전의, 지층 형성 이전의 충만한 ‘알’, 강렬도의 ‘알’이다. 그렇다면 이 때 유기체와 기관없는 신체를 죽음의 신체와 삶의 신체로 대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의 신체란 그것이 언제나 고정화되고, 지층화되어 어떤 욕망의 회로 역시 하나로 흡수해버리는 조직화된 그 무엇이라면, 삶의 신체란 욕망이 분출하는 생동하고 북적대는 몸체이다. 이를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지휘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오케스트라와 자유로운 재즈 밴드의 대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왼쪽이 오케스트라, 오른쪽이 재즈 밴드



이 죽음의 신체는 그것이 살아있을 때조차 언제나 동일한 자기 복제만을 꿈꾼다. 자본의 자기증식적 모델이 그러한 것처럼 이는 언제나 동일한 것만을 생산하고 이를 국가의 보증을 통해 물려주기만을 원한다. 이는 생산조차도 동화의 메커니즘 속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섞임이나 타자, 즉 진정한 의미의 생명, 생산은 없다. 함께 교류하며 변화하는 생성의 모델이 아닌, 유기체로서 지충화된 모델인 것이다.

이처럼 신체는 생산할 때조차 그것이 언제나 삶의 방향으로만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의 모델이 그러한 것처럼 반생명적인 방식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이와 대비해 유동하는 신체, 노마드라는 개념을 던진다. 이는 기관없는 신체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진정한 생명으로서의 신체!

그러나 이 때 주의할 것은 단지 이것이 방랑하는 주체라는 의미로 한정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유목 속에서야말로 그 ‘주체’가 만들어지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고정화된 신체, 지층화된 신체가 아닌 것뿐만이 아니라, 그 변신 속에서만 주체는 만들어짐을 주목해야 한다. 시몽동이 말하는 ‘전개체적’인 것, ‘준안정상태’로서의 과포화상태는 주체가 이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 결합의 과정 속에서만 효과로서 나타나는 것을 말해준다.

신체와 정치를 연결지어 사유하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지적 역시 재미있다. 그는 공동체라는 community라는 집합적 신체는 면역이라는 immunity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munity라는 말 앞에 붙은 ‘im’과 ‘com’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면역(immunity)이라고 한다면 이는 부정적 보호(im), 죽음의 정치와 유사하다. 그러나 생명은 계속 다시 살아남, 함께함(com)의 과정에 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한 개체가 연속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재생되거나 재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달리 말하면 고립된 개체, 자신의 환경을 이루는 다른 개체들과 교환하지 않는 개체는 재생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개체는 실존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 신체 역시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체란 매일매일의 ‘재생’이다. 매일 수많은 세포들이 다시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신체는 다른 외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한다. 우리가 관계 맺는 공기, 음식물들과 어떤 배열, 어떤 접합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나’를 새롭게 구성한다. 거기에 변화없는 나, 고정된 나, 원래의 나는 없다. 다만 인간이 의식적으로 그 변화하는 과정 속의 ‘나’를 정박시켜 놓은 것일 뿐이다.   




이처럼 생명을 주체의 끊임없는 변용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를 죽음의 정치와 구별해 생정치, 즉 불사모델, 영속적 모델, 일자 중심의 모델과 구별해 생성모델, 관계 중심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새로운 신체들을 만들어 내느냐,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생하는 신체들을 만들어 내느냐에 대한 질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와 자본의 지층화에 대해 새로운 사교성을 창조하는 것이 스피노자와 이를 이어받은 들뢰즈의 기획이라면 우리의 해방의 기획 역시 새롭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역반란 모델의 한계


이를 네그리는 역반란 모델을 들어 이야기한다. “반란의 머리가 잘리면 몸뚱이는 사르라져 죽을 것이라는, 유기체적 관념에 개념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역반란의 ‘참수 모델’을 생각해보라. … 역반란 전략가들에는 끔찍하게도, 그들이 그 머리를 자를 때마다 마치 괴물스러운 히드라처럼 또 다른 머리가 그 자리에서 솟아난다.” 따라서 우리가 노릴 것은 그 머리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머리가 자라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떠한 자유로운 해방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신체는 기존의 신체와는 다른 방식의 집합적 신체다. 


모든 주권적 권력은 필연적으로 명령하는 머리, 복종하는 손발 그리고 지배자를 지탱하기 위해 함께 기능하는 기관들로 이뤄어진 정치적 신체를 형성한다. (하지만) 다중 개념은 주권에 대한 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에 도전한다. 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는 지배할 수 있다.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지배하는 살아있는 살이다.


─네그리, 『다중』


여기서 ‘살아있는 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단순히 역반란의 모델처럼 그것의 머리를 잘라내서 대안적인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공통적인 사회적 존재를 새로운 살로, 즉 아직까지 신체를 형성하지 않은 무정형의 살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이 ‘살의 힘’이 어떻게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조직화하는가, 더불어 관계맺음을 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 관계로서의 코뮨이라는 말에 적합할 것이다. 그것의 가능성은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전지구적 신체가 되는 것, 외부와 교류하며 생산하는 집합적 신체가 되는 것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신체를 새롭게 볼 때, 우리는 새로운 정치를 구성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비유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존의 죽음의 정치와는 다른 삶의 정치로서의 모델은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_담담(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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