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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한여름에 읽는 8편의 소설 ① - 세계문학을 만나다

by 북드라망 2012. 8. 4.

이야기는 ‘나’를 바꾼다


『페르디두르케』 - 비톨트 곰브로비치

『페르디두르케』 표지 원작: 발튀스, <거리에서>


우리는 구성하면서 바로 그 구성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쓰면 바로 그것이 뒤이어 오는 부분을 결정한다. 작품은 당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쓰려고 할 때 당신은 결국 전혀 다른 것을 쓰게 된다. 부분들은 전체를 향하는 경향이 있고, 각 부분은 은밀하게 전체를 목표로 한다. 원환을 그리려는 경향이 있고, 보완점을 찾게 되며, 자기 모습을 띠고 자기를 닮은 그런 총체를 욕망한다. 수많은 현상들이 거칠게 파도치는 바다에서 우리의 정신은 부분을 분리해낸다. 예를 들면 귀 한쪽이나 다리 한쪽을 따로 떼어놓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첫 부분부터 이 귀 혹은 다리는 우리의 펜 아래로 오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저 그 부분에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 부분이 다른 요소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마치 담장나무 넝쿨이 떡갈나무 주위를 휘감듯이 한 부분 주위를 감아 도는 것이다. 시작이 끝을 부르고 끝이 시작을 부르며, 중간은 그 둘 사이에서 저절로 창조된다. 절대로 전체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인간 영혼의 특징인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저런 부분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만든 자식이라지만 우리와 하나도 닮지 않은 부분에서 말이다. 더구나 그 애가 엄마 배 속에서부터 확실한 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아!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우리 작품과 닮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작품이라는 외관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작품이 우리를 닮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첫 문장이 이미 영웅적으로 울려 퍼졌기 때문에, 결국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서 끝까지 영웅주의를 늘리고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 이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분리된 부분들을 기반으로 하여 이 작품을 구성하게끔 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이유다. 즉 모든 작품은 한 작품의 일부분으로, 인간은 부분들의 집합으로, 인류는 부분들과 조각들의 혼합으로 생각하는 것이다.(115쪽)


아마도 세계는 여러 ‘부분’들이 이런 저런 모습으로 그저 모여 있을 뿐일 거다. 그것들은 어떤 목적을 향해 계열화되어 모여 있는 것도 아닐 거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의미 있는 유기적 ‘전체’로 구성되는 것도 아닐 거다. 다만, ‘부분’들이 총체를 향한 경향(이것은 오로지 자연의 한 경향일뿐!) 속에서 자신들을 스스로 구성해나가고, 다시 그 구성으로부터 자신들이 재구성되어 나갈 뿐인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모든 ‘부분’들은 ‘전체’라는 가면을 쓰고 다른 '부분'들에게 자기가 '전체'라고 우기고 있을 뿐일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부분’은 그냥 ‘전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전체 자체가 ‘부분’들이 구성되어 가면서 만들어진 또 다른 ‘부분’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머리에 그리는 그런 ‘전체’란 원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정치적인 가면으로서 '전체'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전체는 없다. 모든 부분이 전체다.


페르디두르케
국내도서>소설
저자 : 비톨트 곰브로비치(Witold Gombrowicz) / 윤진역
출판 : 민음사 200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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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저 역시 다른 모든 도시들을 추론할 수 있는 도시의 모델을 생각했습니다. 예외와 배제되어야 할 것과 모순, 보조화, 부조리만으로 이루어진 도시입니다. 만약 한 도시가 이와 같이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도시입니다. 만약 한 도시가 이와 같이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비정상적인 요소들의 숫자들을 점차 줄여나감으로써 도시가 정말 존재할 가능성을 점점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모델에서 예외들을 제외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방향으로든 계속 나아가다 보면 저는, 항상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존재하는 도시들 중의 어떤 도시 앞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제 작업을 어떤 경계 이상으로는 밀고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진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진짜 같은 도시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때까지만 그것은 가능할 것입니다.(89쪽)
 


살 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208쪽)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방문했던 도시들의 이야기를 중국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들려준다. 칼비노가 보기에 책이란 독자가 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길을 잃기도 하고 다시 나아가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출구들을 찾게 되는 그런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도시들은- 55개의 도시들이 총 9부로 나뉘어 각 부별로 5개씩(1부와 9부는 10개씩) 묘사되고 있다- 사유의 극한치에 갔을 때 그 끝에서 만나는 '출구'들일 것이다.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은 사유의 출구들에 대해 사고실험을 하고 있는 셈.


두 사람이 도시들(출구들)을 상상하는 방식은 완전히 반대다. 쿠빌라이 칸은 왕답게 규범에 부합하는 건 모두 포함하고 있는 모델 도시를 먼저 제시하고, 그 도시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계산하면서 도래할 도시들을 추론한다. 반면, 마르코 폴로는 이를 완전히 뒤집어 예외와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만 이루어진 모델 도시를 가지고 도래할 도시들-그러니까, 가능성들-을 추론한다. 없을 것 같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도시. 이들로부터 더 큰 예외들을 지워 가다보면 예외적이지만 존재할 수도 있는 도시를 만나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보기에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만나야할 도시이고 사유해야 할 것들이다. 사유 불가능한 것들을 돌파하여 도달한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들. 그러나 뜻밖에도 이렇게 걸어가서 도달한 곳이 바로 '지금 이곳'일뿐이라는 점에서 칼비노는 사유는 순환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마르코 폴로에게 이곳이 우리가 살아야 할 '지옥'이다.-이 '우리들의 미래'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국내도서>소설
저자 :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 이현경역
출판 : 민음사 2007.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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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미셸 투르니에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타인. … 그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덕을 보고 있었던가를 나는 내 개인이라는 건물 속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매일같이 헤아려보게 된다. … 어떤 화가나 판화가가 풍경 속에 혹은 어떤 기념비 근처에 인물들을 놓고 구도를 잡는 것은 액세서리에 대한 취향 때문이 아니다. 인물들은 척도를 제공한다. 그 인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상자의 실제적인 관점에다가 필수 불가결한 잠재성을 추가하는 가능적인 관점들을 형성한다...스페란차에는 오직 하나의 관점, 일체의 잠재성이 배제된 나의 관점이 있을 뿐이다. 이 철저한 헐벗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인 자동성에 의하여 나는 언덕의 꼭대기에, 어떤 바위 뒤에 혹은 어떤 나무의 가지들 속에 가능한 관찰자들을-매개 변수들을-투영해 보곤 했다. 이리하여 섬은 내삽법과 외삽법의 망에 의하여 종횡무진으로 누벼지고 그로 인하여 모습이 바뀌며 어떤 인식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정산적인 사람은 누구나 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이와 같이 형성되는 것이다. 나는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했듯이 이 기능이 나의 내부에서 쇠퇴함에 따라 그 기능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완전히 감퇴되고 말았다.....내 두 발이 딛고 있는 땅은 그 땅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밟는 것을 필요로 함을 이제 나는 알 수 있다.(66~67쪽)


 존재한다(Exister)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밖에 있다(sistere ex)는 뜻이다. 밖에 있는 것은 존재하고 안에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나의 이미지, 나의 꿈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페란차가 어떤 감각, 혹은 어떤 감각들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역시 나 자신으로부터 타인 쪽으로 도망쳐 나감으로써만 존재한다.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그 반대를 믿게 하려고 기를 쓴다는 사실이다. 존재를 향한 비존재의 엄청나고 공통된 열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미지, 몽상, 계획, 환영, 욕망, 고정관념처럼 밖으로 떠밀어내는 구심력 같은 것이다. 존재하지(ex-siste) 않는 것이 존재하려고 고집한다(in-siste). 그 모든 작은 세계가 큰 세계, 진정한 세계의 문으로 밀려든다. 그런데 그 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은 타자이다. 내가 꿈을 꾸다가 잠자리에서 몸을 뒤틀 때면 나의 아내가 나를 깨우고 악몽의 고집(insistance)을 그치게 하려고 내 어깨를 잡아 흔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만 왜 지칠 줄 모르고 이 문제로 되돌아오는 것인가?(158~159쪽) 



로빈슨이 버지니아호에 이끌려 태평양 외딴 섬으로 온 것은 운명이다. 하지만 이 유일한 생존자는 자기 혼자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거슬러, ‘부재하는 타인들’을 재현해 내려고 몸부림친다. 버지니아호 물건들을 섬 동굴로 옮기고, 우리에 동물들을 잡아 가두고, 땅을 경작하여 곡식을 쌓아두는 것. 게다가 교회 제단 위에서 매일 성서를 읽고, 물시계로 유럽의 시간을 이 외딴 섬에서 재현하는 것. 급기야 섬을 ‘통치’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고, 자신을 총독으로 칭한다. 거주민이 단 한 사람, 총독 혼자뿐인 영국령 국가, 스페란차 총독 로빈슨.

그러나 이 과정에서 로빈슨은 타인이 없다면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닫는다. 모든 비존재는 존재하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모든 비존재는 타자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자신’이란 존재는 타인들의 시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구성물이다. 그러나 스페란차에는 그런 타자가 없다. 따라서 사실상 ‘나’는 없다. 어쩌면 ‘타인 상실’로 발생하는 ‘고독’은 ‘나’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잃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고독’은 다른 타인과 만나기 위해 불가피한 체험이기도 하다. 로빈슨은 스페란차의 진흙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완전한 고독’을 체험하고,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린다. 아니, 잃어버린다. ‘나’가 없어지는 완전한 무의 상태에 도달하는 순간, 마침내 그는 기존 세계의 타자들이었던 ‘유럽인들’, 더 나아가서 ‘인간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 지점에 이르자, 로빈슨은 삶과 죽음이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대지의 차원에서 본다면, 삶과 죽음이 뒤섞여서 정말 지혜롭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로빈슨에게 찾아온 새로운 형태의 타자인 15살 인디언 혼혈아, 방드르디. 로빈슨은 이 방드르디와 함께, 새로운 인간, 새로운 시간으로 넘어간다. 자기가 만들어 가는 이 새로운 길 위에서 자기 몸을 새롭게 구성해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진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럽의 시간을 부정하게 된 것이다. 이제 로빈슨은 ‘자신의 진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는 자기 몸이 하나의 거대한 손으로 둔갑하고, 다섯 손가락이 머리와 팔과 다리로 변하는 꿈을 꾼다. 다리가 검지처럼 일어서고 두 팔이 두 다리처럼 걸어가고 몸이 마치 하나의 손가락 위에 얹힌 손처럼 이 다리 저 팔위에 자유자재로 얹힐 수 있어야 했다. 내 몸은 손, 팔 다리는 손가락! 고독한 자에게 진보는 멀리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도 로빈슨이 버지니아호에 실려 태평양의 끝에 온 것은 운명인 게 맞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국내도서>소설
저자 : 미셸 투르니에 / 김화영역
출판 : 민음사 200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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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 둘, 그러니까 우리 관계는,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래, 우리 관계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어. 우리 관계는 그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수는 없는 거야.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야. 알겠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무인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마도 여러 해 동안 둘이서 외롭게 지내야만 하는 무인도 말이야. 감방 바깥에는 우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이 있어. 하지만 이 안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여기에는 누가 누구를 억압할 수 없어. 단지 있는 것이라고는 지쳐 있는, 아니 뒤틀려 버린 내 마음을 괴롭히는.....어느 한 사람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날 잘 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야.(268쪽)


“넌 날 필요로하고 있고, 나도 널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틀림없어.”

“발렌틴…넌 항상 모든 것에 이유를 달려고 해. … 너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될 대로 되라는 식은 싫어서 그럴 거야....난 항상 만사가 어째서 그런지 알고 싶거든.”

“발렌틴…널 만져도 될까?”

“응…”(287쪽)


“나도 모르게 내 눈썹에 손이 갔어. 점을 찾느라고.”
“무슨 점!....점이 있는 건 나지, 네가 아니야.”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손이 자꾸 내 눈썹으로 가. 있지도 않은 점을 만지려고 말이야.”



“아주 짧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여기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 같은 느낌…”
“……”
“나는 없고……너 혼자만 있는 것 같았어”
“……”
“내가 아닌 것 같았어. 지금 난…네가 된 것 같아.”(289쪽)


나에게 『거미여인의 키스』는 몰리나의 변신 이야기다. 부르주아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자이자 감상적인 동성연애자, 루이스 알베르토 몰리나. 그(녀)가 여섯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순간들은 무언가를 약속하고, 그 약속을 향해 자신을 변신시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영화-소설)는 몰리나와 발렌틴이 서로 상상을 공유하게 하는 장치다. 마침내 거듭된 이야기 속에서 몰리나 그(녀) 자신이 발렌틴이 되고 만다. 

이처럼 변신은 언어적인 것이 아닐까? ‘한계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가능성으로서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데리다는 단언하길 ‘정체성(동일성)은 없다. 정체화(동일화)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나’라는 존재가 이미 ‘정체화’라는 날조에 불과하다면, '내'가 다른 무엇이 된다는 것도 또한 대담한 날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몰리나가 발렌틴과 섹스를 하고 나서, 몰리나가 한 말. “난 네가 된 것 같아.” - 날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몰리나라는 텍스트를 새로운 컨텍스트로 들여보내서, 몰리나인 채로 다른 발렌틴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몰리나는 여섯 편의 영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변신시킬 새로운 컨텍스트를 스스로 구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변신’, 그것은 컨텍스트를 새롭게 구성하고, ‘나’라는 텍스트를 그곳에 새롭게 위치시키는 작업이다.


거미여인의 키스
국내도서>소설
저자 : 마누엘 푸익(Manuel Puig) / 송병선역
출판 : 민음사 200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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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월요일에는 2편이 포스팅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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