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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길이 끝나면 드라마가 시작된다

by 북드라망 2012. 7. 9.

사이의 길, 평등과 차이의 드라마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압록강에서 열하까지 왕복 6천여 리 길. 『열하일기』의 무대이다. 『열하일기』는 실로 만만치 않은 이 여행길을 글로 풀어낸 아름답고 도전적인 이야기이다. 연암은 길 위를 달리는 말 등, 길옆에 서있는 낯선 가게, 그 어느 곳에 가서도 수없이 관찰하고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러면서도 그때마다 새로운 길을 내고, 어느 누구보다 즐겁게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로부터 『열하일기』의 글들은 온갖 길들로 범람하게 되었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넘어가는 도강길, 성경에서 장사치들과 사귀려고 나선 잠행길, 연경에서 열하로 느닷없이 떠나게 된 열하행길, 고북구 장성을 지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넜다는 일야구도하길. 그 길들은 연암과 만나 새롭게 탄생하여 우리들 앞에 끊임없이 변주되며 나타난다. 연암이 걸어 간 길은 분명 하나뿐이건만, 『열하일기』에는 수없이 많은 길들이 곳곳으로 뻗어 있다. 그 길들은 우리를 매혹시키고, 기어이 사랑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열하일기』는 길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열하일기』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이 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에 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으랴. 우리들은 잘 안다. 삶 자체가 애초부터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라는 것을. 따라서 길을 말한다는 것은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이제부터 연암이 말하는 길들은 어디에, 어떻게 뻗어 있는지, 그리고 그 길로 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보려 한다.



길은 사이에 있다

숱한 고생 끝에 당도한 열하에서 연암 일행이 머문 날은 고작 엿새다. 그 엿새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장터의 요술일 것이다. 요술쟁이는 손을 비벼서 좁쌀만 한 물건을 만들고, 어느새 달걀, 수박으로 부풀리더니, 급기야 큰 새로 변신시켜버린다. 또 목에 걸린 계란을 귓구멍에서 후벼 빼내어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보다 더한 특수효과가 있을까 싶을 만큼 지금 보기에도 놀랄 기술이다. 구경꾼들이 감탄하고, 놀라고, 섬뜩해 하는 중에 어느덧 그게 요술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 정도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빈틈이 보여도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한번은 요술쟁이가 금호로병을 숨긴 채 구경꾼 노인을 느닷없이 도둑으로 몰아세운다. 어처구니없는 누명에 벌컥 화를 내보지만, 품속에서 병이 난데없이 떨어지자, 한 마디 항변도 못하고 슬그머니 뒤로 숨기 바쁘다. 별안간 거짓이 참이 된다. 눈앞에서 코 베는 꼴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베가는 코를 보고도 조롱이 두려워서 단 한마디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다. 연암 일행도 예외는 아니다. 요술쟁이들이 말똥으로 사람 희롱한다는 소리를 진작 듣고서도, 과일 앞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앞 다투자 그걸 따라 먹고 만다. 아뿔싸! 그 순간 입안에 가득한 말똥! 요술의 세계에서는 알고서도 당하는 것이 당연한 듯하다.

그래도 그것은 요술세계의 일이라며 웃어넘기면 그뿐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이런 일들이 숱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보자. 일상 곳곳에서 사람들은 온갖 한심한 것들에 매달려 있다. 아이들은 단 한 번의 입시 도박에 온통 매달리고, 대학생들은 취직에 꽃다운 청춘을 전부 걸며, 회사원들은 월급과 승진이라는 미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온통 매달리고 전부 다 걸어도 그 모든 것을 다시 빼앗긴다는 사실이다. 아이들과 학생들의 끝이 안 보이는 경쟁은 극히 소수의 성공을 뒤로 한 채 산더미 같은 사교육비만 빼앗아 갈 뿐이고, 회사원들의 월급은 언제나 초과생활비와 유흥비로 사라져 버린다. 헬스며, 골프로 건강을 챙기는 것 같지만, 밤마다 이어지는 야근과 술접대로 몸은 항상 망가져 있다. 뿐만 아니라 탐스런 음식을 먹어 치우듯 교양서며 문화상품을 경쟁적으로 소비하지만, 남는 것은 그릇된 욕망과 부스러기 지식들뿐이다. 이런 것들이 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웬일인지 기어이 쫒아간다. 다른 이들이 다투는 모습에 어이없이 속아 넘어간 연암 일행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매일 말똥을 삼키며 속고 또 속는, 그러면서도 계속 그 허망한 것을 바라보며 쫒아가는 요술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인 듯싶다. 그럼 이 요술의 망령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할까?

연암이 보기에 요술쟁이들에게 속는 것은 망령된 눈 때문이다. 연암이 비유한 소경 이야기에 따르면, 평생 눈을 감은 채 살아온 소경이 갑자기 눈을 뜨자 오히려 그 눈 때문에 세상이 보이질 않게 된다. 그래서 집을 찾아가는 길을 눈 때문에 잃어버리고 만다. 연암은 단호히 말한다. 소경이 집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면 도로 눈을 감으라고 말이다. 눈 밝아졌다고 자랑하지 말고,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려라! 이 얼마나 기이한 역설인가?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보라는 것도, 일단 손으로 잘 더듬어 가라는 것도, 하물며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어보며 가라는 것도 아닌, 오로지 도로 눈만 감으라니! 그러면 찾아갈 길이 보인다니 말이다.


사실 눈 뜨기 전 소경에게 눈 아닌 것은 없었을 것이다. 팔과 다리, 코와 귀 모두를 눈 삼아 길을 찾았을 것이다. 즉, 길을 찾는 눈이 신체 곳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눈을 뜨니, 산천이 마구 뒤섞이면서 만물이 눈을 가리고 마음에는 온갖 의심이 일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생물학적인 눈이 뜨이자, 신체 곳곳에 원래 치켜뜨고 있던 진짜 눈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눈을 뜨자 눈이 감겨버린 꼴. 소경은 눈을 뜨자마자, 눈을 잃고 길을 잃어 버렸다. 그렇다면 소경의 길은 어디로 나 있는가? 아마도 소경의 길은 눈도 아니고, 눈 아닌 것도 아닌 어떤 곳에 있는 듯하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다는 그 기이한 길이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중략)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중략)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한 법이지.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의 한 획을 변증하면서 선 하나를 가지고 가르쳤다네. 그런데도 그 미세한 부분을 다 변증하지 못해 ‘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라고 말했어. 이건 바로, 부처가 말한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는다’는 그 경지일세.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 그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 옛날 정자산 같은 사람이라야 될 걸.


-「도강록」, 『열하일기』 52p)


연암은 중국을 넘어가기 전 압록강 앞에 와서, 저편 물가 언덕을 바라보며, 길은 저기와 여기 ‘사이’에 있다는 말을 마치 출사표 던지듯 제출한다. 이 말대로라면 소경에게 진짜 눈은 눈과 눈 아닌 것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다는 그 길이 이 길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 추론이 맞는다면 눈을 감아야만 눈과 눈 아닌 것 사이에서 바라보게 되고, 그 자리에서 바라봐야만 뒤섞인 천지만물과 의심 때문에 생긴 이것과 저것이라는 혼란이 없어질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요술의 망령에서 벗어나서 길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연암은 그 ‘사이’가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은” 경지라며,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길이란 사이에 있는데, 길을 아는 이라야만 그 사이를 볼 수 있다? 참 난감한 노릇이다. 길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연암왈, 사이에 있지. 그럼, 사이는 어떻게 갈 수 있나요? 다시 연암왈, 그건 길을 아는 사람만 알 수 있지!? 길이 어디 있느냐 물으면 사이에 있다고 하고, 사이가 무엇이냐 물으면 길을 알아야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길로부터 사이를 물으면 다시 길로 대답하고, 사이로부터 길을 물으면 다시 사이로 대답하는 이 뫼비우스 같은 수수께끼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 있다는 그 사이의 길은 과연 무엇이고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 ‘사이’를 추적할 차례인 것 같다.

소경의 평등안 : 사이는 평등이다

1780년 6월 27일, 갑술일은 연암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일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간 날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사흘 전 ‘사이’를 말한 그 압록강으로부터 120리 떨어진 책문 앞. 여기서부터 ‘되놈’들에 대한 연암의 심경은 복잡해진다. 이곳에 오다 만난 되놈들에게 마두들이 야료 부리는걸 보고 한바탕 웃음거리로만 생각하던 연행단이다. 그러나 연암일행이 책문 앞에서 문 안쪽을 바라보더니, 그 모양새가 단아하고 시골티라곤 조금도 없는 것을 보고 기가 팍 죽는다. 아, 중국 동쪽 끝 촌구석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연경 같은 도회지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돌아 가버릴까?  

‘청은 오랑캐’라는 뿌리 깊은 편견으로부터 한편 멸시하는 마음이,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문물에 대한 시기심이 뒤엉키면서 연암도 심정이 아주 복잡해진다. 두 개의 상반된 가치가 뒤엉키며 혼란스러워진다. 아마 연암의 마음속에서 오랑캐와 한족, 청과 명이라는 위계적 가치가 슬그머니 치켜드는 것과 동시에 그 위계적 시선을 깨는 새로운 가치들이 뒤따라 나온 것일 게다. 위계적인 가치들과 그 위계를 깨는 가치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곳! 그곳이 바로 책문 앞이다. 아직 이 나라의 만분의 일도 못 보았는데, 벌써 이렇게 그릇된 마음을 먹다니, 우리의 정신은 참으로 허약하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오랑캐 되놈이라는 위계 때문에 청나라의 진면목을 보지도 않고, 청나라에 대해 폄하하는 그릇된 요술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예상을 휠씬 뛰어넘는 거대하고 세밀한 문물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기보다, 시기와 부러움이 앞서게 되었다. 이때 눈앞에 돌아다니던 장복이. 연암은 그 장복에게 “네가 만일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결정적인 순간, 연암은 주위 사람들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걸 예사로 하던 터였다. 자신의 본래면목 자체가 그들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맙소사! 장복은 도무지 생각이라곤 모조리 내던진 것인지, 중국은 되놈 나라라는 말만 되뇌며 손사래를 칠뿐이다. 어찌된 셈인지 연암일행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모두 되놈이라는 선입견 아래에서 모든 사유가 정지된 듯하다.

그러나 연암은 중국을 객관화하려한다. 이 상반된 가치와 위계들이 뒤엉킨 경계 앞에서, 편견 속에 파묻힌 자신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질문을 던짐으로써 정지된 사유를 스스로 돌파하려 한다. 네가 중국 사람이었다면 어떻겠느냐? 그래서 이 질문은 문제적이다. 이 질문에는 내가 상대가 되어 생각해 본다는 것, 그리고 상대와 나의 경계 속으로 스스로를 진입시켜 보는 것, 그래서 뒤엉켜 있는 온갖 가치들을 객관화하여 대등하게 바라보려는 의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이의 길은 갖가지 가치들의 경계로 직접 뛰어 들어가서 몸으로 부딪쳐야만 드러난다. 사실 경계에서의 부딪힘, 그 자체가 이쪽과 저쪽의 가치들을 위계 없이 평등하게 하는 힘이다. 바로 책문은 이런 힘들로 들끓고 있는 용광로인 셈이다.

이 때 월금 뜯는 소경이 책문 앞에 나타나자, 연암은 크게 깨닫는다. 어쩌면 ‘눈 뜬 소경’이 도로 눈을 감고 이 절묘한 순간에 다시 나타난 것일지 모르겠다. 이제 연암은 위계라는 눈을 감고, 평등이라는 눈을 떴다. 그래서인지 그 순간 책문이 활짝 열린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는 어떻게 가는가?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연암이 평등안에 이르기 위해 기존 위계들을 허물어뜨리는 방식에 있다. 그는 주류적 가치를 무너뜨리기 위해, 주류 가치의 반대항을 만들어 대척점에서 대항하기보다, 주류적 가치, 그 자체의 논리를 극한으로 밀고 들어가서, 그 극점에서 주류 가치 스스로가 파열되도록 만든다. 마치 극단적인 준법투쟁을 통해 자신을 규제하는 법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도록 하려는 것처럼. 다음 북학론을 말하는 장면을 보자.


그러므로 순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중략) 만일 장차 배우고 묻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선비들-인용자)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의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은 오랑캐들이다’하면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여, 중국의 옛 법마저도 다 함께 얕잡아 무시해 버린다.(중략) 진실로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의 정미함과 제작의 굉원함과 문장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고유한 옛 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북학의서」, 『연암집』하, 66쪽


연암이 당대의 선비들에게 말한다. 자, 당신들(선비들)이 믿는 그 논리를 한번 끝까지 따라가 보자. 당신들이 말하는 성인이란 순임금이나 공자 같은 성인일 것이다. 그런데 순임금이나 공자 같은 성인은 무엇이든 남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이들이다. 그렇다면 당신들 말대로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든 나가서 배워야 할 것이다. 그건 청나라가 되었든, 오랑캐가 되었든 구별할 이유가 없다. 잘 배우는 것만이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당신들이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해서, 배우지 않으려 한다면, 당신들은 성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자, 그럼 당신들은 스스로 성인이 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 당신들이 믿고 따르는 바로 그 기준이나 똑바로 지켜라!


우리는 여기서 아주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내 주류가치를 끝까지 지키지만, 오히려 지키기 때문에 허물어지는 그런 체험 말이다. 이처럼 주류 가치의 기원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가치의 왜곡된 입각점을 허물어버리고, 평등의 자리에 올라서는 이 장면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마치 어떤 가치가 본뜻대로 발휘되려면,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빛나려면 역설적으로 그 가치가 허물어져야만 한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치들은 스스로 무너진다.

이것은 ‘삼류선비론’에 와서 눈부신 빛을 발한다. 황제에서부터 서민들까지 머리를 깎으니 의리가 없다며, 개돼지나 다름없는 오랑캐에게서 뭐 볼 게 있겠느냐는 일류 선비들. 그리고 명나라를 위하여 만주족 오랑캐들을 소탕한 뒤라야 비로소 중국의 장관을 이야기할 수 있다며 비분강개하는 이류 선비들. 연암이 보기에 그들 모두는 그들이 보물단지처럼 기대고 있는 『춘추』의 본뜻을 스스로 어기고 있거나, 왜곡하고 있다. 성인이 『춘추』를 지을 때,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라고는 했을지언정, 중화의 훌륭한 문물까지 물리치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에 오랑캐가 있든, 한족이 있든 상관없이, 중화의 훌륭한 문물이 그곳에 있다면 그것을 모조리 배워서 우리의 유치한 것을 고치는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따라서 아무리 『춘추』의 뜻에 비추어 봐도, 연암에게는 중화는 중화일 뿐이고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이다. 그런데도 일류선비와 이류선비는 문제의 초점을 오랑캐냐 오랑캐가 아니냐에 초점을 맞추어 편견을 강요하며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화를 높이라는 『춘추』의 보다 근원적인 뜻에 비추어 볼 때, 중국의 모든 것은 오랑캐가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문하고 우리가 끝까지 배워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빛나는 장관이 우리 앞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나는 비록 삼류 선비지만 감히 말하리라 ‘중국의 제일 장관은 저 기와 조각에 있고, 저 똥덩어리에 있다.’(중략) 그러므로 나는 말하리라 ‘저 기와 조각이나 똥덩어리야말로 진정 장관이다. 어찌 성지, 궁실, 누대, 점포, 사찰, 목축, 광막한 벌판, 아스라한 안개 숲만 장관이라고 할 것인가.


-「일신수필」, 『열하일기』상 234쪽


비록 깨진 기와 조각이거나 똥오줌이더라도 알뜰하게 써먹기 위해 무늬를 아로새기거나,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다면 그것이 바로 중국의 제일 장관이라는 것이다. 조선 선비라는 자들이 개돼지로 폄하하는 오랑캐를 넘어서, 아예 중국 아무데나 널브러져 있을 똥덩어리가 바로 중국의 제일 장관이라고 말하는 이 장면에선 그저 말문이 막혀버린다.

결국 당대 주류 가치의 가파른 고개를 넘어 정상에 다다랐을 때, 혹은 연어처럼 거슬러 그 기원에 다가갔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한미한 기와조각과 똥덩어리의 세계, 바로 평등의 세계이다. 그것들은 주류가치들이 그 극점에서 스스로 무너지자 그 무너진 곳에서 새롭게 펼쳐진 세계이다. 이처럼 평등의 세계는 ‘이것’을 낮추고, ‘저것’을 높여서 적절한 평균을 만들어 내면 도달하는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오히려 ‘이것’과 ‘저것’, 각각의 본뜻을 철저히 추적하여 입각점에 거슬러 갔을 때에야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너무나도 철두철미한 세계이다. 그곳에서는 온갖 고수들이 맨손으로 만나는 그런 자리이다. 그래서 평등은 근원적인, 너무나 근원적인, 기원의 자리인 것이다. 이 기원의 자리가 바로 ‘사이’이다. 위계의 눈을 감는 자리, 이것과 저것이 뒤섞인 경계의 자리, 그리고 모든 것이 철두철미하게 대결하는 자리, 그래서 모든 것이 대등해지는 자리, 바로 사이는 평등이다!

법고창신 : 사이는 차이다

사실, 평등의 자리에는 온갖 것들이 갖가지 색깔을 띠며 흘러들어온다. 아니, 온갖 것들이 본래면목대로 자기 색깔을 온전히 드러낸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는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르다. 그런데 연암은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고만 말하며 멈추지 않는다. 연암의 법고창신으로 이를 살펴보자.

세상의 논자들은 문장을 짓는 방법으로 법고 해야 한다거나 창신 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법고는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문제고, 창신은 상도에서 벗어나는 게 문제다. 과거 사례나 기준에 무조건 얽매이거나, 반대로 과거를 무턱대고 거부만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고도, 창신도 아니다. 옛 것을 적용할 때는 그때그때 형세에 맞추어 미세한 변화들을 따라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만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면 동일성의 요술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연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초정집서」, 『연암집』상 24쪽


그러면서, 연암은 제대로 법고를 하려면 본받을 그 옛 것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을 주문한다. 손빈이 아궁이를 점점 줄여, 군사들이 겁먹고 도망간 것으로 보이게 하였다면, 이를 본받은 우승경은 병력이 열세에 몰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거꾸로 아궁이 수를 매일 늘려 구원병이 계속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때의 우승경은 과거 손빈이 처한 상황과 배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용한 것이다. 그러자 옛날의 손빈과 지금 ‘사이’의 변화가 보이고, 손빈이 적용한 그대로의 아궁이가 아니라, 우승경이 처한 상황에 맞는 아궁이로 재창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의 오판에 의한 승리’라는 전략적 공통성 위에서, 형세의 변화를 파악하고 아궁이의 수를 반대로 움직임으로써 창발적으로 전술적 차이를 구성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칠자나 공안파와 같이 법고나 창신이라는 것의 이데아를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의 뜻을 근본적으로 알아차리는데 있다. 고문의 권위와 새로운 것의 기이함이라는 요술에서 벗어나려면, 옛것과 나, 새로운 것과 나, 옛것과 새로운 것 ‘사이’를 근본적으로 알아야한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 공통성을 찾아내고, 그 기반 위에서 차이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바로 그때에야 본 받아야할 옛 것과 지금과의 변화가 보이고, 비로소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읽지 않고도 잘 읽은 사람(공명선)이 되고, 글을 쓰지 않고도 잘 짓는 사람(한신)이 되며, 배우지 않고도 배운 사람(노나라 남자)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공통의 배’를 타고 ‘차이의 바다’를 잘 헤쳐 나간 훌륭한 뱃사람들이었으리라.  

이를 다음과 같이 하늘과 땅과 해와 달, 썩은 흙과 버섯, 썩은 풀과 반디로 멋지게 표현한다.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드시 신비스러운 영물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버섯이 무럭무럭 자라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초정집서」, 『연암집』상, 26쪽


하늘과 땅, 해와 달은 시작도 끝도 없이 존재해 왔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변함없이 있어왔던 공통의 것들로부터 오히려 끊임없이 생명이 새롭게 탄생하고, 날마다 새롭게 빛이 나온다. 유구한 것들이 끊임없이 생명을 낳듯, 옛것으로부터 새것을 만들어내고, 썩은 흙과 썩은 풀에서 버섯과 반디가 나오듯, 썩은 곳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보면 법고는 옛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옛것과 지금 ‘사이’를 제대로 알고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창신은 그냥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옛것의 뜻을 차이의 바다로부터 길어 올리는 것이다. 법고는 지변을 통해 창신이 되고, 창신은 능전을 통해 법고가 된다(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바로 이 지변의 정신, 능전의 정신이 ‘사이’인 것이다.



이처럼 사이는 공통성의 기반 위에서 구성된 차이다. 이 차이는 해와 달과 같이 장구한 것에 터 잡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따라서 연암에게는 “같다”와 “다르다”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과 저것의 공통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만, 차이가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동일성의 요술도 이 차이의 결과를 정지된 이미지로만 포착하려고 할 때 전도된 것이다. 끊임없이 공통의 기반으로 되돌아가서, 이질적인 것들을 찾아내고 미세한 변화에 적용하는 것, 그리고 다시 그것들이 공통의 기반으로 돌아가서 공통 자체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지변의 정신일 것이고, 능전의 정신일 터이다. 어쩌면 문장은 법고에도 창신에도 없을지 모르겠다. 사이의 자리에 가면 법고와 창신이 온통 뒤엉켜 있어서, 옛글이 지금 글이 되고 지금 글이 옛글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今之文 猶古之文也). 자, 이제 사이는 평등의 가파른 고개을 넘어, 차이를 만드는 힘으로 우리 앞에 섰다.

백이론 : 사이는 드라마다

연암은 이제묘 앞에서 고사리나물 닭찜을 먹다가 백이, 숙제 이야기를 발칙한 기억과 함께 떠올린다.(「관내정사」, 『열하일기』, 36~40쪽) 시골 훈장이 고사리나물을 먹으며 소년들에게 “춘추 대의를 잊지 않기 위해” 시를 짓도록 한다. 이에 소년은 만일 무왕이 졌다면 역적이 되었을 것이고, 강태공 또한 역적을 비호한 꼴이니, 오늘날 보면 강태공도 오랑캐 놈 역적이지 않느냐며 비꼰다. 춘추대의에 비추면 틀린 말도 아니겠지만, 그러자니 무왕과 강태공이 졸지에 오랑캐 되놈이 되어버리고 마니, 그 딜레마 앞에서 훈장은 할 말을 잊는다.

고사리를 미처 챙기지 못하여 “백이, 숙제야,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느냐”며 통곡했다는 건량관, 덜 익은 대추를 먹고 배앓이를 하고서 난데없이 백이, ‘숙채’가 사람 잡는다며 뒹구는 마두 태휘, 소년의 비꼬는 시 앞에서 춘추대의와의 딜레마에 빠진 시골훈장, 이들 모두는 백이숙제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게 농담의 형태가 되었든, 정치적 표명이 되었든, 청나라 헤게모니 하에서 저 마다의 가슴에 아로새겨 있는 조선의 딜레마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고정된 가치, 동일한 이미지는 계속 덧씌워지며 백이, 숙제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고, 소화불량에 빠트린다.

주나라의 은나라 정벌은 당대의 반역이었다. 이 반역 행위에 대한 명분은 세 가지다. 첫째, 은나라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은나라 백성들을 구제해야 했다는 점, 둘째 은나라가 노성한 사람의 말을 저버렸으니, 통치능력이 없어졌다는 점, 마지막으로 은나라가 죄 없는 이를 죽였으니, 나라의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무왕의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한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 백성들을 저버린 민중의 적인가? 사람들은 백이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왕과 야합하는 길을 버리고 무왕의 대척점에서 항거하다가 산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으로 설정해버린다. 한편으로 태공이나 무왕은 이런 백이의 말을 뿌리치고 왕조를 뒤집는 반역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몰아세운다. 사실 길이 두 개가 있어서 딱히 어떤 하나를 선택했어야만 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백이에게는 백이가 가고 있는 그 길이, 무왕에게는 무왕의 길만 있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양쪽에 대해 어떤 것을 선택해야만 했던 것으로 설정해버리는 것은 중화사상의 위계 짓기가 “백이의 정치적 순결성”이라는 망상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것에 편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를 자신들에게 들이민 격이라고나 할까.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구경꾼들이 스스로 속은 것”(「태학유관록 환희기」, 『열하일기』하 332쪽)이다.


연암의 백이론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문제적이다. 비록 폭군(주왕)이더라도 효와 인이라는 당대의 윤리적 패러다임을 따라서,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며 폭군을 견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해 나갈 것인지, 윤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넘어서서 폭군을 끌어 내리고 새로운 체제(무왕)를 구성해 낼 것인지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정치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물음을 현대화한다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혁명적 민주주의, 쿠데타냐 혁명이냐와 같은 문제로 바꾸어 바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립구도에서는 적과 동지, 혹은 취하고 버리는 선택의 문제만 남게 된다. 이에 따라서 적만 없애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처럼 사태를 바라봄으로써, 싸움의 전략적 지평이 협소해져 버린다. 또 협소한 전략적 지평은 모든 저항을 단일한 적에게만 매달리게 하는 협소한 전술만을 낳는다. 다시 말하면 딜레마가 딜레마를 낳는 구도일 뿐인 것이다. 당대의 유학자들도 이 대립구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사태를 바라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항상 상호배타적인 선택에 직면한 것인 양 착각한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제시된 선택지 외에는 다른 길은 없는 것인 양 길들여 있다. 하지만 대개 그 선택지들을 뒤집어 보면 항상 “이익”이라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한다. 선택지를 받아들고 선택을 하려는 순간, 그는 “이익의 관점에서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길”만을 고려하는 것이 된다. 더더욱 문제는 “이미 만들어 놓은 길” 그 자체가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나 도덕들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길들이라는 점이다. 공평무사함 조차 공평무사함을 가장한 특정 사람들의 가치라는 점에서 허구적이거나 계산적이다. 항상 주체적으로, 자신의 가치관대로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고 하지만, 거꾸로 남들의 가치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택당하는 모순을 반복한다. 그래서 항상 맹렬히 달려간 이 길들의 끝에서 허망한 공백에 상실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목표라든가, 계획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고집하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이 망상들을 합리화하는 헛된 노력의 일부분이리라.

하지만 연암은 이 딜레마, 선택의 문제를 과감하게 버린다. 연암에게 이 딜레마는 단지 ‘인심’의 문제이다. 이것과 저것 중 어떤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은 사태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위태롭다. 백이와 무왕은 이런 인심의 지평을 훌쩍 넘어서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암은 백이나 무왕이 가고 있는 그 길만이 유일하였음을 보여주고, 나가서 결국 각자의 길들은 서로 만난다는 것을, 그래서 서로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므로 백이가 무왕을 비난한 것은 그의 거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며, 무왕이 백이의 봉분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그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의리를 밝게 드러냈을 따름이니, 천하와 후세를 염려한 점은 똑같았다.


-「백이론 상」,『연암집』중 88쪽


미자는 비간이 왕에게 충고할 것을 기다려 자신의 길을 갔고, 비간은 기자가 도를 전해 줄 것을 기다려 자신의 길을 갔으며, 기자는 태공이 백성을 구해줄 것을 기다려 자신의 길을 갔다. 그리하여 태공은 백이가 의리를 밝혀 줄 것을 기다려 자신의 길을 간다. 마침내 백이는 후세사람을 염려하여 의리를 밝히려 자신의 길을 간다.(「백이론 하」, 『연암집』중90쪽) 각자의 길은 선택의 길이 아니라, 그렇게 갈 수 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길이였다. 이 길 앞에서 어찌 이익을 물을쏘냐?(何泌曰利?)

연암이 보기에 중요했던 것은 백이의 편이냐, 무왕의 편이냐가 아니라, 백이와 무왕 ‘사이’에 흐르고 있는 “의리의 장”이었다. 의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백이와 무왕이 감당하는 이야기의 시간은 매우 장구하다. 백이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산에 들어가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리를 후세에 알렸지만, 무왕을 책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무왕은 비록 어쩔 수 없이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였으나, 후세에 자신을 본받지 않도록 백이의 봉분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후세에 자신보다 백이를 더 기리도록 하였다. “천하와 후세를 염려”하며 펼치는 고도의 정치적 전투와 의리! 이 전투의 적은 백이도 무왕도 아니라, 역사 사이에 흐르는 아주 긴 시간이다. 따라서 그들의 눈망울에 맺힌 시간 속의 이야기가 어찌 은미하지 않겠는가? 오직 서로를 기다리는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평등과 차이를 거쳐 다다른 ‘사이’에서는 단 하나 뿐인 길이 천개 만개 길들로 마구 뻗어 나간다. 사이는 드라마다!

변신과 명심, 자신의 길을 가다

사이는 평등하지만 차이로 범람하며 수많은 드라마가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다. 이 환상은 망상도 요술도 다 깨버린다. 하지만 이 사이의 세계는 사전에 정의되거나 지도로 그릴 수 없는 세계다. 이 세계는 항상 길이 끝난 곳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매순간 만들어 가야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어쩌면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이 항상 끝에 서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길을 만들고 다시 그 끝에 서 있고, 다시 만들고, 다시 그 끝에 서있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그 드라마의 각본을 만들고 스스로 공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소용돌이치면서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이며, “금방이라도 물에 빠질 것처럼 현기증”이 일어나는 곳이다 “1만 대의 전차, 1만 명의 기병, 1만 문의 대포, 1만 개의 전고로도” 형용하기 부족한 그런 곳이다.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온 몸을 덮는다. 그곳을 통과하려면 내 모든 것이 녹아버릴 것만 같다. 청을 앞에 두고 압록강을 건너려는 연암, 책문 앞에 선 연암, 아궁이로 적을 치려는 우승경, 배수진을 친 한신, 판첸라마를 알현하려는 연암 일행, 무왕 앞에서 말고삐를 잡는 백이, 주왕을 뒤엎으려는 강태공과 무왕. 이 모두는 길이 끝난 곳에 서 있다. 이제 돌아갈 길도 없는, 꼼짝없이 천애 고아들이 되어버린 상황. 어찌해야 할까?


때로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성인은 이 도를 운용하셨기에 세상을 버리고도 번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중략) 여기서 나는 성인도 되고 부처도 되고 현자도 되고 호걸도 되려니, 이러한 미치광이 짓은 기자나 접여와 같으나 장차 어느 지기와 이 지극한 즐거움을 논할 수 있으리오.”


-「관내정사」 『열하일기』하 100쪽


유리창 앞에 선 연암은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으려면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라고 한다. 평등과 차이가 범람하며 소용돌이치는 사이의 세계를 건너려면 차라리 바보나 미치광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가치를 버리고 미치광이의 경계에 서는 것, 그래서 범람하는 평등과 차이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 이것이 연암이 말하는 사이의 길이다. 그럼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려면 또 어찌해야 할까?


위험은 오로지 듣는 것에만 쏠리고, 그 바람에 귀는 두려워 떨며 근심을 이기지 못한다. (중략)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야구도하기」, 『열하일기』하 175쪽


떨어질 각오로 자신을 던졌을 때에야 펼쳐지는 세계, 그것이 사이이고, 그 극점에서의 마음이 바로 명심(冥心)이다. 따라서 현장 밖에서 머리로 생각하는 사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전에 만들어진 계획이란 그저 ‘그려진 길’에 불과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 길이 타인의 이익에 따라 구성된 길이라면 더 무슨 말을 하랴. 이를 답습하지 않고, 나를 버릴 생각으로 그 물에 뛰어들 각오를 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운명의 길을 기꺼이 대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이의 길이다. 우승경은 죽을 각오로 손빈이 되어 아궁이로 적을 치고, 한신은 죽을 각오로 배수진을 쳐서 적을 맞이했으며, 백이는 죽을 각오로 후세 사람의 마음이 되어 말고삐를 부여잡았고, 강태공은 죽을 각오로 백성의 마음이 되어 주왕을 쳤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길이였다. 이들에게는 어떤 타협도, 어떤 절충도 없다. 오직 자신의 길을 갈 뿐.



마지막으로 「매트릭스」 한 장면. 점프 프로그램을 로드하고 모피어스가 미스터 앤더슨에게 말한다. “모든 것을 버리게. 두려움, 의심, 불신까지도. 마음을 열어!” 그리곤 빌딩을 훌쩍 넘어서 가버린다. 자신이 들어선 세계가 리얼한 세계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빌딩 아래를 보면 겁이 난다. 여기서 떨어졌을 때의 고통이 내 의식을 지배한다. 실패에 대한 생각으로 숨이 가빠진다. 빨간약을 선택했던 것이 후회된다. 이 때 모피어스의 뒷모습을 보고 미스터 앤더슨이 자신을 다잡으며 하는 말, “좋아, 좋아 마음을 열자, 마음을 열자. 좋아. 문제없어!” 미스터 앤더슨이 ‘네오’가 되려면 앞으로도 넘어야 할 빌딩이 아주 많아 보인다. 앞으로 우리들이 만들어 가야 하는 수많은 길들처럼. 이제 요술의 세계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두렵지만 어쩌겠는가? 기왕에 들어온 세상, 어찌되었든 한 번 뛰어봐야지 않겠는가? 자, 이제 드라마를 만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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