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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闊步)

마음으로 본다는 것 - 제이의 가을소풍

by 북드라망 2012. 10. 29.

가을 소풍



- 가을엔 어떤 느낌이 들어?
- 고요한 느낌…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 같은… 이제는 다 내려놓아도 될 것 같은…
- 허… 도통하셨네
- 엉? 도통하는 게 뭔데?

그렇다. 이번 가을에도 제이는 연애에 대한 집념을 내려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도통하기는 힘들 것 같다. 여튼,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오곡이 풍성한 결실의 계절. 우리가 다니는 길의 가로수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 장엄하다. 거리의 과일가게에 얼마 전까지 포도가 한창이더니 지금은 홍시, 대추, 밤이 좌판 가득 쌓여 있다. 제이도 오늘 집에서 점심으로 홍시를 먹고 나왔다고 한다. 맨날 똑같은 밥 먹는 게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럴 때 계절의 별미로 입맛을 돋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제이는 홍시를 어떻게 먹을까? 말랑말랑한 껍질을 얇게 벗겨서 한 입씩 베어 먹었을까? 오물오물 할머니처럼 숟가락으로 떠먹었을까? 홍시 많이 먹으면 변비 걸려. 내가 겁주듯 말하니까 제이는 많이 안 먹었다고 한다. 몇 개 먹었는데? 세 개. 맙소사! 한두 개도 아니고… 세 개나 먹었으면서 많이 안 먹었다니 홍시가 터질 노릇이네!


길에 쌓이는 낙엽들, 가을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기이다.


오늘은 밀알 모임에서 가을 소풍을 간다. 예배를 드리는 대신 한강에 나가서 강바람을 쐬고 유람선도 탄다. 와 배를 탄다! 제이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제주도에 한 번 가본 이후 물길을 건너본 적이 없다. 그때도 배를 탄 게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가서 물 위를 떠가는 기분이 어떨지 너무 너무 기대가 된다. 게다가 유람선에서 마술쇼도 한단다. 마술이라니! 제이는 한 번도 마술 구경을 한 적이 없다. 명절 같을 때 텔레비전에서 중국 곡예단이 묘기하는 건 봤다. 반짝이는 옷을 입고 공중 그네를 타고, 코끼리 등 위에 사람들이 삼층 사층 탑을 쌓는 모습… 아 참, 그건 마술이 아니지. 마술도 잠깐 본 것 같다. 상자 속에 여자가 들어갔다. 남자가 상자를 여러 동강으로 잘랐다. 그런데 상자 속의 여자가 멀쩡하게 살아나왔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눈이 휘둥그레지던 기억. 유람선에서는 과연 어떤 마술이 펼쳐질지… 설레는 마음으로 제이는 소풍길에 나섰다.

한강변에는 우리처럼 소풍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는 가족들, 낙엽 떨어지는 길을 산책하는 연인들… 그런데 우리가 깜짝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하늘이 너무 많은 것이다! 드넓은 잔디 구릉 아래로 한강이 있었고 그 위로 전부 하늘이었다. 평소 가로수 나무들 사이로 조각난 하늘만 쳐다보다가… 갑자기 온 세상이 하늘이다. 우리는 하늘 속에 있다. 어? 그리고 이건 또 뭐지? 땅이 너무 평평했다. 평소 울퉁불퉁하고 홈 패인 길만 다니다 평평한 길을 가자니 휠체어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는 것 같다. 아 이건 뭐… 길을 가는 것이 하늘에 안기는 느낌이다. 구름 속을 떠가는 느낌이다. 우리가 그대로 가을 하늘의 한 점 구름이 되는 기분이다. 아아아아… 바람을 가르며 우리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달려갔다.

친구들을 만나 같이 저녁을 먹었다. 선상 식당에서. 날이 저물고 있었다. 강 저쪽으로 빌딩숲에 불이 켜졌다. 마치 우리들의 소풍을 반겨주듯. 그런데 저녁의 소풍이란 게 좀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우리는 마술을 보고 싶은 거니까. 마술은 밤에 봐야 제 맛이니까. 도시락은 밀알의 어떤 분이 집에서 손수 만들어 오신 주먹밥. 여기에 선상식당에서 파는 우동을 함께 먹었다. 우리는 도시락을 먹으며 강변에 점차 휘황해지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우와 멋지다. 하지만 저 휘황한 불빛 속에서 야근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달플 것인가. 나도 좀 전까지 저 속에 있었으면서, 그리고 거기로 곧 돌아갈 거면서도,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이 땅이 아니라 물이라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고달픈 현실을 낭만적 환상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내 자리에서 한 걸음 옮겨 다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낯선 체험.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가는 것 같다.


시선이 바뀌면, 전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유람선은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승무원이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승선 중의 유의사항과 편의 시설 이용 안내를 해준다. 유람선은 약 1시간 동안 한강을 한바퀴 도는 것이다. 한강의 야경과 강바람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2층으로 간다. 뱃머리의 갑판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으니 내 몸이 곧 배가 되어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것 같다. 여기서 좀 더 스릴을 즐기려면 2층 객실과 갑판 사이 경사로를 미끄럼을 타듯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강바람이 제법 세다. 이 바람을 맞으면서 경사로를 미끄러져 내려오자면 강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다.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면서도 친구들은 이 경사로 미끄럼틀을 떠나지 않는다. 한편, 마술 구경을 하고 싶은 사람은 1층 객실로 간다. 제이는 갈등한다. 마술 구경을 할까? 강바람을 쐴까? 물론, 제이가 가장 원하는 프로그램은 따로 있다. 드라마에 보니까 호화 유람선을 탄 승객들은 매일 파티를 하고 흥미진진한 이벤트를 해서 커플이 탄생하던데… 그런 프로그램이 이 유람선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제이는 하는 수 없이 마술을 보기로 한다.

마술사는 아까 우리랑 같이 줄서서 배를 탔던 청년이다. 후드티셔츠를 입고 슈트 케이스를 든, 앳되고 여려 보이는 청년. 어느새 무대 위에 선 마술사는 실크햇에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다. 무대 위에는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술사는 손수건을 이리저리 흔들었는데 그 손건 속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시디케이스 같이 생긴 나무곽 속에 시디를 넣고 노란 천으로 문지르자 시디 중간의 동그란 부분이 노랗게 변했다. 파란천을 문질렀더니 파랗게 변했다. 빨간천을 문지르자 빨갛게 변했다. 노끈을 꽁꽁 묶었는데 저절로 풀어졌다. 가위로 잘랐는데 붙여졌다. 붙여진 노끈이 또 가위로 자르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끊어졌다. 믿기지 않으시죠? 마술사는 마침내 손짓 만으로 탁자를 들어올리고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게 했다. 정말 믿기지 않으시죠? 마술사는 객석에 있는 아가씨 한 명을 나오라고 해서 노끈이 얼마나 단단한가 만져보게 하고 아가씨가 보는 앞에서 직접 노끈이 저절로 끊어지고 붙여지는 마술을 선보였다.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면서 감탄의 박수를 쳤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마술의 힘! 몰라야 재미있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마술의 세계일지도.


시시해… 마술을 다 본 제이는 실망을 하며 갑판으로 나갔다. 이미 스펙터클한 구경거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오늘 마술은 시시했다. 비둘기를 날리고 노끈을 뗐다 붙였다 하는 게 이제 사람들에게 전혀 놀라운 일이 못 되는 것이다. 마술사는 탁자, 비둘기, 노끈 등과 같은 무대 위의 소품들을 챙겨 다시 슈트 케이스에 넣고 우리랑 함께 배에서 내렸다.


우리는 사는 데 너무 지친 것일까? 마술이 전혀 놀랍지가 않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마술 자체가 아니라 함께 소풍을 간 친구들 중 P가 1층과 2층의 선택에서 1층, 마술 구경을 선택했고, 관객 중에서 제일 열심히 공연에 몰두했다는 사실이다. P는 시각 장애인이다. 앞을 전혀 못 본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마술을 볼까. 나한테는 그게 정말 마술 같다. 제이한테 물어보니 그 친구는 앞을 못 보는 대신 청각이 아주 발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음악을 아주 좋아하며 현재 선교단의 드러머로 활동 중이라고. 그러니까 P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야, 라고 제이는 말했다. 공연이 끝나고 제이가 “시시해” 소리치며 갑판으로 나가버린 뒤에도 P는 1층 선실에 한참 앉아 있었다.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P는 못 본 것은 무엇이며, P가 보고 우리가 못 본 것은 무엇일까? 마술 공연이 끝난 후 우리들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_ 정경미(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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