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떨림, 삶의 마법을 만나는 시간

출구를 찾아서


회상1 : 몽타이유의 양-되기


언제나 나에게 문제가 되었던 건 좁은 <나>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386세대의 가치관을 간직하신 부모님은 내가 이기적인 도시아이의 전형으로 커가는 것을 보고 속상해하셨다. 타자에게 무심한 것, 사회의 부조리함에 분노하지 않는 것, 나밖에 모르는 것 등등. “20대는 짱돌을 들지 않고 지금 뭘 하고 있는가!” (-_-;)……. 물론 그런 식의 비난에도 부조리한 측면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윗세대의 질타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 현상은 오랫동안 나 자신의 족쇄였다. 신문의 사회지면 앞에서 멀뚱멀뚱 쳐다보며 벙어리처럼 앉아있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현실 앞에서 어떻게 이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는 것. <나>를 그대로 고수한 채 강령처럼 “반대 혹은 찬성”의 지론을 익히고 외우는 것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공부를 해서 지식을 익히고 일부러 체험을 하러 현장을 돌아 다녀도 여전히 변화는 없었다. 즉, 이건 미숙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기심 밑에는 근본적인 무감각이 깔려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끊임없이 쓰고 벌고 쓰라는 현실적 감각과 우리들에게 당위로서 주어지는 386세대의 견고한 감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였다.

새로운 세계는 어디서 오는가? 과연 이 ‘텅 빔’은 지식 혹은 경험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확실했던 것 하나는 돈 없이 굶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돈만 알고 사는 머저리가 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독서가 해결책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책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ㅡ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쓴다는 것은, 살아있음이 글이 되고 또 글쓰기가 열어주는 새로운 ‘살아있음’의 영역이란 존재하는가?)




『몽타이유』(길 출판사)는 미시사책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이는 아날학파 3세대의 대표주자인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의 저서로, 이단재판보고서를 바탕으로 해서 14세기 프랑스 랑그독 지방에 살았던 몽타이유 마을을 세세하게 복원해내었다. 생뚱맞게도, 내가 최초로 맞이했던 ‘새로운 세계’의 벼락같은 충격은 바로 이 중세시절 프랑스의 촌구석이었던 것이다. 왜? 나의 절실한 삶의 고민과 뭐 하나 연결되어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공간이? 그런데 사실은 이 ‘연관성 없는 것과의 연관성’이야말로 내가 찾던 출구였다. 지금까지는 어떤 중요한 이야기나 사건을 들어도 결국엔 그들의 삶, 그들의 말로 저편에 남겨졌었다. <나>는 이편에서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반면, 몽타이유는 대문자 역사에서 한참 빗겨나 있는 미미하고 별 의미 없는 존재들이었는데도 다름 아닌 내 몸 위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 완전히 달랐다.

무엇이 나를 끌어당겼을까? 논리와 검증을 거치지 않고 내 몸에 다이렉트로 꽂혔던 것은 그들의 운동방식이었다. 몽타이유라는 시공간은 어떤 척도로도 규정할 수 없는 그 고유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몽타이유 사람들의 벡터는 끊임없이 국가의 틀도 교회의 틀도 비껴나감으로써 만들어지고 있었고, 거기에는 단순히 동일성과 차이성이라는 범주로 분류할 수 없는 “떨림”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었다. “몽타이유, 그것은 서민들의 생생한 역사요 삶의 떨림이다. 몽타이유, 그것은 피에르와 베아트리스의 사랑이요 피에르 모리의 양떼이다.”(『몽타이유』,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길, 675쪽) 21세기에 태어나 천국을 믿지 않고 도시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도 미시사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구현되는 이 “떨림”을 느낄 수 있다. 의미나 가치가 아닌 매료의 문제. 이 낯선 감각에 이유를 물을 수는 없다. 그것은 연관성 없는 자들과 최초로 결연관계를 맺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어느 생명의 고유한 떨림에 매료되는 순간 그 세계는 더 이상 저편(그들)의 것도 이편(나)의 것도 아니게 된다. 결국엔 나와 몽타이유가 접속하고 있는 딱 그 순간의 ‘이것임’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몽타이유>가 아니라, ‘몽타이유’라는 이름을 통과하면서 내게로 왔던 벅적벅적 거리는 수많은 말과 움직임과 정서들이었다.

최초의 떨림은 이렇게 먼 곳에서 내게 오셨다. 리좀(Rhizome). 무리들이었다. 내 몸에서 놀아 다니는 몽타이유 사람들, 하나님을 외면하는 랑그독 지방의 야생양떼들 말이다.


무리에 대한, 다양체에 대한 매혹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이 되지 못한다. 바깥의 매혹일까? 아니면 우리를 매혹시키는 다양체가 우리 안쪽에 머물고 있는 하나의 다양체와 이미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까? (『천 개의 고원』, 455쪽)


회상2 : 뿌리가 없는 나


흔히 ‘되기’를 『천 개의 고원』의 존재론을 보여주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Being(임)이 아니라 철저하게 Becoming(함)으로서 전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확실히 매혹적인 영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되기는 자기 나름의 고름을 갖고 있는 하나의 동사이다. 그것은 “……처럼 보이다”, “……이다”, “……와 마찬가지이다”, “생산하다” 등으로 귀착되지 않으며 우리를 그리로 귀착시키지도 않는다. (454쪽)


저자들의 말은 확 와 닿지 않는다. 저자들의 염려대로, 우리는 되기를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동사들로 환원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한다. (개-되기. 개‘처럼’ 구는 것인가? 개‘와’ 친해지는 것인가?) 왜냐,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진짜’ 개가 ‘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건 만화영화에 나오는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짓이다. 개와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아주 견고한 장벽이 있다. 하지만 ‘-되기’는 인간이 다른 종으로 형태변화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황당무계한 개념이 아니다. 되기는 오히려, 개와 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바로 그 전제를 깨뜨리기 때문에 실재적인 것이다.


되기는 완전히 실재적이다. 그러나 … 인간이 “실제로” 동물이 될 수는 없으며 동물 또한 “실제로”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 되기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모방하든지 아니면 그저 그대로 있든지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것은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실제적인 것은 생성 그 자체, 생성의 블록이지 생성하는 자가 이행해가는, 고정된 것으로 상정된 몇 개의 항이 아니다. (452쪽, 강조는 인용자)


되기가 마법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우리가 되기가 사유불가능한 판(정상적인 세계) 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미 ‘상상초월’이 아닌가? 가장 객관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과학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분해해버리는 양자역학이, 3차원을 넘어선 11차원의 우주를 이야기하는 M-이론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체화 방식’을 상상해볼 수 있다. 존재를 주체, 형식, 하나의 점으로 바라보는 사고방식은 언제나 초월적인 판을 전제한다. 이 판은 모든 개체들보다 먼저 존재하며, 숨겨진 원리를 작동시켜서 주체를 조직하고 또 구조화한다. N+1의 판. 여기서 1(Unique)은 일자, 통일자, 초월자라는 의미로서의 ‘1’이다. 어떤 개체든 반드시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이 위에 덧씌워진다.


진정으로 다양성을 보호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세계화와 미국화에 긴장할 것이 아니라, 자본 그 자체에, 그리고 맹목적인 다양성이라는 목소리 그 자체에 긴장해야 한다.
─신지영, 『들뢰즈로 말할 수 있는 7가지 문제들』, 141쪽)


그러나 세상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판도 존재한다. 이 판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해체주의인 것은 아니다. 주체나 형식, 구조 없이도 무언가를 유지시키고 인식하고 개체화할 수 있는 걸까? 물론이다. 이 판은 형식-재료 대신에 ‘속도’와 ‘강렬도’라는 두 축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개체화를 시도한다. 가령, 불이라는 것은 현재 연소되고 있는 원소들의 ‘속도’와 뜨거움의 ‘정도’로 말해질 수 있다. 뜨거운 한낮에 남산 언덕길을 올라가는 나는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하얗게 작렬하는 햇빛과 분리될 수 없다. 물론 이 판에도 최소한의 주체, 형식, 기능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 세계의 근본적인 힘인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중계점일 뿐이다. 생성은 구조의 대척점이 아니다. 절대적인 생성은 정지와 움직임을 구별하지 않는다. 차이들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차이화할 때, 그 역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비로소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 판 위에서 언제나 ‘생성되는 것’의 일부로서 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n-1의 판.


이건 <나>를 상상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나는 인간이다. 여성이고, 딸이고, 백수고, 중졸이다. 나를 규정할 수 있는 무수한 주체화의 점이 있다. 이 점은 힘겹게 다른 점으로 건너가지만, 쉽지 않으며, 인간-동물이나 남성-여성 같은 견고하게 짜인 이분법 속에서는 아예 이동조차 금지 당한다. 하지만 이 당연해 보이는 전제에 질문을 던져보자. 이건 존재한다는 것과 어떤 <존재>로서 규정되는 것을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존재하다’라는 동사는 … 규정된 양태와 시간의 총체를 지칭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취해진, 비결정된 텅 빈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499쪽) 참으로 멋진 말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해가고 있는 수많은 흐름들이 총체적으로 뒤섞인 것이다. 시공간적 규정들은 단순히 주체가 움직이는 배경이 아니라 나라는 다양체의 일부로, 지금-여기는 곧장 나의 신체와 합성된다. “어느 시각, 어느 계절, 어느 분위기, 어느 공기, 어느 삶과 분리되지 않는 배치물들 속에서 주체이기를 그치고 사건이 되는 것….” 되기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인간중심적인 <생명>이라는 범주를 뛰어넘어 고찰하게 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돌멩이-되기, 분자-되기, 심지어 강렬하게-되기를 할 수 있다. n-1의 판은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다.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다.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몽타이유』를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양떼무리들의 습격은 단순히 비유일 수 없다. 그것은 양-되기였다. 되기의 경험은 낯설면서도 강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내가 되고 싶은 ‘대상’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간다. 재미있는 건,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것과 동일화되는 게 아니라 낯설어진다는 사실이다. 개가 되고 싶다면 개를 모방해서는 안 되며, 개로부터 (개 자신조차 모르고 있을) 그것만의 강렬한 특성을 붙잡아내어 나에게로 가져와야 한다. 그 순간 개는 개대로, 나는 나대로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되기는 ‘그것’과 관계되는 ‘어떤 것’을 뽑아낸 후 나의 속도와 합성시키는 행위로서의 동사다. (“개 자체가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는 한 나는 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90쪽) 되기는 욕망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상대를 통과해가겠다고 마음먹을 때 발생하는 것은, ‘나로부터 너에게로’라는 주체의 이동이 아니라 둘 사이에서 생성되는 낯섦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이런 경험을 한다. 되기를 아주 강렬하게 구현해내는 영역(음악, 미술, 글… 모든 예술적인 기술들)에서, 혹은 사랑할 때. 바라보기만 해도 바카스 한 병 쭉 들이마신 것처럼 내 몸이 소용돌이 칠 때.

하지만 이것들은 <상대방> 때문에 얻어진 것들이 아니다. “자아를 고무하고 동요시키는 무리의 역량의 실행”(457쪽). 되기는 언제나 무리들이며, 무리들은 내 안에 외부로서 이미 존재한다.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사이의 흐름이 없는 나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자아는 다양체와 다른 다양체 사이의 문턱에 불과하며, 삶의 경이로움은 늘 외부와 접속함으로써 경험되는 것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낯설어진다. 그게 경이로운 거다(*^^*).

나에게 뿌리가 있는가?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이 정신없이 분열될수록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자아의 정체를 확정지어야 똑바로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노숙자를 보며, 흑인을 보며, 뚱보들을 보며, 찌질한 20대 루저들의 초상을 보면서 ‘저 분열된 무리들’에 혹여 내가 섞이지 않게 노심초사한다. 어쩌나, 나는 이미 분열되어 있는데. 지금-여기서 무리의 경이로움을 체현하고 있느냐 아니면 텅 비어있느냐 하는 두 가지 케이스가 있을 뿐이다. 자유롭게 피레네 산맥을 떠돌아다니던 몽타이유의 양치기에게서 되고 싶은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회상3 : 우리들, 우리시대의 존재론, 연애


나는 좀 이상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시대는 나를 표면적으로 억압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벌거벗겨지면서 동시에 온갖 종류의 향락들, 감각들, 이미지들을 제공받는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 표현의 강렬함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무감각해진다. 신념과 소신 같은 것들이 비웃음 당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겨냥했던 과녁판이 순식간에 다른 것으로 변모해있기 때문이다. 적을 알 수 없고 또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개념적으로 규정하지는 못해도 우리의 몸은 그것의 속도와 강렬도를 느낄 수 있다. (어떤 혁명적인 선언보다도 더 빠른, 어느 과격주의자의 말보다도 더욱 상상초월인 ‘그것’) 도서관에 가면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과거의 훌륭한 유산들이 쌓여있지만 이 중 어느 책도 우리들의 시대를 읽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귀찮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자기스타일대로 전략을 구성해야 한다. 방심했다간? 공중분해 되기 딱 좋다.

되기를 보고 누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필 왜 이렇게 존재해야 하는가?” 존재한다는 것은 당위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 ‘하필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존재하셔야 합니다’라고 답할 수가 없다(-_-;). 다만 보여줄 뿐이다. 최소한 나는 이 개념 덕분에 나의 낡은 족쇄를 끊을 수 있었다. 철학적 의의보다도 중요한 건 되기가 늘 ‘소수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되기는 언제나 동물-되기, 여성-되기, 아이-되기, 소수자-되기다. 동물은 인간보다 덜떨어져 폭력을 당하는 대상이, 여성은 남성보다 약하고 배려 받아야할 성性이, 아이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미완의 단계가 아니다. 동물, 여성, 아이는 <다수>라는 기준에 포획되지 않는, 끊임없이 기준선을 빠져나가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힘 그 자체를 의미한다. 저자들은 우리는 이들과 접속할 때에만 낯선 지대를 형성하며 되기(생성)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왜 사회의 약자들을 도와야 하느냐는 앞의 질문을 되짚어본다. 돕느냐 돕지 않느냐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다 함께 잘 살아보자는 애매한 문구가 나의 욕망이 될 수도 없다. 나는 나의 무감각을 처절하게 부수기 위해서 늘 모르는 지대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소수자를 돕는 다수가 아니라 내가 바로 소수자가 되는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전투가 된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우리는 액체이며, 섬유들로 만들어진 발광체라는 것이다.”(473쪽, 재인용)


신체를 정의하는 것은 지배받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 간의 관계이다. (…) 모든 불균등한 두 힘은 그것들이 관계 속에 들어가자마자 하나의 신체를 구성한다. 그래서 신체는 항상 니체적 의미에서 우연의 산물이고, 가장 <놀라운> 것, 사실상 의식과 정신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 『니체와 철학』, 민음사, 87쪽


싸워야 할 것은 언제나 ‘나’다. 권태와 불안, 세상 앞에 벌거벗은 생명의 역설적인 무감각함이다. 나의 욕망을 바꾸는 게 정말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의심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나>라는 영역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저 밑에서는 국가라는 장치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움직이고 있다. 내 삶은 자본주의가 깔아놓은 판에서 도망치지 못할 것이고 그 위에서만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내 삶이 없으면 자본주의가 펼쳐질 장소도 사라지게 되는 게 아닐까? 권력이 우리들을 개별화시키고 개인개인의 정체성을 더욱더 강화하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가 자본주의와 전략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장소는 <나>라는 고정무대가 아닐까. 구원해야 할 것은 나인 것이다. 쥐뿔도 없는 20대, 돈도 능력도 경험도 없는 이 무미건조한 시간을 떨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떨림 속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낯선 것들과 결연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무매개적으로, 직접 하나의 세계를 생산하기. 이 세계에서는 세계 그 자체가 생성되고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된다. … 그때 우리는 풀과 같다. 즉 우리는 세계를,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의 생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소통하는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사물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사물들 한가운데서 자라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했기 때문이다. … 흠뻑 적시기, 없애버리기, 모든 것을 놔두기. (530~531쪽)


왜 『천 개의 고원』을 만나게 되었는지 돌이켜보니 내가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ㅋ). 나는 개를, 꼭 개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어쨌든 나와 다른 무엇을 찾기를 항상 원했다. 사랑한다는 건 선남선녀가 손 잡고 걸어가는 게 아니라 나를 부수고 낯설게 되는 그런 힘이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려면(!) 사랑을 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심난하더라도 부평초처럼 떠돌면서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보다 더 심난할 수는 없다. 좁디좁아 이기적인 나는 합리적인 게 아니라 그저 무능할 뿐임을, 무능한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싶어서 죽겠음을, 역시 찌질했던 십대의 사춘기를 통과하고 난 지금에야 고백한다. 사랑을 하리라. 말은 쉽고 행동은 늘 실패한다. 실패할 것이다. 연애도, 사랑도, 『천 개의 고원』을 읽으면서 경험했던 신체와 사유의 떨림 역시 어느 지점에서는 멈출 것이다.  하지만 그게 멈춰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 ㅡ되기.


[모든]판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실패들은 판의 일부를 이룬다..(511쪽)



 

_ 김해완(남산강학원 Q&?)





※ <나의 삶, 나의 글, 리좀>의 마지막 편입니다. 저는 편집하는 동안 『천 개의 고원』의 매룍(!)에 푹~ 빠졌었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 혹시 이 코너를 계기로 들뢰즈의 다른 책을 읽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셨다면 저는 『들뢰즈로 말할 수 있는 7가지 문제들』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도 짬 날때마다 읽고 있는데, 명쾌하면서 재미있습니다. 강추! +_+)b


8월에는 새로운 코너로 찾아오겠습니다~~ 또 만나요~ *^ㅂ^*

 


몽타이유 - 10점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지음, 유희수 옮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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