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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

건강과 질병, 독재와 평등 -고대 그리스에서 몸과 정치

by 북드라망 2013. 2. 27.

고대 그리스에서 몸과 정치2 


아리스토텔레스와 4체액설



고전기 그리스의 3대 전집으로 <플라톤 전집>,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그리고 <히포크라테스 전집>이 손꼽힌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이미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핵심 논문들이 나왔거나 나오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대부분 논문들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서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언급들이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그만큼 서양에서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두 철학 전집과 함께 고대 이래 지금까지 여러 학문 분야에 폭넓게 영향을 미치면서 서구적 사유를 형성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사상을 알기 위해 고대 의학을 알아야 한다. 지난번 플라톤에게서도 보아왔지만 당대 지식인들은 건강과 의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이들이 그리스 의학에서 결코 주변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철학자들이 주로 영혼의 돌봄에 관해 연구했다면, 이런 과정에서 철학과 의학의 결합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실제로 마케도니아의 왕의 주치의, 즉 어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에 관한 글들도 여러 편 남기고 있다.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적 사유에 친숙한 인물이었다. 


건강과 질병은 의사뿐 아니라 자연철학자도 그 원인에 대해 끝까지 논의해야 할 대상이다. (...) 이런 사실들은 의사와 자연학자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까지는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교양 있고, 학식 있는 의사들은 자연학에 대해 언급하고 그로부터 의학의 원리들을 도출하며, 반면에 가장 유명한 자연철학자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연구를 의학적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 『호흡에 관하여』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건강과 질병 모두 ‘생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철학자들이 건강과 질병의 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의학적 원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존 포인터, <아스클레피오스의 방문>



인간은 정치적 동물?


그렇다면 우선 그의 유명한 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자.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사고가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거나 인간 이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할 때 ‘정치적’이란 국가공동체(polis)를 구성한다는 의미다. 물론 이 때 국가공동체, 즉 폴리스는 지금과 같은 국가형태는 아니다. 오히려 도시국가, 공동체에 가깝다. 이 말을 세네카가 ‘사회적 동물’로 번역한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이다. 즉 사회적이다”라고 정리하면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해석으로 고정되었다. 하지만 원래 뜻을 보자면 ‘정치적 동물’이라기보다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 요즘말로 하자면 코뮨적 인간, 호모 코뮤니타스라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해석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기에, 즉 타자와 관계 속에서 의존하면서 살 수 밖에 없기에 인간은 폴리스(polis)라는 공동체,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정치적이란 말은 여느 생명체에나 붙일 수 있는 한정사가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종들과의 차이를 규정짓기 위한 것이었음에 주의해야 한다고 아감벤은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생명이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삶(생명)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하나의 용어로만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공통의 어원에서 유래했지만 의미론적으로나 어형론적으로나 구분되는 두 가지 용어를 사용했다. 조에(zoe)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켰다. 반면 비오스(bios)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가리켰다.


-아감벤, 『호모 사케르』


즉 생명은 단순히 살아가는 생명(zoe)과 가치있는 생명(bios)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처럼 조에와 비오스의 차이를 통해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생명을 발견한다. 이 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치있는 생명이란 단순한 살아있음을 너머 폴리스 속에서 어떤 선을 실현하기 위한 생명이다. 그는 모든 공동체는 어떤 선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고 말하며, 그리고 이중 가장 으뜸가는 공동체로 폴리스를 꼽는다. 폴리스는 그런 점에서 어떻게 가치있는 생명을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상상도



독재와 평등 사이


그렇다면 이러한 그의 사유에서 어떤 의학적 가치들을 찾을 수 있을까?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치학과 의학이 만나는 지점들을 보자. 


국가의 한 부분의 불균형한 성장도 정체 변혁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몸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들 부분들이 균형 있게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 발은 4페퀴스(1페퀴스는 44.4cm)나 되는데 나머지 몸은 2스피타메(1스피타메는 20cm) 밖에 안 되면 몸은 망가져 버리거나, 몸의 부분들이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불균형하게 성장한다면 몸은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중 한 부분이 모르는 사이에 불균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몸이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국가도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이러한 균형에 대한 사유는 고대 의학에서 늘상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고대의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짜고 쓰거나, 달고 시거나, 자극적이고 담백하거나 등과 같은, 수적으로든 힘으로든 다른 종류의 속성을 지닌 수많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요소들은 서로 섞이거나 혼합되더라도 그 요소를 지닌 사람을 눈에 띄게 달라 보이게 하거나 해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한 가지 요소가 떨어져 나가거나 따로 존재하게 될 때에는, 그 요소를 지닌 사람을 달라 보이게 하거나 그 사람에게 해를 준다.


-히포크라테스, 『고대의학』


요소들의 혼합이라는 개념에 요소들의 ‘분량’ 즉 비율 또는 균형이라는 개념을 덧붙이고 있다. 이는 그의 또 다른 글 <섭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한 가지 혹은 또 다른 요소가 지나칠 때 질병이 발생하며 그 요소들이 고르게 균형을 이루면 만족스러운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요소들은 앞에서의 요소와 같지 않다. 이 때 요소들이란 섭생이라든가, 운동, 식이요법과 같은 방법적 요소들이다. 하지만 건강과 질병이라는 개념 사이에, 건강과 질병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들은 서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즉 병적인 상태는 건강한 상태와 대조되며, 건강이 균형 잡힌 모습인 반면 질병은 불균형한 모습이다. 건강은 두 원리가 동등할 때 이루어지며, 질병은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사유들 속에서 우리는 의학과 정치학 사이의 어떤 공유된 인식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피크로톤의 의사 알크마이온은 한 세기 앞서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알크마이온은 건강을 유지하려면 습하고 건조하며, 춥고 더우며, 쓰고 단 것과 같은 속성들이 ‘평등(isonomy)’, 즉 동등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데 반해, 그들 요소 사이에서 ‘독재(monarchy)’, 즉 한 요소가 홀로 압도하는 현상이 일어나면 질병이 생긴다고 말했다.”


여기서 ‘평등’, ‘독재’라는 말에 주목하자! 물론 알크마이온의 말이 후대의 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원저자의 말이 어디까지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의학 담론에서 사용되는 이 정치적 용어들은 대체로 알크마이온의 입에서 직접 나온 것이라 인정된다. 몸이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들 사이의 평등, 이소노미(isonomy)가 구축되어 동등하게 유지되는 것이 건강이고, 어떤 한 요소가 독재를 하는 것이 질병이라는 것!

그리스적 사유에서 이소노미(isonomy)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원래 폴리스는 지금 이해되는 것과 같이 다수의 정치라는 점에서 민주정이라기보다 비지배로서의 민주정에 가깝다. 이소노미라는 용어는 법의 영역 내에서의 평등을 암시했는데, 각자의 평등한 입장에서 폴리스를 구성함으로서 어떻게 자기지배, 즉 지배받지 않음을 구축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즉 평등이란 조건의 평등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평등이었다. 이소노미가 평등을 보장한 것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나거나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본질적으로 평등하지 않으므로 법을 통해 자신들을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인위적인 제도, 즉 폴리스를 필요로 한다. 이는 독재와 달리 여러 요소들간의 동등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이 때 균형이라는 사고가 핵심적이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돌아가보자.


분명 국가는 계속해서 점점 더 하나의 ‘통일체’가 되어가면 결국 국가이기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국가는 본성적으로 하나의 ‘복합체’다. 국가는 복합체에서 점점 더 통일체가 되어 갈수록 국가 대신 가정이 되고, 가정 대신 개인이 될 것이다. 가정은 국가보다 더 통일체이고, 개인은 가정보다 더 통일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를 그런 통일체를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국가는 파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다수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같은 사람들로는 국가는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 가족은 개인보다 더 자족할 수 있고 국가는 가족보다 더 자족할 수 있는데, 국가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주민들이 자족할 수 있을 만큼 많고 다양해야 비로소 국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자족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면 통일성은 지나치지 않는 편이 지나친 편보다 더 바람직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이것은 앞서 의학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하다. 국가, 즉 폴리스가 어떤 복합체라고 할 때 이는 신체라는 복합체와 동일하다. 몸과 마찬가지로 각 요소들로 구성되어 국가라는 복합체를 만든다. 그리고 각 요소들의 이소노미, 평등을 이룰 때 국가는 구성되고, 독재, 통일체가 되어버리면 국가도 존재할 수 없다. 이로서 국가라는 복합체 속에서 더 많이 ‘자족’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폴리스를 구성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스 사람들은 4체액설을 이야기했는가?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의 몸이 여러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를 보기 위해 4원소설을 먼저 살펴보자. 엠페도클레스는 5세기경에 살았던 인물로, 물이나 아페이론, 공기를 막론하고 어떠한 단일 요소도 모든 생명의 기초가 될 수는 없으며, 네 가지 요소나 기본물질들이 동등하게 공존함으로써 생명의 기초를 이룬다고 보았다. 불, 물, 공기, 흙은 모두 똑같이 생명에 중요한 것으로, 이렇게 생명을 만드는 것은 이 네 가지의 혼합물이며, 전 우주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설을 설명한 갈레노스의 그림


그렇다면 엠페도클레스는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 당시에 인체를 생리적으로 연구할만한 실험실이 없었으므로 모든 생명체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물질을 확인하기 위해 복잡한 측정을 수행할 수도, 이 물질들을 분리하기 위해 혼합물 분석을 할 수도 없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생각들이 떠올랐을까? 몸이 불, 물, 공기, 흙이라는 근본물질로 구성되었다는 인식은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몸은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다. 이로써 생명체 안에 불이 존재한다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물은 어떤가? 땀이나 눈물 등을 보고 물이 생명의 근본물질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공기도 마찬가지로 호흡을 통해 그것을 떠올렸을 수 있다. 그렇다면 흙은? 인간이나 동물의 몸에서 혹은 나무에서 어떻게 흙을 발견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기는 어렵다.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 이 네 가지 기본원소가 동일한 정도로 구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좀 더 숙고해보자. 이 때 불, 물, 공기, 흙이라는 네 가지 원소는 동등한 자격을 지님에 주목하자. 혼합상태에서 이 네 가지 원소는 각각 양이 더 늘어나거나 줄어든 상태가 되며 이로 말미암아 개체의 특징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의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같은 이들이 생각했던 단 하나의 원소, 단 하나의 기본물질이 생명을 지배한다는 사고방식과 정확히 반대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동일한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신체, 그리고 우주라는 발상!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정치사회적 현실들이 바뀌고 이것이 의학에도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정치적 변화가 몸에 대한 관점 역시 바뀌게 한 것은 아닐까? 생명체의 기본원소와 기초에 관한 개념이 새롭게 변화된 때에 중요한 역사적 변화는 사회체제가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앞서 알크마이온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어떤 동등한 권력이 요청되었거나 혹은 진행중이었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신체가 여러 요소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의학적 사고가 새로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상상력일까?

그런 점에서 4체액설이나 4원소설은 몸 자체의 표현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몸 밖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누렸거나 염원했던 사회체제가 그들이 신체를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를 의학사 연구자 운슐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민들의 지위와 자아상, 그들의 정치적 자각, 폴리스의 운명, 시민들이 속한 사회유기체의 숙명, 이러한 것들을 배경으로 탄생한 사상은 새로운 세계관과 자연에 대한 이해를 거쳐 결국 치료법으로 흘러들어갔고 새로운 의학을 탄생시켰다. 단일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근본원소가 ‘지배’한다는 ‘군주제적’ 견해는 더 많은 숫자인 4를 생명유기체의 기본요소로 내건 새로운 견해에 자연스럽게 권좌를 양보했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4든 5든 6이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근본원소가 혼합되어 복합체계를 구성함으로써 그 체계에 맞게 살아가게 해준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파울 운슐트, <의학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신체가 하나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의 복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사고는 단순히 신체를 뚫어지게 살펴본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발상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언가 어떤 정치사회적 요구 혹은 변화가 이러한 발상을 가능하게 혹은 촉발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불, 물, 공기, 흙은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불분명했다. 그렇다면 치료자가 실제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혈류가 증가하거나 혈관이 평소보다 더 팽창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액체들에 대해서도 그런 사실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인간의 신체가 다른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는 그런 점에서 어떤 요청 속에서 상상된 것이었다.

완전히 똑같은 원리가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작동하였다. 모든 사람들 사이의 균형만이 폴리스의 조화와 평화를 보장할 수 있었다. 모든 체액들이나 원소들 간의 균형만이 인간유기체의 건강을 보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무엇이든 과도하면 해로웠다. 폴리스라는 공동체에서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필요했던 것처럼 인간의 몸에서도 여러 요소들간의 민주주의라는 발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원리 속에서 신체라는 복합체는 국가라는 복합체, 즉 여러 요소들간의 균형이라는 원리 속에서 다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것이 사회에 대한 발상이 몸에 대한 발상을 변화시켰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 속에서 우리는 국가라는 복합체와 인체라는 복합체 이 둘 간의 공통된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 


독재냐, 민주주의냐.



자연이라는 의사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적인 치유력을 자연본성(physis)으로 간주했다. 자연(physis)라는 단어가 훗날 의사(physician)라는 용어의 어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저절로 아무는 듯이 보이는 작은 상처들 또는 극히 심각한 상태의 종양조차도 이렇다 할 외부 간섭없이 예기치 않게 좋아지는 경우도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모든 생명체가 각자의 권한, 즉 자신만의 자연본성을 지니며 그 자연본성이 몸에 생긴 병을 치료하는 진정한 의사라고 고대 그리스에서 사유되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자연이 병을 치료하는 의사다” 혹은 “자연은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만든다”라고 말할 때 병을 치료하는 것이란 이처럼 자연적인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연의 목적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목적론은 인체 기관의 구조와 기능 간에는 합리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해부생리학의 굳건한 토대위에 구축되어 있다. 즉 인체에 불필요한 기관은 없으며 모든 기관은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의학적 사고와 맥을 같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자기 목적성에 따라 자연의 본질과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으며, 여기서의 목적성은 질서 잡힌 구조 연관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의사가 수수방관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의 역할을 자연을 돕는 것이다. 자연은 건강을 위해 질병에 대항하여 싸운다. 자연은 생명체의 의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속에 있는 ‘천연’ 의사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 ‘실제’ 의사가 필요하다. 즉 신체안의 여러 요소들이 균형을 잃어버렸을 때 이는 자연히 그 균형을 찾아가게 되어 있지만 이것이 과도하게 진행될 때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의사다. 그렇다면 결국 통치 역시 마찬가지다. 폴리스는 가치있는 생명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사유 속에서 나온다. 어떻게 균형을 찾아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최적화할 수 있는가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의학자들 사이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들, 호모 사케르와는 다른 방식의 생명, 즉 복합체를 이루는 호모 코뮤니타스일 것이다.


_담담(남산강학원 Q&?)


<원령공주>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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