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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by 북드라망 2012. 12. 19.

행복의 나라로



오늘이 대통령 선거날이다. 거리에 빨강색, 노랑색, 가끔씩 보라색 현수막들이 나부낀다. 신문과 TV 뉴스화면은 연일 유세 장면으로 가득하다. 온라인 상에서도 각 지지자들 간의 후보 찬양이 이어진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행복의 나라가 올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해줄 듯한 약속들, 현란한 문구들, 그리고 기대들. 하지만 좋은 세상이, 해방이 그렇게 쉽게 온다면 그것은 거짓 해방이리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흘려온 피땀어린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해방이란 그렇게 쉽사리 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선거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선거에서 누군가가 당선되면 다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가 대통령이 되도 상관없다는 문제는 아니다. 선거가 나의 삶의 모든 것을 좌우하지는 않더라도, 나의 삶에 많게 적게 영향을 끼친다. 지난 5년간 우리 삶을 정치적이지 못하게 만든 그분들의 영향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 아니면 2번이라는 선거의 논리는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5번과 7번이라는 선택지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숫자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고 그것이 나의 뜻이라고 여겨지게 만드는 시스템 자체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숫자화될 수 없는 우리들의 욕망이 안철수라는 환상을 불러 온 것은 아닐까?


우리들의 마음을 다 안다는 그 분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우선 의심부터 든다. 어떻게? 당신들이 어떻게 내 맘을 다 안다는 건데?


근대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 즉 나의 의지를 재현(representation)하는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때 대리, 대표, 재현의 논리는 동일하다. 그것은 전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만을 특징으로 삼고, 그것을 재현할 수밖에 없다. 투표(投票)란 ‘표(票)’를 던지는(投) 행위이지만, 이 때 내 전체는 던져질 수 없다. 나의 표를 던짐으로서 해서 나는 그 ‘표’로 재현되지만, 이때조차도 나는 ‘문제니’ 혹은 ‘ㅂㄱㅎ’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의 하나로서만 호명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나의 의지 전체를 대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나의 의지가 하나의 무엇으로 대표 혹은 재현될 수 있는가? 내 의지가 ‘문제니’ 혹은 ‘ㅂㄱㅎ’ 그 사람의 의견과 모두 합치하는가? 그 사람의 어떤 점은 나의 생각과 맞지만, 또 다른 사항에서는 전혀 나와는 다르지 않은가? 아니 백번 양보해 나와 완벽히 맞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치더라도, 그렇게 나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유권자의 욕심 아닐까? 정치인들은 그러한 유권자의 ‘욕심’에 기생하는 것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사유하기


따라서 그들이 표를 얻기 위해서만 유권자들에게 구걸하고, 선거가 끝나면 돌아서 잊어버린다고 욕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권자들이 자신의 모든 정치적 활동을 선거일에 투표하는 행위로 축소해 버리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나서 가끔 정치인들을 비판한다거나, 욕하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며 자신은 남들보다 꽤나 의식 있고, 정치적이라고 자언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만들지에 대해서는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해서 알고 있듯이 내 삶과 정치가 유리된 순간, 그것은 누가 나를 대리하던지 간에 또다시 헛된 희망으로 그쳐버리기 쉽다.  


또, 이들에게 우리는 표를 줌으로서 나를 대리해 달라고 위임하는 것이 정치의 끝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투표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급진적으로 사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급진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빨갱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지만, 급진적(radical)이라는 말의 어원은 원래 뿌리(root)를 의미하는 라틴어 radix에서부터 나왔다. 즉 급진적이라 함은 그 뿌리에서부터 사유한다는 것으로, 어떤 것의 기원의 허구를 밝히고, 폭로해 그것을 새롭게 사유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정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의 뿌리를 밝혀내고, 다시 정치와 민주주의를 우리의 것으로 재전유하는 길일 것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대의(간접)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의 보완물이라고 배운다. 인구가 많아지고, 영토도 넓어지면서 더 이상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뜻을 대변할 누군가에게 지배를 위임하는 것이 간접 민주주의라고. 그러나 원래 대의(대표) 개념은 인민주권 실현을 위해 고안된 게 아니다. 그것은 주권을 표상(재현)하기 위한 단계에서 하나의 거대한 ‘신체’를 만들어 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여기서 홉스의 리바이어던 표지를 살펴보자.


리바이어던 표지의 비밀



일단 한 명의 거인이 도시 위에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누굴까? 책 제목이 리바이어던인 만큼 주권자인 리바이어던을 그린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가 양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주교가 종교 행사 때 드는 지팡이, 목장(牧杖)이다. 그리고 칼과 목장 양 끝 위로 문장 하나가 보인다. “지상에 더 힘센 사람이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 욥기 41장 24절” 즉, 리바이어던이 세속적인 권력과 교회 권력을 양손에 쥔 무소불위의 주권자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고 가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리바이어던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 보시라. 무엇이 보이시나? 갑옷? 아니다. 리바이어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단순히 갑옷이 아니라, 약 300여명의 사람들, 즉 리바이어던을 구성하고 있는 백성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무언가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공통적으로 모두 리바이어던의 얼굴을 향해 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회계약을 맺은 이들은 리바이어던의 몸뚱이를 구성하며 리바이어던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권자는 자신의 신체를 이루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체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가? 홉스의 말을 들어보자.  


코먼웰스가 설립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자기보존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굴복시키거나, 상해를 입히거나, 살해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코먼웰스에서 행사되는 형벌권의 근거이다. 즉 백성들이 주권자에게 그러한 권리를 부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주권자가 그들 모두의 보존을 위해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바에 따라, 주권자 자신의 형벌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강화시켜 준 것이다. 따라서 형벌권은 주권자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고 주권자에게만 남게 된 것으로, 자연법에 의해 정해진 한계를 제외하면, 완전한 자연상태,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와 같이 온전한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토마스 홉스, 진석용 역, 『리바이어던』1, 402쪽


권리의 포기와 주권의 탄생


우리는 흔히 사회계약을 상정할 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 자신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주권자에게 위임, 양도해 국가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즉, 자연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공동의 권력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의 포기와 양도가 필요했고, 이를 통해 리바이어던이라는 주권자를 만들어 낸다는 식이다. 그러나 여기서 홉스의 포기 개념에 조금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런 권리를 누리는 것을 ‘방해할 자유’를 자기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양도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에 없던 새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데 최소한 그 권리포기자로부터의 방해는 없어진다. 그런 점에서 홉스에게는 양도조차도 포기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주권자는 자신을 방해할 무언가를 갖지 않는 무소불위의 능력자가 된다.

칼 슈미트가 주권을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자’라고 정의하는 것 역시 인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권자만이 궁극적인 결정권을 독점하는데, 국가 주권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슈미트는 주장한다. 즉 자기의 직접적인 생존의 권리를 제외한 모든 권리들을 포기한 상황에서 국가는 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인민들은 계약을 통해 주권을 양도, 포기함으로서 사회상태로 들어가지만 주권자는 홀로 자연상태에 남아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인민주권의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거대신체를 이루는 하나의 부속품이 됨으로서, 나의 의지와 너의 의지가 한 데 모여 주권이라는 신체를 만들어 냈다는 식으로. 인민들은 이렇게 벌거벗은 생명인 ‘호모 사케르’로 주권자의 의지에 노출된 생명으로서만 존재한다. 


불꽃남자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 우리가 ‘정치적’임을 포기하는 순간, 거대권력인 주권의 논리가 작동한다.


지배없음과 자기지배로서의 민주주의


그러나 실제로 나의 몸을 살펴보자. 나의 몸은 수많은 세포와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때 나의 입은 나의 몸을 위한 부속품이기만 한가? 내 입이 무언가를 먹고, 무언가를 빨고, 무언가를 씹을 때 그것은 입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항문은 소화된 것들을 배설함으로서 그 욕망을 채운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경우 병이 된다. 입이 음식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거식증에 걸리거나 항문이 배설욕구만을 충족하려 할 때 설사에 걸리는 것처럼. 그러나 이것이 내 몸의 모든 세포와 기관들이 전체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내 몸 안의 수많은 애벌레 주체들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들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움직임으로서 공통의 신체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체’라는 신체 역시 머리인 주권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다만 각각의 인민들이 정치적이기를 포기하고 전체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내맡길 때만이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몸이 그런 것처럼 공동적 신체를 구성하는 것은 그렇게 나의 것을 포기하거나 양도하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입의 욕망을 머리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삶을 그들의 손에 내맡기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가 지배없음을 민주주의라고 말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가 데모크라시(democracy), 즉 데모스(demos)에 의한 지배라 할 때 이는 단순히 한 사람의 군주가 다스리는 것에 반대해 여러 사람이 다스린다는 개념이 아니다. 즉 데모스란 흔히 생각하듯 다수라는 이름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특정불가능한 힘들로서의 의미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의 공통적 관계를 이루어 낼 때 그것은 집합적 신체로서 민주주의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지배없음은 단순히 아나키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이 불가해한 힘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지배없는 집합적인 신체를 이뤄내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민주주의야말로 그런 점에서 지배없음, 자기지배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우리가 강제한 게 아니야.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거야.” -괴벨스


얼마전 <MB의 추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는 경제성장 7%, 일자리 400만개 창출, 세계 경제 7대 대국, 지금 돌아보면 정말 기도 안차는 MB님의 소위 747공약이 가진 허상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그 공약들이 지켜졌는지, 안 지켜졌는지 혹은 지켜질 수 없었는지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는 나치 정권의 선동가 괴벨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강제한 게 아니야.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거야.” 그렇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자기지배야말로 정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정치적’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대통령으로 누구를 찍을까의 문제도 자기지배를 빼앗으려 하는 자들을 거부하는 문제로 바꿔 생각해야 하는건 아닐까? 그 속에서만 우리는 민주주의를 단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문제로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은 아닐까?


_ 담담(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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