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사건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질문은 무엇인가?

by 북드라망 2013. 2. 20.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대관식,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관을 건내려고 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커다란 궁전에 사람들이 모이고, 휘황찬란한 가구들이 놓이고, 교황이 왕관을 들고 있다. 나폴레옹은 앞으로 걸어나와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아 자신이 직접 머리에 썼다고 전해진다. 이제 이 상황에서 무엇이 변했는지 생각해 보자. 사물이나 실체에서는 변한 것이 없다. 대관식이 있었다고 해서 그 궁전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수가 늘어난 것도 아니고, 의자가 탁자로 바뀐 것도 아니다. 사물이나 실체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그렇다고 성질이 바뀌었는가? 성질도 바뀌지 않았다. 건물의 무게도 그대로고, 사람들의 옷 색깔도 그대로고, 왕관의 모양도 그대로이다. 결국 대관식에서 분명 큰 사건이 벌어졌지만, 사실상 거기에서 사물도 성질도 변한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관식에서 사건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했던 것일까? 대관식에서 사건은 나폴레옹의 머리에 왕관이 놓이는 그 순간에 존재했다. 그 사건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폴레옹의 머리에 왕관이 놓이는 그 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다. 사건이란 순간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그날 있었던 모든 일들은 결국 그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건이라는 이 존재는 매우 독특한 무엇이다. 다시 말해서 독특한 존재론적 위상을 가진다.


─이정우, 『사건의 철학』, 14~15쪽


'사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미는 뉴스에 보도되는 무엇(아마도 사고에 가까운)이 아닐까? 예를 들어 승용차 한 대가 중앙분리대와 부딪쳤다면, 이것은 차의 형태가 바뀐 것이고 이것은 '교통 사고'로 보도가 된다. 그렇다면 사건과 사고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건'은 무엇일까? 사물이나 실체가 변하지 않았고, 성질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사건은 어디에 존재한 것일까?


인용문에서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예로 든다. 대관식은 왕관이 놓이는 그 순간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이라고, 그런데 이 지점이 마음에 걸려 다시 읽어본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그 순간'이라는 것.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것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의문을 바꾸어 말하면 찰나의 시간(사건)이 아닌 지속되는 것으로서의 사건만을 사건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헉;; 세상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들이, 많은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전통 철학은 보다 "실재적이다"와 보다 "지속적이다"(더 나아가 "영원하다")를 흔히 동일시하곤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것은 사실 상식과 일치하는 생각이다. (이름 그대로) 오래 가는 만년필이 더 좋은 만년필이고, 오래가는 건물이 더 좋은 건물이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우정도 오래갈수록 더 좋은 것이다. 인간은 오래가는 것은 더 가치있게 여기고, 순간적인 것은 가치가 없는 것,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금 전에 말했듯이 우리 삶에서는 바로 그 덧없는 것, 순간적인 것이 때로는 대단히 중요하다. 지속되는 것 못지 않게 순간적인 것도 중요한 것이다. 바로 이 순간적인 것-사건-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같은 책, 18~19쪽)


"hello world"는 프로그래밍을 처음 배울때 처음으로 입력하는 문장이다. 이 의미를 이제서야 새삼 느끼게 된다.



철학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책에 나오는 개념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말하면, 개념을 알면  그 책의 입구가 덜 어렵게 느껴진다는 의미가 된다. 한 사람이 가진 언어만큼이 그 사람의 사유의 세계라는 말은 이렇게 보면 정말 적확한 셈이다. 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의미들을 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의미는 참으로 협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념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계를 공부한다는 것이며 개념을 알아가는 과정은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확장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이 공부는 달팽이의 걸음처럼, 아주 느리게 진행되겠지만 시작하길 잘 했다는 기쁨이 더욱 크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막 권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



사건의 철학 - 10점
이정우 지음/그린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