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우리, 또다른 갱신자들

푸코가 말하는 푸코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쓰여진 내 저작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이었나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권력의 현상들을 분석하거나, 혹은 그러한 분석의 기초를 정교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목적은 우리 문화에서 인간이 주체로 되는 방식인, 상이한 양식들의 역사를 창조하는 데 있었다. 내 저작은 인간을 주체로 변형시키는 대상화의 세가지 양식(three modes of objectification)을 다루어 왔다. 첫 번째는 스스로에게 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질문양식이다. 일반문법(grammaire gênerale), 철학, 그리고 언어학에서, 말하는 주체를 대상화시키는 것이 그 예이다. 이 양식의 또다른 예로서, 생산주체, 즉 노동하는 주체를 부와 경제학(economics)의 분석 속에서 대상화시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이의] 세 번째 예로서, 자연사 또는 생물학에서 살아있는 존재자체를 대상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내 저작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내가 “나누는 실천들”(dividing practices)이라 부르게 된, 주체의 대상화를 연구했다. 주체는 자기 내부에서 나뉘거나 혹은 다른 이들로부터 나눠진다. 이 과정은 그를 대상화한다. 미친 자와 정상인 자, 병자와 건강한 자, 범죄자와 “착한 소년들”이 그 예들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간이 자신을 그 또는 그녀라는 주체로 전환시키는 방식-이것이 나의 최근 저작이다-을 연구하고자 했다. 그 예로서, 나는 성의 영역을 선택하였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성”의 주체로서 인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가. 그러므로 내 연구의 일반적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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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푸코의 긴 문장을 씨앗문장으로 인용해본다. 나는 연구실에서 푸코를 공부한지 1년이 지나서야 이 글을 만났다. 이 글들을 만나고서, 푸코의 이 책 저 책을 뒤지며 밤새 흥분과 감동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담론의 질서』, 『정신병과 심리학』, 『임상의학의 탄생』, 『감시와 처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비정상인』, 『주체의 해석학』, 『성의 역사』 그리고 각종 대담들이 하나의 주제 주위로 성운처럼 감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글 「왜 권력을 연구하는가 : 주체의 문제」는 1982년 푸코가 영어로 작성한 글로, 영어권에서 발간된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드레퓌스와 라비노우)라는 책의 '후기'로 쓰였던 것이다. 푸코가 이 글을 쓴 시점은 『성의 역사』 1권을 쓴 후 7년이 지난 시점이며, 이른바 ‘그리스 로마로의 어떤 전회’가 마무리되고 있었던 시기이면서, 81년 “주체성과 진실” 강의를 거쳐 82년 “주체의 해석학” 강의를 진행 중이던(혹은 하였던) 시기였다. 아마도 『성의 역사』 2권의 놀라운 서문에서 말했던 바대로,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묻고 또 묻던 시기였을 것이다. 물론 죽음을 앞둔 2년 전이기도 했다.

이 글은 12페이지(번역문 기준)에 불과한 아주 짧은 글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 푸코는 자신의 모든 작업을 간명하고도 강렬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내 연구의 일반적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이다!” 그는 자신의 초기 작업은 주체를 대상화시키는 방식들(이른바 언어학, 경제학, 생물학 등 과학들)을 연구한 것이며, 중기 작업은 주체들을 구분하는 방식들(이른바 병자, 광자, 죄수)을 연구한 것이며, 후기 작업은 주체를 전환하는 방식들(이른바 인구 주체, 성적 주체)을 연구한 것이라고 간명하게 정리한다. 이것은 마치 니체가 말년에 가서 자신은 예전부터 영원회귀사상을 구상해왔다고 묘사(『이 사람을 보라』)한다거나, 데리다가 말년에 가서 자신의 ‘해체 사상’이 태생부터 ‘정의’의 문제를 품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법의 힘』)과도 흡사했다.
 
특히, 내게 강렬한 인상을 준 문구는 ‘현재의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오늘날 우리의 표적은 ‘우리는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란 무엇인가를 거부하는 일이라고 단언하는 저 빛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날것인 채로 사물과 만나지 못한다. 각자가 포함되어 있는 진리체계에 따라서 세상과 만난다. 우리는 진리체계가 구성한 어떤 주체성을 가진 채로만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주체성”이라는 놈을 경유해서만 “나”에 대해 묻고 답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푸코가 주어진 주체성[아마도 우리는 이를 이른바 ‘정체성’으로 안다]을 거부하려는 의미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정말 짜릿한 것이었다.


“인간이 마치 해변의 모래 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푸코, 『말과 사물』


특히 푸코는 우리가 이른바 인간과학의 진리체계[심리학, 언어학, 생물학…] 안에서만 이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체가 머물고 있는 ‘과학’이 만들어놓은 빤한 대답만 하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과 더불어 그런 지식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권력형식으로서 ‘국가’를 남다르게 탐구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의 국가권력이 개별화하는 동시에 전체화하는 권력형식이라고 강조한다. 아울러 인류 사회 역사상 국가만큼이나, 개별화하는 테크닉과 전체화하는 과정을 이렇게 하나로 교묘하게 결합시켰던 적이 없었다고도 주장한다. 결국 우리는 이런 국가권력이 생산한 진리체계 안에서 “우리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셈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인지 알려면, 국가가 구성한 철학, 국가가 다듬어 놓은 언어와 문법, 국가가 관리하는 생물학, 국가가 조사해 놓은 통계를 통해서야만 가능하다. 더군다나 그것에 대항하는 자들의 담론체계조차 국가주의에 의해 물들어 있어서 동일한 결론을 가져오게 하였다. 물음조차 제대로 묻지 못하는 존재인 셈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알게 되었다고 하는 그 “앎”이 도대체 진짜 앎인지 의문스럽게 된다. 그러나 그 앎을 해체하기 위해서 다시 질문하려고 해도, 또다시 그 예정된 답안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나는 푸코가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진리체계를 향한 모험 같은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푸코의 ‘자기배려’가 떠오른다.
 
그러나 푸코의 ‘자기배려’를 읽은 사람들의 관점은 대개 세 가지 정도로 갈린다. 첫째, ‘자기배려=자기수양’이라는 관점이다. 그래서 주저없이 푸코가 소개한 그 방식을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수련 방식으로 수용하려는 태도이다. 이들에게는 푸코가 문제 삼고 있는 ‘주체’나 ‘장치’ 같은 문제가 사상되어 버린다. 사유를 벗어던지고 수양에 몸을 맡겨 버린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의 수련 방식들에 대한 정보로 가득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 로마의 찬양자가 되어  끊임없이 ‘수양’에 대해서 말한다. 그야말로 새로운 도그마인 셈이다.


둘째, 그리스 로마를 ‘자기배려’라는 사상으로 구성된 세계로 보고, 그 기반이 되는 ‘자기배려의 세계관’을 하나의 모델로 고정시켜서 정리해내는 시선이다. 이들에겐 ‘자기배려의 세계관’이 일종의 모형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형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이 태도는 모델을 잘 정리해서 삶의 현대적인 대안으로 적용해 보려는 기능주의적 입장이다. 이들은 자기배려를 정확하고 엄밀하게 정의하고 싶어 한다. 이들에게 자기배려는 고정된 실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전통적 맑스주의’ 입장에서 자기배려를 읽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후기 푸코의 작업은 권력론이나 통치론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통적’ 좌파의 입장 ― 물론 이것도 또한 이들 머리 속에 협소하게 자리잡은 전통적인 입장일 뿐이다 ―과 연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푸코는 당대 맑스주의자들의 ‘국가장치’ 개념을 비판적으로 겨냥(나는 『안전, 영도, 인구』가 그렇다고 생각한다)하기도 했다. 국가를 주적으로 삼는 그들의 태도야말로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여기에 대해 그들은 푸코의 주체성 탐구가 ‘권력을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기술’에 대한 탐구일 뿐이고, 그래서 그의 접근이 기껏해야 ‘개인주의적인 윤리학’으로 퇴행해 버렸다며, 자유주의자들의 그것과 뭐가 다르냐고 반문한다.


조르주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사랑의 노래>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자기배려’라는 놈은 아주 묘한 녀석이다. 그것은 권력형식을 끊임없이 깨는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사실 ‘자기배려’와 그것을 행하는 ‘자기’라는 용어의 의미조차 시기별로, 철학자별로 계속 갱신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구도 하에서 혹시 존재할지도 모르는 종속적인 상태를 끊임없이 찾아내서 깡그리 없애려고 했다. 그가 등에처럼 사람들에게 가하는 엘렝코스(논박)는 이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실천’의 한 방식일 뿐이다. 그가 한 방법이라곤 묻고, 묻고 또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그 진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더군다나 그런 무지를 몰랐었다는 것[무지의 무지]까지도 명확히 알게 한다[“우리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조차 거짓질문이었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된다]. 그는 사실상 우리가 알아야 할 ‘앎’은 이게 전부라고 말하려는 듯이 따져든다. 이게 얼마나 강렬한지, 나는 소크라테스가 자기배려라는 것을 영원한 진리 운동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 위에서라면 도무지 고정된 하나의 권력 형식이 한 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불가피할지도 모르는 권력형식을 하나로 고정하여 거부하거나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갱신하는 방식으로써만 그 형식들을 받아들이거나 벗어난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적으로 진리(진실)놀이를 구성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수양도 아니며, 세계관으로서의 실체도 아니며, 고정된 개인의 윤리적 퇴행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권력(비가시적인 쾌락조차 권력이다)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끝까지 밀고 들어가면 자기배려는 자기 스스로의 활동으로 자신을 변형시키고, 어떤 특정한 존재양식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훈련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어쩌면 푸코는 주체를 끊임없이 변형함으로써 종속적인 주체 자체가 없어지고, 따라서 그런 주체를 형성하는 고정된 권력기관 자체가 문제되지 않는 그런 역설을 그리스 로마의 자기배려에서 발견했을지 모르겠다. 그것이 푸코가 생각한 무한히 변형되는 출구였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로 퇴행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그런 운동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마지막을 장식했던 표현을 빌린다면, 모두가 각각의 물방울인 채로, 모두가 하나의 함성을 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하나의 힘으로 우리를 바꾸고[大洋], 다시 각자인 채로 살아가는[물방울] 방식일 테니까 말이다. 자기배려란 우리가 우리를 바꾸는 힘이며, 바로 그것이 ‘주체성과 순종의 형식들에 대한 새로운 투쟁’이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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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송씨 2012.11.07 09:29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내가 누구인지 묻는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 나를 규정하려고 하는 프레임을 거부하는 것. 약샘의 글을 보니 푸코든 니체든 찐하게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네요. 저도 이분들과 밤을 새하얗게 지새우고파요ㅋㅋ

    • 북드라망 2012.11.07 11:42 신고 수정/삭제

      "아마도 오늘날의 표적은 우리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란 무엇인가를 거부하는 일일 것 같다." 저도 이 문장을 읽으며 무릎을 탁! 하고 쳤습니다. 멋있어서....하하하;;

      니체도 푸코도, 조만간 꼭 찐~~~하게 만나길 바랍니당~~ ^^*

    • 약선생 2012.11.07 15:38 신고 수정/삭제

      네! 정말이지 푸코는 어떤 경우에도 경계의 극한으로 달려갔던 것 같습니다. 님께서도 경계 끝까지 달려가서 뿅하고 탈주하세요. 그러면 분명 새로운 지평이 펼쳐질 거예요 ^^ 감사합니다.

  • 신금이 2012.11.19 13:47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경계 끝까지 달려가라니... 경계가 어디에 실체로 존재하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내가 내 발을 떼는 바로 그 순간 내 발밑에 생겨나는 것이 경계 아닐까요... 달려가는 그 순간순간이 경계를 넘는 순간이죠.

    • 북드라망 2012.11.19 17:42 신고 수정/삭제

      신금이님 말씀처럼 약선생님이 말씀하신 내용도 그 순간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
      자! 그렇다면 약선생님을 소환해서 진실(?)을 밝혀보겠습니다! 뿅!

    • 약선생 2012.11.20 13:00 신고 수정/삭제

      맞습니다. 신금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언제나 이미’ 경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계가 아니라면 유기체로서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아마도 우리는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끊임없이 경계를 타 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우리는 그런 상태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합니다. 또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머리로만 이해하게 되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언제나 이미 우리는 경계를 타 넘고 있잖아!”와 같이 퇴행적인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왜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통념적인 사고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통념적으로는 ‘경계=위험’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통념 속에서는 위험에서 벗어나려하고, 그래서 ‘경계’보다는 ‘중심’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이게 심해지면 ‘안전에 대한 망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경계에 가면 안 된다는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있으면서도, 실재적으로는 경계에 있게 되는 역설에 빠져 있지요. 거대한 사회/정치적 장치들이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고 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계에 있으면서, 경계에 있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역설적으로 경계로 달려가야 한다고 주장해봅니다. 통념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의식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경계라는 곳이 실체는 아닙니다. 오히려 경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할까,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공부, 사고실험, 공동체 투쟁, 정치 투쟁 같은 것 등, 무엇이든 ‘경계’를 구성하면서 투신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각자가 혹은 우리가 서로 같이 만들어 가야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였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순간 경계는 위험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였을 뿐이라는 신체적 깨달음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그 경계로서 말입니다. 아마 이런 것이 우리 감이당에서 주장하는 ‘현장’이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가 있는 곳에서 자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앞에 있는 곳은 ‘통념적인 자리’이고, 뒤에 있는 곳은 ‘통념을 벗어나 우리가 스스로 구성한 자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게 현재까지의 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