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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2주간 떠들쳐 본 책들

『내가 읽은 박완서』로 시작된 책과 책의 인연들

by 북드라망 2013. 3. 1.

마음에 드는 책을 읽으면 그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다른 책들도 연달아 손에 넣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평소 전혀 알지 못했던 작가의 책을 보게 되기도 하고, 거의 손댈 일 없는 분야의 책을 읽게 되기도 한다. 이번에 떠들쳐 본 책이 그런 경우다. 10년 전에 나온 한 작가의 산문집은 오늘 맨 앞에 소개하는 책에서 보게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내 손에 들 일이 없었을 터였고, 또 다른 책은 10여 년 동안은 종종 여기저기 펼쳐 읽곤 했던 책이지만 근 5~6년간은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잊고 지냈던 책이었다. 이미 읽었던 소설도 다르게 읽혔다. 이미 읽었지만 읽지 않았던 걸 읽을 수 있었던 책들이다.


『내가 읽고 만난 일본』의 저자 김윤식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책들의 인연을 만나보시죠! +_+




이 책은 김윤식의 책으로서는 좀 이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쓴 작가 이름을 단 책 중에서 연구서의 성격을 지니지 않은 데다, 작가와의 개인적 만남과 감정이 드러나 있는 유일한 책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현장비평’을 하는 김윤식의 글은, 언제부터인가 내게 어떤 숭고함마저 느끼게 한다. 특히 그의 최근 저작 중 하나인 『내가 읽고 만난 일본』은, “혼신의 힘을 다한 읽기과 쓰기”가 곧 삶이며, ‘생애를 건 공부’라는 말이 수사가 아닌 삶 자체인 어떤 ‘삶-읽기-쓰기’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의 읽기 방식에 동의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를 떠나 읽고 쓰기에 ‘생애를 건’, 어떤 비장미를 연출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오롯이 ‘읽기와 쓰기’로만 채운, 참으로 담박하면서도 간소하면서도 뜨거운 생애로부터 전달받을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그의 글에는 있다. 노년에도 왕성하게 글쓰기를 하는 이 현장비평가가, 역시 돌아가실 때까지 쉼없이 글쓰기를 했던 노작가에 대해, 그것도 그의 글만이 아니라 그와의 만남까지 함께 실린 책을 냈다고 했을 때, 이 책을 사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고희를 넘은 2001년에 박씨[박완서]는 이렇게 썼소. “1991년이었을 것이다. 동독 훔볼트대학에서 동구권의 한국문학 연구자들과 모임을 가진 일이 있다. 우리 쪽에서는 네 사람의 평론가와 소설가 두 사람이 참석했는데 김윤식 교수와 나도 그 여섯 사람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 처음 해보는 여행이었다.” 지금도 잠 안 오는 밤이면 꿈엔 듯 생시인 듯 서재에 앉아 『두부』에 실린 「사로잡힌 영혼」을 펼쳐 놓고 있소.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실수도 했고, 거만하기도 때로는 뻔뻔하기도 했소. 물구덩이에 빠져 생쥐꼴이 되기도 어찌 한두 번이었던가. 그런 나를 매도한 글도 수없이 보았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속이고 있다든가 그의 실증주의는 그것을 숨기기 위한 가면(김현, 『행복한 책읽기』)이라는 비판도 그런 부류에 드는 것. 그렇지만 박씨의 「사로잡힌 영혼」만큼 나를 힘껏 추어올린 글은 따로 없었소. - 19쪽




뜻밖에도 김윤식의 『내가 읽은 박완서』에서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가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고(위 인용문 참조), 해당 구절을 직접 보고 싶어 오랜만에 이 책을 빼 들었다. 과연 1986년 3월 11일자 일기에 김현은 김윤식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고 있었다. “김윤식의 『우리 문학의 안과 바깥』에는 예전에 표명한 태도들이 거칠게 되풀이되고 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 대한 회고담이 제일 진솔하고 읽을 만하다. 그의 내면의 무의식은 작가와 세계가 부딪치는 자리에 있지, 그 앞이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의 문체를 이상하게 과잉-서정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그의 실증주의는 그것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다.” 이 부분 외에도 서너 군데 일기에 김윤식이 더 언급되어 있었다.

김현은, 당대 여느 평론가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던 내용과 문체의 비평으로 한때 ‘유행’처럼 읽혔던 비평가이고, 또 많은 이들을 ‘비평’ 또는 ‘문학평론’으로 나아가게 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비교적 이른 죽음 탓(채 쉰도 되기 전이었다)이 큰 듯한데, 그는 한국의 비평계에서 ‘신화적’ 존재로 한동안 군림했던 듯하다(그런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젊은 평론가들이 모여 『김현 신화 다시 읽기』라는 책을 2008년에 펴낸 바 있기도 했다). 또 불문학을 전공한 김현은 미셸 푸코나 르네 지라르 등 프랑스의 사상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아무튼 김현의 글들 중에서도 특히 일기를 모은 이 『행복한 책읽기』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출간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문학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하나로 자리 잡아 갔는데, 나에게도 그랬다. 그의 일기에 등장하는 글들을 찾아 읽기도 했고,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긴 몇몇 부분에는 진하게 밑줄을 그어 놓기도 했다. 한동안은 책장에서 『행복한 책읽기』를 꺼내 아무 곳이나 펴서 그대로 몇 페이지를 읽어 가는 일이 꽤 자주 있었다. 그러다가 책장의 ‘김현’칸에 눈길도 잘 가지 않는 날이 여러 해가 흘렀고, 거의 잊고 살았던 이 책을 김윤식이 잠시 언급한 덕분에 다시 들춰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예전에 밑줄 그어 놓은 부분이 아닌, 전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이런 얘기도 있었구나 싶었던 부분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또 예전에는 텍스트에 섬세한 김현만이 보였는데, 지금은 삶에 섬세한 김현이 크게 보였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두고 읽어도 마음에 안기는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도 그 부분이 10년 전과 후가 다르다는 것, 이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수명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김현 자신보다 이 책이 오래 살 것이다.


김치수의 지적: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보수주의가 자리잡고 있는데도 진보주의자인 척할 때는, 사소한 것에 과격해지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관심해진다.” 옳은 말이다 – 209쪽(1989년 3월 12일 일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정음사, 1968)의 가장 끔찍한 전언은 맨 앞 대목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10).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 그 동물은 체념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불편하고, 더러운 것, 비인간적인 것에 익숙해진 인간의 모습은 더러운 것인가, 안 더러운 것인가?

- 71쪽(1987년 1월 31일 일기 중)




김윤식의 『내가 읽은 박완서』에는 박완서 산문집 『두부』에 실린 「사로잡힌 영혼」이 꽤 인용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완서의 이 산문은 ‘김윤식’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인용된 부분은 전문을 너무 읽고 싶게 만들었고, 결국 그 한 편을 보려고 이 책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읽은 이 글을, 왜 김윤식이 “지금도 잠 안 오는 밤이면 꿈엔 듯 생시인 듯 서재에 앉아” 펼쳐 놓고 있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그 글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마음을, 의지를, 열정을, 최선의 따뜻함으로 읽어낸 글이었다. 그의 마음, 그의 글에서 가장 좋은 점을 보고, 그러나 그것을 어떤 과장도 없이, 하지만 따뜻함을 담아 써내려 간 그 글은, 노년의 비평가에게 큰 힘이고, 위안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노인에게서 노쇠함을 어린아이에게서 유치함을 잡아내는 시선이 아니라, 노인에게서 원숙함을 어린아이에게서 천진함을 찾는 시선. 그런 시선을 나는 그 글에서 느꼈다.

그리고 그 글과 더불어 실려 있는 「그는 그 잔혹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나」라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PX에서 미군들로부터 수주받은 그림을 발주하는 사무원과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박완서와 박수근 화백의 우정이 담긴 글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박수근]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 보여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착하고 말수 적은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기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닥은 어질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 만한 고장이 아니었다. 나부터도 그랬다. 내가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만큼은 뻔뻔스러워지기도 해서 엉터리 영어로나마 미군들과 된소리 안된소리 수작을 걸 수 있게 되어 차츰 그림주문이 늘어나자 나는 화가들에게 방자하게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는 교만한 마음과, 양갓집 처녀에다 서울대학생인 내가 기껏 간판장이들이나 먹여 살리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자기모멸이 뒤범벅이 되어 얼마나 싸가지 없이 굴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 아버지뻘은 되는 화가들을 김씨, 이씨 하는 식으로 함부로 대했다. 나는 그때 내가 더이상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졌다고 여겼고, 그 불행감을 탐닉하는 맛에 살고 있었다.-222쪽




김윤식의 『내가 읽은 박완서』 1부에는 박완서 소설이 발표된 직후 월평했던 글들을 모아 놓았는데, 거기에 실린 「그리움을 위하여」와 「그 남자네 집」에 관한 비평을 보고, 이 두 작품이 실린 작품집을 다시 뒤적여 보았다.

나는 한국소설을 꽤 즐겨 보는 편이었지만 박완서의 작품은 모든 것을 사서 볼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박완서라는 작가가 있어서 정말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가 70대에 들어서고도 계속 작품을 써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 말미에 작가의 말에서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 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함 일상을 어찌 견디랴”라고 했지만, 70대에도 ‘현역’인 소설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독자로서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박완서가 그려낸 노년의 모습을 모두 좋아하거나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남해의 섬, 노란 은행잎이 푸른 잔디 위로 지는 곳,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해역에서 낚아 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섬. 그런 섬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그리움이 생물처럼 고인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 없이 살았음으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40쪽(「그리움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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