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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저주스러운 시대, 지금 가장 무서운 적은 어디에 있는가?

by 북드라망 2012. 8. 27.

루쉰과 적들


루쉰은 적과 대놓고 싸울지언정 뒤에 숨어 냉소를 보내진 않았다. 그만큼 적들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후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옆으로 서는’ 수밖에 없어서, 정말 힘이 드네”라고도 했다. 적들은 루쉰의 에너지를 한없이 갉아 먹었다. 그만큼 목숨 걸고 싸웠다는 말이었다. 적들은 도처에서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면 마치 자석에 쇠붙이가 붙듯이 어느새 적들이 나타나서 달라붙었다. 적들이 그를 부른 것일까, 그가 적들을 만든 것일까? 그 적들을 찾아가 본다. 



‘낡은 것’이 적이다

북경여사대 사건 이후 루쉰은 샤먼(廈門)과 광저우(廣州)로 떠돌아 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곳도 루쉰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 시절 편지글에 “베이징이 큰 도랑이라면 샤먼은 작은 도랑”이라면서 “여기도...썩은 수원이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썩은 수원’이란 사학자 구제강(顧詰剛·고힐강). 그는 일찍이 민속학을 연구했던 저명한 역사학자였다. 루쉰과는 일찍부터 왕래가 있었다. 그러나 루쉰은 구제강이 “고대사를 ‘변증’하여 없애버렸다”고 못마땅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제강은 1923년 고대사를 논하는 글에서 “우(禹)는 한 마리 벌레(虫)”라고 했다. 『설문해자』에 “우(禹)는 충(虫)이다”라는 풀이를 근거로 우(禹)는 “도마뱀 종류의 벌레”라는 어이없는 추론을 했던 것이다. 이 말은 훗날 루쉰에게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베이핑이 두 군데 있는 것도 아니고, 베이핑은 모든 현존하는 고대유물보다 더 오래되었다. 우임금이 벌레이던 시절은 차치하고서라도 상주시대에도 베이핑은 확실히 존재했다. 그런데 도리어 왜 그곳은 방치하고 고대유물만 옮겨 간 것이란 말인가?


- 루쉰, 『거짓자유서』, 「사실숭상」

중국은 작가가 필요하고 ‘문호’가 필요하지만 진정으로 학문에만 몰두하는 서생도 필요하다. 누군가 중국에서 역대로 아동을 교육해 온 방법과 교재를 분명하게 기록하여 옛사람으로부터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훈도되어 왔는지를 분명히 알게끔 해주는 역사책을 쓴다면, 그의 공덕은 우(禹)-그가 혹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에 못지않을 것이다.


- 루쉰, 『풍월이야기』, 「우리는 어떻게 아동을 교육했는가?」


첫 번째 글은 1933년 1월 일본이 산하이관을 침략하자 국민당 중앙상무회의가 베이핑(北平ㆍ국민당 정권시기 잠시 사용되었던 베이징의 옛 명칭)의 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고대유물을 난징과 상하이로 분산 이동시킨 반면, 대학생들이 피난하는 것은 금지시킨 사건을 두고 쓴 글이다. 루쉰은 이 글을 국민당 정부 교육부가 각 대학으로 피난금지 통전을 보낸 날로부터 3일 만에 쓴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 침략에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돈이 될 만한 유물들은 ‘문화보존’이라는 명분아래 이동시키지만, 대학생들은 어디 도망가지도 못하게 했다. 루쉰 말대로 대학생들은 “널려 있고 새것”이기 때문에 보호해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이를 조롱하기 위해 구제강의 말을 슬쩍 집어넣었다. “우임금이 벌레이던 시절”이야 베이핑이라는 도시가 있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이것이 루쉰식의 유머다!― 상주시대 이래로는 확실히 베이핑이 존재하지 않았겠느냐는 논거아래, 왜 이렇게 오래된 곳은 방치하고, 그것보다 훨씬 짧은 유물만 ‘고대’라는 이유로 옮겨야 하냐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루쉰은 영원한 적, 국민당 정부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구제강을 비롯한 의고파(擬古派)도 싸잡아 조롱했다. 그래서 제목도 「사실숭상」. 그들 주장을 사실로 믿고 숭상하면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텅 빈 베이핑과 힘없는 대학생뿐이다.

두 번째 글은 여전히 『삼자경』이니,『유학경림』이니 하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아동 교육의 후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단 ‘교육’이라는 것을 하기만 하면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길러내고야 마는 기가막힌 중국 사람들―우리나라도 똑같지 않나 싶다―을 비판한 글이다. 그래서 루쉰은 혹시 역대로 중국에서는 아동을 어떻게 교육해 왔는지를 추적하는, 푸코식으로 말한다면 ‘계보학적인’ 아동 교육사를 쓰면 “벌레에 지나지 않는 우임금”에 못지않은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조롱한다. 국민당 정부의 교육 현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구제강을 비롯한 의고파(擬古派)를 또 다시 공격한 것이었다. 아울러 ‘우임금 못지않은 공덕’이라는 표현은 한유(韓愈)가 맹자의 공덕을 칭송하면서 사용한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한유를 비롯해 중국의 고전사상 전체를 싸잡아 폄하할 위험성까지도 갖고 있었다.



루쉰은 광저우(廣州)시절 한 강연에서 ‘낡은 곡조’에 대해 말한 적 있다. 중국인들은 조화와 절충을 좋아한다고들 하지만, 루쉰이 보기에 그것은 옛 길로 돌아가는 것이고 ‘낡은 곡조’를 다시 노래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낡은 곡조는 부드러운 칼날이라서 더욱 위험하다. 중국인들은 강철 칼로 난자당하는 고통은 느끼면서 칼날이 부드럽기만 하면 머리를 잘라도 죽음을 모르는 것 같다. 한심한 일이었다. 살아나려면 ‘격렬하고’ ‘위험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주인 섬기던 구문화를 철저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루쉰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강연도 ‘사설(邪說)’로 간주되면서 신문에 게재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만큼 세상은 낡은 곡조로 가득했다. 루쉰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혁명의 대오가 호호탕탕하게 기세를 과시하게 되면, 오히려 혁명정신은 흐려지고 사라져가기 마련이라서 그다음 단계는 반드시 구질서로 회귀하려는 반전이 발생할거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국민당 정부와 관료들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새롭게 중국 고전을 연구한다는 사람들 모두 구질서로 회귀하려는 자들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가 극적으로 표현된 글은 「청년필독서」이다. 1925년 <경보부간>에서 ‘청년필독서’를 사회 명사로부터 추천받았다. 량치차오(梁啓超)나 후스(胡適)와 같은 명사들은 앞 다투어 줄줄이 중국 고전 작품을 나열했다. 그러나 루쉰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유의한 바가 없어서 현재로서는 뭐라 얘기하기 어렵다”고 시큰둥하게 대답하고선 ‘부주(附注)’에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나는 중국의 책을 읽으면 어쨌든 기운이 감소되며 실제 인생과 유리되는 느낌이 든다. 외국의 책―인도는 제외하고―을 읽으면 인생과 접촉하면서 무엇인가 일을 하고 싶을 때가 많다. 중국의 책에서는 설사 현 세상을 곧바로 설명하는 경우라도 그 대부분이 미이라의 옵티미즘이다. 외국의 책에서는 가령 데카당스나 페시미즘의 경우라도 살아있는 인간의 데카당스이고 페시미즘이다. 중국의 책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읽거나 전혀 읽지 말고 외국의 책을 읽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책을 읽지 않을 때의 손해란 그저 문장을 잘 쓸 수 없다는 정도일 뿐이다.


- 루쉰, 『화개집』, 「청년필독서」


루쉰이 이 글을 쓸 당시 일각에서는 한참 청년들에게 주의(主義)와 국사(國事)는 논하지 말고, 도서관으로, 실험실로 돌아가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른바 ‘국고정리운동(國故整理運動)’. 여기서 ‘국고(國故)’란 고전이다. 당연히 루쉰의 발언은 애국주의자들을 크게 자극했다. 할취(瞎嘴·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린다는 뜻)라는 이름의 한 청년은 루쉰에게 ‘중국을 떠나라’라고 비난했다. 또 가백삼(柯柏森)이나 웅이겸(熊以謙)같은 사람들은 「편견의 경험」, 「기이하다!이른바 루쉰 선생의 말」라는 글까지 써가며 루쉰을 비난했다. 그들에게 루쉰은 ‘천박하고 무지한 매국노’였다. 이를 두고 루쉰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중국이 팔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설령 팔린다 하더라도 내가 파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미래의 일이니, 그것에 대해 여러분과 헛소리할 필요가 없다.


- 루쉰, 『집외집유집』


루쉰은 일체의 규범과 과거의 권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는 일체의 낡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처럼 완벽하게 봉건제와 그것의 허위를 증오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뿌리인 중국을 부정적인 것으로 형성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른바 ‘전통’에 대해서 극도로 비타협적이었다. 전통은 매번 혁명을 무력화시키고 중국을 후진적으로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다. 루쉰이 보기에 전통이 지시하는 시대는 ‘저주스러운 시대’(『화개집』)이다. 그런 전통을 주장하고 되살리려는 태도는 당연히 ‘저주스러운 시대’를 되살리려는 태도인 것이다.

하문대학 총장인 임문경(林文慶)은 이런 태도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싱가폴에서 의술로 치부하였고 중국인으로서 영국 국적을 가졌으며, 기독교도이면서도 공자를 신봉하였다. 참으로 기묘한 인물이었다. 그는 매주 한 번씩 주회(周會)를 가졌다. 그는 공자를 신봉했기 때문에 주회가 있을 때마다 늘 <대학>과 <중용>을 운운했다. 심지어 영문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주회에 강연을 하는 선생들도 그의 뜻을 따랐다. 물론 루쉰도 강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루쉰은 달랐다. 뒤에서 임문경이 듣고 있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존공(尊孔)’을 비판하면서 중국 책은 적게 읽고 ‘호사지도(好事之徒: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가 되라고 이야기한다.


‘죽은 책을 읽지는’(讀死書)말아야 하며, 잘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죽어라 책만 읽지도’(死讀書)말하야 하며,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책을 읽다가 죽어서도’(讀書死)안 될 것이며 반드시 건강에 주의해야 합니다. (…) 여러분은 잠시 동안이라도 중국 책을 적게 읽어야 합니다. 그래도 진정 읽어야 한다면 이 한 가지만은 염두에 두십시오. 즉 그 내용을 명확히 변별하고 비판하여 찌꺼기는 버리되 정수를 취해야 합니다. (루쉰 강연)


루쉰은 이 강연에서 부딪치는 모든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해 사소한 것이라도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일로부터 시작하라고 했다. 아울러 혹시 좋은 일을 하려다 실패한 호사지도에 대해서 냉소와 경멸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어떤 조그만 일이든 낡은 것들을 돌파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는 말이었다. 그러나 임문경은 이런 주장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후일 쉬광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곳 총장은 (…) 나의 주장이 자신의 존공주의와 충돌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이처럼 엉망진창입니다.”라고 비꼬기도 하였다.



아무튼 루쉰은 앞서 말했듯이 이런 엉망진창인 하문대학에서 구제강을 만났다. 그리고 1년도 채 안되어 떠나 들어간 광주(廣州)의 중산대학에서도 구제강을 다시 만났다. 그로서는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검을 벼린 이야기(眉間尺)」(1927)이라는 기이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이 소설의 첫 장면에 ‘새빨간 코(紅鼻)’만 물 위에 드러내 놓고 할딱거리는 쥐 이야기를 하는데, 바로 이 ‘빨간 코’가 구제강의 별명이다. 첫 장면은 주인공 미간척(眉間尺)이 열여섯 살 되기 하루 전이다. 미간척은 물독 안에 빠진 쥐가 물독 안벽을 따라 항아리를 긁으며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으로 보고, 살려주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다. 결국 실수로 발로 밟아 죽여 버린다. 이 장면을 보고 어머니는 성격이 아직도 그렇게 뜨뜻미지근하냐며 핀잔을 주면서, 그 성격으로 아버지 복수는 어떻게 하냐고 한숨짓는다. 「검을 벼린 이야기」는 복수가 주제였다. 구제강과 같은 ‘의고파들’이야말로 루쉰이 진짜로 복수해야할  대상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적들로서 말이다. 그래서 구제강이 직접 루쉰을 해코지하지 않았지만 루쉰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구제강은 미간척에게 밟혀 죽는 쥐로 설정되었다.
 
급기야 루쉰은 「홍수를 막은 이야기(理水)」(1935)에서 이 의고파들을 대거 등장시켜 한껏 조롱한다. 우선 재해가 오랫동안 계속되자 대학은 해산된 지 오래였고, 유치원마저 운영하는 곳이 없게 되었다며, 단지 ‘문화산(文化山)’ 위에만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문화산’이 1933년 일본 침략 시 고대 유물을 이동시키자고 주장했던 베이핑 문화계 인사들이 베이핑을 ‘문화성(文化城)’이라고 불렀던 것을 풍자한 것이다. 장한(江瀚), 류푸(劉復)같은 이들은 베이핑이 정치나 군사 면에서 중요성이 없으니 베이핑에서 군사시설을 철거하고 방어시설이 없는 문화구역으로 정해달라는 주장을 폈다. 일본이 동북을 강점하고 화북까지 쳐들어온 상황에서 정말 황당한 주장이었다.「홍수를 막은 이야기」는 바로 이들을 풍자한다. 이런 주장은 현실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국민당의 무저항정책에 순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베이핑을 문화성으로 지정하진 않았지만 나중에 결국 베이핑을 일본에게 넘겨주었으며 1933년 초 문화재의 대부분을 난징으로 옮겼다.
 
이 작품에 나오는 문화산 위에 있는 많은 학자들은 당시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단장을 든 한 학자’는 우생학자인 판광단(潘光旦)이다. 강남의 명문세가 족보 자료를 가지고 유전자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시골사람들의 조상들을 바보들이라고 말하고, 이를 증명하려고 하지만 시골사람들 족보가 없어서 연구가 진척되지 않는 학자로 나온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조두(鳥頭:새대가리라는 뜻) 선생이 바로 구제강이다. 이 명명은 구제강의 ‘구(顧)’자가 『설문해자』에 고(雇:새란 뜻)자와 혈(頁:머리라는 뜻)자로 이뤄진 것이라는 설명에서 착안한 것이다. 갑자기 그의 코끝이 온통 새빨개지며―「검을 벼린 이야기」에서 쥐가 빨간 코를 갖고 나타난 것과 같다― 나타난다.


당신들은 유언비어에 속은 거요. 사실 우라고 불리는 사람은 없소. ‘우’란 벌레인데 버,버, 벌레가 어떻게 물을 다스린단 말이오? 내 보기엔 곤이란 사람도 없었소. ‘곤’이란 물고기인데 무, 무, 물고기가 어떻게 무, 무, 물을 다스린단 말이오?


- 루쉰,『고사신편』, 「홍수를 막은 이야기」


한마디로 코미디다. 이 작품에서 루쉰은 낡은 것들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조롱하고 있다. 조두선생은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소나무 껍질을 벗긴 자리에 깨알 같은 과두문자로 우(禹)를 부정하는 증거를 하나하나 써 내려간다. 꼬박 삼구 이십칠, 스무이레나 걸렸다. 그러나 보다 못한 시골사람이 ‘우(禹)’는 벌레가 아니고 자기들이 쓰는 약자[禺]라고 하자, 조두선생은 얼굴이 빨개진다. 마침내 ‘바보’ 시골사람이 말한다. 당신 이름이 조두선생이라는데, 그렇다면 당신이야말로 ‘새대가리’이지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정말이지, 개그콘서트 <갸루상>의 루쉰 버전이다. 구제강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이러자 조두선생 구제강은 발끈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놈이 결국 날 이렇게까지 모욕하다니! 뭐 내가 사람이 아니라구! 내 네놈과 같이 고요 나으리에게 가서 법적으로 해결을 보리라! 만일 내가 정말 사람이 아니라면 내 기꺼이 사형을 청하리라. 말하자면 목이 잘리는 것 말이다. 네놈 알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네놈이 죄값을 받아 마땅하렷다. 내가 국수를 다 먹을 때까지 꼼짝 말고 게 기다리렷다.


- 루쉰,『고사신편』, 「홍수를 막은 이야기」


이건 정말 결정타다. 구제강은 루쉰에게 편지를 보내어 루쉰이 글로 자신을 침해했으므로 “광저우를 떠나지 말고 재판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바로 이 사실을 전설 속의 순임금 부하로 재판을 관장했던 ‘고요’와 국수를 먹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로 희롱한 것이다. 소설의 다음 장(2장)에서 조두선생은 “고증학을 남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따로 민간의 가요들을 수집하러 갔다”고 한다. 사실 구제강은 쑤저우 지방 가요를 수집해서 이를 출판(『오가갑집』)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루쉰이 다시 쐐기를 박고 있었다. 적들에게 루쉰은 너무나 지독한 적이었다.



‘새로운 것’도 적이다

그러나 루쉰이 낡은 것들만 비판한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자이자 루쉰의 진정한 친구였던 취츄바이(瞿秋白)는 자신이 발간한 루쉰 문집 서문에서, 루쉰을 첫째 깨어 있는 현실주의, 둘째는 강인한 전투 정신, 셋째는 반자유주의, 넷째는 반허위의 정신이라고 평가했다(다케우치 요시미,『루쉰』). 특히 ‘반자유주의’라고 말했던 부분은 매우 탁월한 분석이었다. 루쉰은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부르주아 도덕의 허위적인 수입에 극도로 저항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말대로 “그것들을 권위로 삼아 밖에서부터 억누르는 것에 대해 저항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서 관대했던 것은 아니다. 좌파 세력에 대해서도 그들이 내세우는 혁명의식에 대해서 끝까지 따져 물었다. 

1927년 10월 루쉰과 쉬광핑은 상하이로 들어간다. 상하이도 ‘당국’(黨國: ‘국민당이 곧 국가’라는 루쉰의 표현)의 수도 남경과 가깝다 보니 국민당 정부의 관료와 정객들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청당(淸黨)’은 중국현대사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장제스의 명령으로 공산당은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결국 제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 이를 두고 국민당 쪽에서는 ‘당내 공산당에 대한 숙청, 정화’라는 의미에서 ‘청당’이라고 부른다. 반면 공산당 진영에서는 ‘4·12 쿠테타(四一二反革命政变)’ 혹은 ‘4·12 참변(四一二慘案)’으로 부른다. 공산당은 악전고투했으며, 혁명은 퇴조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런 때 상하이 문학계는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을 중심으로 ‘혁명문학’의 기치를 높이 든다. <창조사>의 원로인 성방오, 방금 도쿄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풍내초, 이초리, 팽강, 주경아, 이철성 등은 <문화비판>을 창간하고, 장광자, 전행촌 등은 <태양사>를 설립하여 <태양월간>을 창간한 것이다. 이들이 처음에 몰두한 것은 루쉰 등 원로 작가를 공격하는 일. 우선 펑나이차오(馮乃超, 풍내초).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엘리트다. 처음에 프랑스 상징파 시를 배웠고, 후에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루쉰을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루쉰 이 늙은이는―내가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허락한다면―항상 어두침침한 술집에서 이층 한 구석에 앉아 술에 취한 눈길로 저 멀리 창밖의 인생을 내다본다. 그는 이따금 흘러간 옛날을 못 잊어 몰락한 봉건감정을 추모하였다. 결국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사회개혁에서 뒤떨어진 낙오자의 비애뿐이며 자신의 동생을 보고 한심한 인도주의적 미언을 몇 마디 할 뿐이다. 그야말로 도피주의자!이다. 그가 톨스토이를 본받아 추잡한 설교자가 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 풍내초, <문화비판> 창간호, 「예술과 사회」


반면 궈모뤄(郭沫若, 곽말약)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몰락하는 자는 몰락했고 혁명하는 자는 혁명하러 갔다”라는 말로, 루쉰은 이미 몰락하였고 궈모뤄는 줄곧 혁명하였다고 말한다. 이어서 이초리는 <문화비판> 2호에서 「혁명문학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쓰고 루쉰의 문학을 ‘취미문학’으로 매도하였다. ‘화개[햇빛을 가리기 위해 임금이 쓰는 양산. 루쉰의 『화개집』 풍자) 아래 앉아서 자신의 『소설구문』을 초록하고 있는’ 한가한 루쉰을 한껏 조롱하였다. 또 연이어 성방오와 궈모뤄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성방오는 「문학혁명에서 혁명문학까지」라는 글을 통해서 루쉰이 “한가한 자산계급 내지는 꿈속에 빠져 있는 소자산계급의 대표자”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다음 궈모뤄. 그는 문학예술의 선전기능을 강조하면서 그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자들은 단두대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까지 한다. 서지마 같은 부류를 ‘의식적인 반혁명파’, 어사파를 ‘비혁명적 문학가들’로 재단하는 한편, 루쉰과 모순, 욱달부 등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이미 ‘프티부르주아의 의식을 극복하고’ ‘신사상, 신문학의 새로운 실천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선언한다. 마침내 전행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아Q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시대의 유해에 연연하지 말고 아Q의 시신을 그의 정신과 함께 매장해버려야 한다!


- 전행촌, <태양월간>, 「죽어버린 아Q」



정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판들이었다. 사실 그들은 현대파의 정인군자들보다 강했다. 이때 이들이 루쉰을 두고 표현한 말만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다. ‘돈키호테 루쉰’, ‘문단의 늙은 기사’, ‘전전긍긍하는 공포병자’, ‘최악의 선동가’,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싸우는 충실한 주구’, ‘두려움에 빠진 강박증 환자’, ‘중국의 구세주’, ‘죽은 쥐 한 마리’, ‘꿈 속을 떠도는 인도주의자’ 나올 수 있는 모든 표현들이 다 나왔다. 급기야는 전행촌이 「죽어버린 루쉰」이란 글을 써서 루쉰이 완전히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는 소흥사야(紹興師爺:루쉰의 고향 소흥지역 특수 지식인들로서 과거에 낙방한 후 고급관료의 참모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들)들의 술수’를 재현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 표현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희희낙락이었다. 그러나 루쉰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그들은] 즉 몽롱성을 띠고 있다는 공통점이다. 이 몽롱성의 발상지는 내가 보는 바―풍내초가 말하는 ‘취안도연(醉眼陶然)’으로 보는 것이지만―역시 예의 사랑하는 사람도 있으며 미워하는 사람도 있는 관료와 군벌이다. 그들과의 사이에 이미 연줄이 있거나, 아니면 연줄을 대려고 생각하고 있는 패들이 쓰는 것은 흔히 싱글벙글식이 되며, 누구를 향해서도 화기애애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장래에 대한 심모원려(深謀遠慮: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가 있어서 낫과 해머의 꿈에 가위눌리기 때문에 지금의 주인님에 대한 충성에 철저하지 못하고 그래서 몽롱성이 나오는 것이다. 한편 그들과의 사이에 이미 연줄이 끊어져 버렸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연줄이 없었고 대중 쪽으로 나아간 패들은 사실은 거리낌 없이 발언할 수 있을 터인데도, 설령 문장만은 아무리 용감하고 사람들을 향하여 영웅인 체해 보일지라도 필경은 그들 손에 있는 사벨을 잊어버릴 만큼 어리석진 않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도 몽롱성이 나타난다.


-루쉰, 『삼한집』「‘취안(醉眼)’ 중의 몽롱」


루쉰은 이들의 근원적인 허약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들은 뭔가 강한 것에 기대고 있었다. 자신의 몰락이 걱정되니까, 그것을 막아보려고 필사적으로 강한 것을 찾았던 것이다. 20세기 이래 표현주의니, 다다이즘이니, 무슨 무슨 이즘이니 하는 것들의 흥망이 이것을 보여준다. 루쉰이 보기에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 <창조사>와 <태양사>의 사람들도 이런 흥망에 맞추어서 그 힘에 붙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도 그들이 붙은 편이 ‘최후의 승리를 보증’하기가 곤란할 때 그렇게 그 편에 서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게 루쉰의 조롱이다. 즉 말로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루쉰이 보는 꿈꾸는 풍내초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젊은 문학인들이 새로운 문학, 새로운 철학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해당 사유에 노예적으로만 반응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급의식, 혁명의식을 가지고 끝까지 전투하지 못하고 ‘소흥사야’ 같은 말장난으로 상대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결국 1928년 약수(弱水)란 필명으로 루쉰이 태도가 좋지 않다, 도량이 매우 좁다, 어조가 늙은이의 부정 못할 졸렬함을 보여준다는 말로 인신공격을 해댔다. 이를테면 ‘논전’이 ‘태도전’으로, ‘도량전’으로, ‘연령전’으로 변해 버린 셈이었다. 루쉰은 이를 두고 재미있는 응답을 한다.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엔 이상하게 공통점이 있다. ― 이를테면 개인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나란히 부르조아 계급에 반대한다든가, 보수파와 개혁파가 나란히 인생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며 암흑을 보고 못 본체한다든가, 파시스트와 코뮤니스트가 나란히 인도주의를 싫어한다든가 ― 그 하나의 증거가 임금남(林琴南)씨이다. 도대체 졸렬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요컨대 너무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기의 계급이 아우프헤벤(Aufheben :지양(止揚))되어진다면 사고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걸 모르고 마지막 대목에서 파시스트의 본성이 나와 버리는 것이다. 하긴 ‘늙은이’가 그렇다 하여도 언젠가는 젊은이보다 먼저 죽으니까 두려워할 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려워할 일은 장래의 주석이 될 젊은이까지 임금남같이 우왕좌왕하는 일이다.


- 루쉰, 『삼한집』, 「나의 태도, 도량, 연령」


분명히 루쉰은 개인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보수파와 개혁파, 파시스트와 코뮤니스트 등의 대립을 비웃고 있었다. 이렇게 루쉰은 모든 이항대립적 발상의 허위성을 폭로해 왔다. 풍내초나 이초리와 같은 좌파 문학가들이 바라보듯이 이 세계가 이런 이항대립을 근거로 구성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말한 대로 “자기의 계급이 아우프헤벤”하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루쉰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기부정이 결여된 노예문화로서의 중국문화였다. 항상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계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 저항할 수 있느냐인 것이다. 그래서 풍내초에 다시 물었던 것이다. “가령 ‘최후의 승리를 보증’하기가 곤란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그렇게 하는가?” (루쉰, 『삼한집』「‘취안(醉眼)’ 중의 몽롱」)

취츄바이가 말했던 ‘깨어있는 현실주의’라는 말은 바로 이 말이다. 아무리 새로운 진보주의라고 하더라도, 전(前)근대 사회에서의 그것은 결국 전 근대적으로 변형되고 만다(다케우치 요시미,『루쉰』). 이렇게 되면 아무리 그것이 진보적이라고 하더라도 압제자를 이롭게 하는 수단으로 전화되어버린다. 후스가 들여온 프래그마티즘이 ‘국고정리운동(國故整理運動)’으로 전화되고 만 것도 그런 것이었다.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가 ‘노예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해방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어쨌든 외부에서 찾아온 구원은 그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루쉰은 싸움을 쉽게 끝내지 않았다. 오히려 논전을 통해 논적들이 근거하고 있는 것들을 철저히 해부하며 공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있는 사상들을 소개하지도 않았다. 지독한 엘리트 의식으로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다. 루쉰은 이때부터 맑스주의 저작들을 사들여 이를 열심히 번역해냈다. 그래서 『삼한집』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딱 하나 창조사에 감사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들에게 ‘막다른 곳까지 몰린’ 덕택으로 나는 몇 가지 과학적 문예론을 읽고, 이때까지 문학사가들이 아무리 변설을 휘둘러도 풀 수 없었던 의문을 풀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기회에 플레하노프의 『예술론』을 번역하여 전화론만을 믿고 있었던 자신―및 자신을 매개로 한 타인―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 편집을 마치고 제목을 『삼한집(三閑集)』으로 한 것은 방오(傍吾)를 빈정댐이다.


- 루쉰, 『삼한집』「서문」


루쉰은 적들로부터 ‘막다른 곳까지 몰린’ 덕택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맑스주의의 핵심을 재전유하였다. 루쉰은 1927년 소련 공산당에서 실각한 트로츠키를 특히 좋아했다. 루쉰은 그를 ‘문학예술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비평가’라고 칭송했다. 트로츠키의 저서 『문학과 혁명』을 발췌 번역하기도 하였다. 특히 트로츠키가 만들어 사용했던 ‘동반작가(同伴作家)’들의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번역했다. 이들은 이른바 라프(RAPP,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심지어 적으로 간주되면서 반혁명 작가들로 치부되었던 작가들이다. 완벽한 루쉰 식의 재전유였다. 이를 통해 중국 좌파들의 잘못된 경향을 비판하고 장기적으로는 중국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크게 영향을 준 니체주의, 진화론, 맑스주의 모두 루쉰 자신이 스스로 새롭게 전유한 루쉰만의 사상들이었다. 모든 사상들이 제시하는 사회나 인간형들은 모두 가능성으로서의 세상이거나 인간들이었을 뿐, 목표로서 숙명처럼 받아들여야하는 그런 인간이나 세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루쉰을 “맑스주의자보다 맑스주의적”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적들에게 루쉰은 너무나 똑똑한 적이었다.

나’야말로 ‘나’의 적이다

신해혁명 10주년이 되던 해였던 1921년 <신청년> 12월호에 「아Q정전」 첫 회가 실렸다. 루쉰은 「광인일기」이래 3년 동안 중·단편 소설들을 다수 발표하며, 신문화운동의 중요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운동은 한풀 꺾이며 분열 양상마저 보이고 있던 시절이었다. 루쉰으로선 정치, 문화, 개인 모든 면에서 실망스럽기 그지없던 시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Q정전」은 혁명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운동이 사그라지고, 일상도 지리멸렬해지는 그런 시점을 뚫고 솟아난 아주 예기치 않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익살스러운 서장(序章)에 따르면, 아Q는 성도 불명확하고, 이름조차 쓰기 어려울 뿐 아니라, 더군다나 그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도,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기가 힘들 정도다. 따라서 기존 언어로 대상화하려고 하면 쑥 빠져나가버리는 유령 같은 존재인 셈이다. 요컨대 작가가 쓰려는 것은 지금까지 대해왔던 것들과는 아주 달라서 기존 형식[중국고문]으로 도저히 포착할 수 없고 서양 형식[서양문자 Q:변발 머리 모양이다!]을 빌려와야만 겨우 쓰기 시작할 수 있을 대상이다. 아마도 그것은 아Q가 보편적인 중국인이기 이전에 루쉰 자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현재의 루쉰일 뿐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루쉰, 보이지 않는 루쉰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현재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나, 미래 언젠가에는 미끄러져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나 안의 내 모습들이다. 그것은 루쉰이 만들어낸 루쉰 자신의 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Q의 이미지가 황당하지만 오히려 환상적이면서도 사실적이었다. 완전히 자신만의 전장(戰場)을 만들었다.

루쉰이 발견한 정신승리의 전체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아Q'는 옛날에는 너보다 훨씬 대단했었다는 생각[자존자대(自存自大)]을 품고 있다. 실제가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게끔 해야 한다. 이런 출발점 위에서 그가 벌이는 현실 행위는 이것을 인정받으려는 망상으로만 평가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와 괴리―그는 실제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가 있기 때문에 항상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런 현실의 실패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으로 공격당하거나, 스스로를 학대하며 기만적인 정신승리로 마무리된다. 이 지점에 오면 육체적 학대―아마도 폭력 뿐 아니라 술, 마약 같은 것들도 포함될 것이다―는 정신적 기만을 재생산하는 동력이다. 이제 육체적 학대가 있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이런 프로세스는 갈수록 큰 판으로 순환되고, 결국 육체가 이 기만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괴멸에 이른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아Q와 아Q를 둘러싼 또 다른 아Q들(군중들)’은 이 기만에 홀려, 더욱 큰 기만을 상호 재생산한다.

아Q는 경멸해 마지않는 고문주의자, 봉건주의자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맹목적인 실증주의자, 과학주의자, 계몽주의자, 혁명주의자이다. 다시 말하면 루쉰은 옛 것을 무조건 고수하는 것도 당연히 문제지만, 모든 활동을 ‘지식’으로 변환시키고, 거기에 ‘과학’의 이름을 덧씌우는 기만적인 과학주의의 행태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과학의 기만적 실상’을 모른 채 그것이 모든 것인 양 추종하는 맹목적이고 순진한 실증주의의 행태도 위험하긴 매 한가지다. 만일 그런 행태 속에 있다면 과학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아Q라고 말해야 한다. 루쉰은 그 어떤 기만에도 속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Q야말로 루쉰에게 큰 적이었다. 내 안에 있는 ‘나’의 적! 


그런데 아Q의 마음은 본성상 죽음과 소멸을 품지 않는다. 아Q의 숱한 정신승리 욕망은 죽음과 소멸을 배제하여 구축된 견고한 쇠철방들이다. 이 방 안에서의 아Q는 죽음을 ‘실감’하지 않는다. 조리돌림할 수레에 오르자 목을 자르는 것일까, 일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인생살이 천지간’에 목이 날아가는 일도 없진 않으리라 태연해지려 한다. 하긴 이런 조리돌림도 ‘인생살이 천지간’에 이런 일을 당하지 말란 법도 없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우 어멈을 보자, 기개 없이 노래 몇 가락도 뽑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화급한 와중에 ‘스승 없이 통달한 듯’ 지금껏 불러본 적 없는 가락이 튀어나온다. “이십 년이 지나 또 한 사람....” 그러나 우 어멈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병사들이 메고 있는 총(!)에 넋을 빼고 있다. 사람들은 모조리 눈앞의 현혹에만 끌려가고 있었다. 이 순간 모조리 아Q다.

이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무리로 서서, 아Q 뒤를 따라 오던 늑대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그때 늑대의 눈길은 영원히 기억에 남았다. 흉악하면서도 비겁에 찬, 번득이던 그 눈빛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멀리서도 그의 살가죽을 꿰뚫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여태 보지 못한 더 무서운 눈길을 보았다. 둔하면서도 예리한, 그의 말을 씹어 먹고도 또 육신 이외의 무언가를 씹어 먹으려는 듯 영원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를 따라오는 눈길들. 그 눈알들이 우루루 한데 뭉쳐졌나 싶더니 벌써 그의 영혼을 물어뜯고 있었다.


-루쉰, 『외침』, 「아Q정전」


아Q의 죽음은 모든 자연사가 그렇듯, 아무 일도 아니다. 그저 부질없이 왔다가 가버리는 그런 것이다. 아Q의 “눈이 캄캄해지고 귀가 윙윙거려 전신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느낌”이 죽음을 말하는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고 갈채를 보내던 또 다른 아Q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헛걸음이었다고 불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 이 죽음이 말하는 모든 것이다. 여기에는 이념도, 진보도, 혁명도, 역사도 없다. 이 죽음 앞에서는 오로지 자연의 침묵만 있을 뿐이다. 그 침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죽는 일일 뿐인 거다. 그러나 아Q는 죽음 앞에서 당황스럽다. 이게 무슨 사태인지 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알지 못한 채 죽는 삶이란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이고, 그래서 도무지 살았다고 할 수 조차 없는 삶이 되어 버린다. 그의 삶을 얘기하는 것은 헛걸음이며, 그저 흩어지고 말 뿐이다.

그는 평생을 오로지 살아남으려고 했지만―정신승리법은 삶의 기만적인 기술이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그 모든 삶은 없었던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죽음과 소멸을 모르는 자들의 최후다. 따라서 「아Q정전」의 끝은 이 작품의 서장이다. 알지 못한 채 죽는 삶을 살았던 아Q는 아무리 대상화하려 해도 쑥 빠져 나가버리는 유령적 존재이다. 그는 작가의 몸을 빌려서야 자신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마침내 아Q를 전해야겠다는 데 생각이 이르고 보니 생각 속에 귀신이 자리하고 있는 듯 했다.”(루쉰 『외침』「아Q정전」) 그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까지 지독한 노예였던 것이다.

결국 「아Q정전」이라는 소설에는 두 개의 길이 있는 셈인데, 하나는 기만들이 증폭되어 스스로 파괴되는 소설 속 아Q의 길. 다른 하나는 그 아Q의 길을 실험적으로 따라가서 마지막 아Q의 파멸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소설 밖 루쉰의 길! 아Q는 죽었지만, 루쉰은 아Q의 분투를 통해 자신을 개조하는 ‘계몽’을 완수함으로써 살아남는다. 결국 소설 속의 아Q가 소설 밖의 루쉰을 ‘계몽’한 셈이다. 아마도 이 글을 다 쓴 순간 루쉰은 아Q라는 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 여기에 서술된 루쉰의 모습은 임현치의 『노신평전』(실천문학사 번역본), 왕샤오밍의 『인간 루쉰』(동과서 번역본), 팡시앙뚱의 『루쉰, 욕을 하다』(시니북스 번역본), 다케우치 요시미의『루쉰』(문학과지성사 번역본)을 참조하여 문장들을 재구성하였습니다.


_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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