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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우정의 귀환, 우리의 삶을 '정치'하라!

by 북드라망 2012. 7. 2.

자기배려와 우정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며칠 전 나는 옛 친구와 만나 점심을 같이 했다. 나로선 오랜만의 해후였다. 사오년 만에 본 친구의 얼굴은 부쩍 나이 들어 보였다. 살아갈수록 삶은 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고단하고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뻔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회사생활, 가족들 사는 모습, 취미생활, 노후 걱정 같은 것들.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에 그의 입에서 또 다른 친구들의 근황이 흘러 나왔다. 어떤 친구들은 파산 이후 몇 년째 도망 다니고 있었고, 어떤 친구들은 병으로 심하게 고통스러웠으며, 또 어떤 친구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어서 자신도 부인과 헤어지고 혼자 산지 오래되었다고 덧붙였다.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친구들의 삶은 왜 그렇게 백전백패뿐인가. 볼테르가 말하길 “불운도 홀로 겪지 않으면 덜 불행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불운한 사람들이더라도 두 그루 나무처럼 서로에게 의지한다면, 스스로를 강화하여 폭풍우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친구 하나 없이 곤경에 처해본 사람이라면 곤경 속에서 홀로 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안다. 볼테르의 말대로 그런 불운을 염두에 둔다면, 살아가는데 친구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오래전 뭔가 영업한답시고 만났던 친구들의 옛 모습이 떠올라 잠시 울컥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들이 내 곤경을 대신 견뎌줄 거라고 여긴다면 심각한 오해일 것이다. 친구가 위험에 빠진 사람을 여러 방식으로 도와줄 순 있어도, 그 사람 대신 그 곤경을 겪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말하면 친구가 아무리 도와준다손 치더라도 종국에 위험을 직접 돌파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예컨대 아픈 친구 대신 내가 전신불수가 되고, 친구를 즉시 회복시켜줄 순 없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 정작 최종심급엔 홀로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친구가 필요한 것은 위험할 때 위험을 같이 헤쳐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는데, 결정적인 순간엔 혼자 위험을 돌파해야 한다니 말이다. 그리고 만일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관계라면, 그것을 특별히 ‘친구’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서로 필요한 것들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친구라고 부르기보다 동료 직원으로, 회사 고객으로 불리는 게 더 마땅해 보이니 말이다. 이처럼 우정을 좀 더 깊이 파헤쳐 들어가 보면 불현듯 하나의 아포리아로 다가온다. 혹시 친구는 현실적으로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일뿐, 상상적인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드는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 <자화상>



에피쿠로스 : 바람직한 우정과 유용한 우정

쾌락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kuros)도 이 아포리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에피쿠로스가 아테네 교외에 ‘우정의 정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우정과 사색을 즐겼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정원 공동체의 구성원에는 여자와 노예는 물론 심지어 창녀도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오로지 자기 자신과 이 정원 공동체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평생 그것을 실천한 후, 죽을 때 자신과 함께 철학을 탐구하면서 늙기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남기고 떠난다. 그만큼 그에게 우정은 삶의 중대한 요소였다. 그토록 우정을 중요하게 여겼던 그는 우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ⅩⅩⅧ 영원히, 혹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서움이란 없다”고 용기를 준 판단(gnome)은, 제한된 조건하에서는 우정을 통해 안전이 가장 잘 확보됨을 깨닫는다.”


─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ⅩⅩⅩⅨ 항상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며, 도움을 우정과 결부시키지 않는 사람도 친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호의의 대가로 보상을 취하며, 후자는 미래의 희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바티칸 금언」


에피쿠로스는 무서움을 없애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우정’이라고 말한다. 일단 닥칠 위험의 무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에피쿠로스는 출발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볼테르가 말했던 바를 에피쿠로스 버전으로 바꾸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예컨대 폭풍우가 닥칠 것을 염두에 둔다면, 친구는 폭풍우를 헤쳐 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라야 할 것이다. 그는 신문 쪼가리라도 들고서 비를 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바로 이어서, 그렇다고 ‘항상’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덧붙인다. 아마도 친구는 도움을 ‘항상’ 청하는 사람이여서는 안 되고, 맥락상 아주 신중하게 고려해서, 정말 절실한 상황에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정이 현실적인 도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 양, 고상하고, 순결한 것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이다. 왜냐하면 기대할 만한 도움이 애초에 없었다면, 미래에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희망을 꺾어버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렇게 되면 친구를 사귄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정은 위험에 대한 안전을 위해서 어떤 무엇보다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정은 일단 미래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도움을 요청해서도 안 된다. 이처럼 우정은 유용해야만 성립될 수 있지만, 항상 유용하기만을 바라고 대하지는 않는 그런 관계이다. 즉 우정은 유용성과 무용성의 경계 속에서 구성되는 아주 묘한 관계인 셈이다. 얼핏 보기에 유용할 것이라는 점에서 여느 서비스관계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항상 유용하게 대하지는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서비스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유용하지만 유용하지 않은 이 경계 위에서 우정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ⅩⅩⅩⅣ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


─에피쿠로스, 「바티칸 금언」


그 경계에서는 친구들의 현실적인 도움이 우리를 돕지 않는다. 이를테면 폭풍우에 맞서서 친구의 신문 쪼가리라도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고는 있지만, 혹시 폭풍우에 그 신문 쪼가리가 역부족일 뿐 아니라, 다 젖어 무용지물이 되더라도 우리는 그 친구들을 떠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폭풍우에 휩쓸릴 때에도 이 친구가 같이 있기 때문에, 이 친구가 다시 나를 도와줄 것이란 믿음을 가져야만 폭풍우에 더 잘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믿었던 도움은 현실화되지 않고 영원히 지연될지도 모른다. 이제 그 지연에 상관 않는 믿음 자체가 안전을 준다는 말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우정이 난관을 ‘대신’ 돌파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단지 그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 난관을 대면할 수 있게 할 믿음을 줄 뿐이다. 따라서 우정이란 오로지 그런 아포리아 앞에 ‘같이’ 있어 주는 것이다. 도와줄 거라는 믿음으로 같이 있기에 두렵지 않은 것이지, 대신 난관을 해결해 줄 것이라서 두렵지 않은 게 아니다. 이 믿음은 유용성에 대한 기대가 무너져도, 그때마다 그 기대를 뒤로하고 계속된다. 결국 이 경계에서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 경계에 이르면 유용성의 내용 자체가 변형된다. 친구가 주는 도움이 현실화되느냐에 무관하게 우정이라는 형식 자체가 유용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정의 유용성은 기이한 유용성, 무용성의 유용성, 도달불가능한 유용성, 텅 빈 유용성이다. 그래서 이제 에피쿠로스는 우정 그 자체로 올라간다.
  


히에로니무스 보슈, <쾌락의 동산>


ⅩⅩⅢ 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di'heautên) 바람직하다(hairetê). 비록 그것이 이득으로부터(apo tês ôpheleias) 시작하기는 하지만…….


─에피쿠로스, 「바티칸 금언」


ⅩⅩⅦ 일생 동안의 축복(복락, makariotês)을 만들기 위해서 지혜(sophia)가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의 소유이다.


─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우정은 분명히 현실적인 층위에서는 어떤 이득(ôpheleias), 즉 유용성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우정은 그 자체로서도 바람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에피쿠로스에게 우정은 유용성과 바람직함(hairetê) 사이의 양립불가능한 대립으로 드러난다. 그것 자체로도 바람직하다는 것이 어떻게 미래의 유용성과 같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라면 유용성은 불필요한 것이고, 존재이유가 유용성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그것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역설적으로 미래에 유용할 것이라는 희망, 즉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함으로써 바람직해진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양립불가능한 것들의 대립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서로 유용한 관계를 유지할 때만, 또 계속 그런 관계를 생산해낼 때만 우정은 바람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뜻밖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현실화 되어서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바로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즉시 자신의 복락을 가져온다. 여기에 이르자 유용성의 내용은 어떤 실질적인 도움이 현실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는 것으로 전환된다. 우정이라는 형식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 자체가 복락, 쾌락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생 동안의 축복(복락, makariotês)을 위해 필요한 지혜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키케로 : 보편적인 우정과 탁월한 우정

그렇다면 우정은 설사 친구가 직접적인 유용성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 자체로서 바람직하다. 이 바람직함은 현실적인 층위에서는 유용성을 통해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설사 유용성이 없더라도 원래부터 실재하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키케로(Cicero)에 와서, 우정의 바람직함은 유용성이란 기원 자체를 거부하는 기묘한 단계로 발전한다. 키케로는 아프리카누스(Africanus)와의 관계를 회고하며 우정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묘한 전회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도덕적, 지적 자질도 더 강한 법이라면서, 이런 자질을 갖고 있다면 어느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지만, 친구가 있다면 더욱 그의 능력을 강화시켜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우리가 서로에게 호의를 보이고 선심을 쓰는 것은 나중에 보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네. 우리는 선행으로 폭리를 취하지는 않네. 우리가 호의를 베풀려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일세. 우리가 우정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 이익을 바라서가 아니라 우의 자체가 충분한 이익이기 때문일세…그리고 우정이 인간의 약점이 아니라 본성[사랑과 호의-인용자]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은 우정을 더욱 위엄 있고 진실한 것으로 만들어 줄 걸세. 만약 이익이 우정의 접착제라면 이익이 사라지면 우정도 풀어질 것이네. 하지만 본성은 바뀌지 않으므로 진정한 우정도 영원한 법이지. 이것이 우정의 기원에 관한 내 견해일세.


─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9장


우정의 바람직함은 우정 자체의 이익으로부터 정당화된다. 달리 특별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무서움을 피하거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라는 인간의 의존적 약점 때문에 성립된 것이 아니다. 만일 우정이 이런 약점에 기생하는 것이라면 우정은 사람들을 더욱 의존적인 관계로 구성하는 일종의 위장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키케로가 보기에 우정은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용성은 우정이 산출하는 여러 가지 효과 중 하나일 뿐, 우정은 그보다 앞서서 구성된다. 그래서 키케로는 우정이야말로 그 어떤 인간사보다 우선시해야한다고 권한다. 우정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우정만큼 적절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5장). 이 지점에 오자 우정은 단순히 유용성을 기반으로 이합집산 하는 관계라는 관점을 떠난다. 사람들은 사랑과 호의라는 공동의 성향 때문에 서로 끌리고, 서로 결합하게 되어, 서로 함께하고, 서로 상대방을 즐기고, 서로 성격이 닮아간다. 오히려 이제 우정 자체가 관계를 구성시켜주는 근본적인 원리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정이 긍정적 감응을 통해서 정의된다는 것은 만남을 통해 서로 능력의 증가를 야기하는 관계임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서 선의의 유대를 제거해버린다면, 가정도 도시도 존립할 수 없을 것이며, 농사도 존속될 수 없을 것이네. 이 점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는 불화와 적대감의 결과를 보면 우정과 화합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걸세. 대체 어떤 가정이, 어떤 도시가 증오와 분열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단 말인가? … 자연과 우주 속의 만물은 정지해 있는 것이든 움직이는 것이든 우정에 의해 결합되고 불화에 의해 분해된다.


─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7장)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전복을 지켜보게 된다. 유용성이 우정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정이라는 본성적 행위가 우선이고, 그 효과 중 하나로 유용성이 발생한다. 현실적인 층위에서는 유용성이 선차적이고, 그로부터 우정의 관계가 도출되는 것처럼 전도되어 보이지만, 조금만 따져 들어가서 보면 유용성이란 우정의 효과로서 부수적으로만 따라 드러날 뿐이다. 사랑, 호의, 유대가 보편적이지, 유용성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용성은 이런 우정의 바람직한 모습을 은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정은 가장 본성에 부합한 관계이고, 또한 본성에 부합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일 것이다. 그런데 키케로는 미덕이 우정을 낳고 지켜준다고 보고, 미덕 없이는 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그것은 가장 본성에 부합한 상태가 미덕을 지닌 상태일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정과 미덕은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합된다. 급기야 우정은 미덕을 갖고 있는 탁월한 자들 간의 관계로만 드러난다.


자신의 내면에 사랑받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우정에 합당하다네. 그런 사람들은 드물다네. 탁월한 것은 무엇이든 드문 법이며, 어떤 종류의 것이든 모든 면에서 완전한 것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사에서 어떤 것도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선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네. 그들은 마치 가축을 고르듯 가장 큰 이익이 기대되는 사람들을 친구로 고르지. 그렇게 친구를 고른다면 그 자체 때문에,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자연스러운 우정을 그들은 맛보지 못할걸세. 그런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우정의 힘이 어떤 것이고 얼마나 큰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서는 경험하지 못할걸세.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사랑한 대가를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네. 그리고 이와 똑같은 감정을 우정에 적용하지 않는 한 진정한 친구는 결코 구할 수 없네. 진정한 친구는 제2의 자아이기 때문이네.


─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21장



이는 참으로 묘한 점이다. 우정이란 자연과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탁월한 것들만이 획득할 수 있는 희소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자신이 선한 사람(미덕이 있는 사람)이 되고, 그런 다음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22장). 왜냐하면 사랑받을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탁월한 사람만이, 현실적인 층위의 유용성을 넘어서서, 관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키케로는 그런 관계의 상대로서, ‘진정한 친구’를 ‘제2의 자아’라고 단언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그런 자연의 이치에 맞게, 다시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과 ‘똑같은’ 감정으로 친구를 대하지 않는 한 진정한 친구를 구할 수 없다. 즉 우정이 자연의 이치가 되는 것은 우정 자체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진정한 친구란 제2의 자아로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와의 관계인 우정은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로서 결정적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정은 모든 유용성에 대한 의존성을 뚫고 진정한 타자, 바로 자기와 만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자신과 친구되기’이다. 결국 우정의 행위는 소수의 탁월한 자들이 자기를 배려하는 행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배려의 필연적인 한 형태로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유용성은 자기와 자기의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효과들 중 하나일 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형태변환으로서, ‘해방된 자기’의 확장이다. 자기배려는 우정의 형태를 취하여, 유용성에 구속된 사람과 사람간의 노예적 관계를 넘어선다.


세네카 : 자기 없는 자기, 우정의 정치

그러나 이 관계는 자칫 위험한 관계로 오해될 수 있다. 이런 논리라면 모든 사물과의 관계를 퇴행적인 자기, 자기 이익에만 충실한 자기 속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스럽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우정인양 알고 있거나, 오히려 그것을 우정이라고 위장하고 은폐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모두 본성에 의해 호의적으로 발생한 우정으로 본다면, 우정은 다시 노예적 관계에 붙잡히고 말 것이 분명하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네카를 경유하여 들어가 본다.


현자는 또, 운명을 두려워할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아. 왜냐하면 현자는 자기의 노예나 재산이나 지위뿐만 아니라, 자기의 몸이나 눈과 손, 무릇 인간에게 생활을 애착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 아니, 자기 자신까지도 모두가 허락을 받아 잠시 맡겨진 것으로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며, 자기는 자신에게 빌려서 가져온 것이고, 돌려 달라는 요구가 있으면, 한숨짓거나 슬퍼하지 않고 돌려주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또, 현자는 자기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 모든 것을 부지런하게, 또 용의주도하게 하겠지. 마치 신을 우러러보며 신을 믿는 자가, 신탁 받은 재산을 지킬 때에 하는 것처럼.


─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하여』, 11장


먼저, 여기서 ‘자기’는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자기의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것은 허락을 받아 잠시 맡겨진 것이다. 돌려달라는 요구가 있으면, 즉시 돌려줘야 하는 대여물이다. 그런 대여물들을 자신에게서 차감하고 나면,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자기’란 사실상 없다! 세네카의 관점에서 ‘자기’라는 대여물을 돌려줄 채권자는 바로 자연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이 돌려주기를 요구한다면, “그대가 주었을 때보다 더 나아진 영혼을 돌려받으시오! 나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고 주춤거리지 않을 것이오. 나는 그대가 준 것을 흔쾌히 돌려줄 각오가 되어 있소. 자, 가져가시오!”(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하여』 11장)라고 말할 거라고 호언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자연으로부터 빌린 것, 즉 ‘타자’로 상정하고 있는 급진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의 ‘자기’는 타자들로만 구성된, ‘자기 없는 자기’이다. 이 ‘자기’는 타자들과 타자들의 관계, 바로 이것 자체가 우정의 구성물인 셈이다. 이런 ‘자기’ 위에서라면 앞서 말했던 퇴행적인 자기, 자기 이익에 충실한 자기는 애초에 존립근거 자체를 잃고 만다. 결국 이런 자기 개념 위에서의 자기배려는 ‘자기’라는 허구적 실체조차 해체시켜 버린다.
 
이런 ‘자기’ 관점을 우회하여, 키케로가 통치와 우정을 연결하여 설명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우정이 지속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다고 하면서, 대중의 경우 금전욕, 그리고 상류층의 경우 관직과 명예가 바로 그런 장애물의 하나로 든다. 이런 장애물이 나쁜 우정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따라서 올바른 사람은 누구나 이 점을 명심해두어야 하네. 만일 그[통치자, 관직에 있는 자-인용자]가 멋모르고 우연히 그런 종류의 우정에 빠져들게 된다면, 친구가 국가에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도 친구를 저버릴 수 없을 만큼 자신이 친구와 결속되어 있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이네. 범죄자는 벌을 받아야 하고, 추종자들도 주동자들 못지않게 엄한 벌을 받아야 하네. … 따라서 불한당들과의 그런 협력은 우정이라는 미명으로 비호받아서는 안되네. 오히려 그런 결탁은 가장 엄중한 벌로 다스려야 한다네.


─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9장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엄한 벌을 주어야 한다는 통상적인 이야기보다, 통치자와 대중의 정치적 관계를 우정의 관계로 묘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관계는 금전욕과 명예욕 때문에 깨질 위험이 큰 관계이다. 통치자들은 퇴행적인 자기, 자기 이익에만 충실한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들에게 둘러싸여 나쁜 우정에 빠져들 수 있다. 아울러 대중들도 그런 불한당들을 추종하여 나쁜 우정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이런 경우, 친구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변명을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에 우정을 맺어준 것은 무엇보다도 미덕에 대한 서로의 신뢰로 시작된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 신뢰를 깨어버린 셈이니까 말이다.

사실 우정이 탁월한 자들 간의 관계라고 했을 때 이런 분할은 예견되었던 것이다. 푸코의 말대로 자기배려는 이미 생활방식의 선택, 다시 말해서 이런 방식의 생활을 선택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간의 분할(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148쪽)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통념적인 것으로는 단순히 성취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 존재 그 자체 때문에, 또 인간 공동체에 단순히 속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드디어 우정은 정치적 관계로서 나타나고, 좋은 우정이란 퇴행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깨고, 그런 의존적인 자기를 해방시키는 특별한 정치행위로서 드러난다. 마침내 우정은 통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관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자기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묘한 순환이다. 사랑과 호의라는 본성에 의해 탁월한 자들끼리의 관계로 자연스럽게 나타났던 우정. 그러나 그 우정은 유용성을 계속 지녀야만 미래의 희망으로 계속 존속될 터인지라, 현실적인 층위에서는 불가피하게 유용성 가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정은 퇴행적인 자기를 만들어낼 위험에 항상 처한다. 그래서 다시 우정은 퇴행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자기’ 자체를 매번 깨는 방식으로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와 작동한다. 그것은 아주 공격적이고 해체적인 귀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벗이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벗을 사귈 수 없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말로 이것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 ‘자기’는 우정과 더불어, 우정과 싸우며, 매번 깨지는 형태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정은 퇴행적인 자기를 깨서 항상적으로 ‘자기 없는 자기’로서 존재하게 하는 자기배려의 형식이자, 해방의 정치인 셈이다. 


밖으로부터의 도움을 구하지 말고 남들이 주는 안식도 구하지 마라. 너는 똑바로 서야지, 똑바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 (아우렐리우스, 『그리스로마 에세이』, 42쪽)

친구들의 불우한 근황은 나로 하여금 유용성이 깨진 자리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아주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불우한 친구들 때문에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현실적으로 필요해서 만나고 있는 듯 했다. 아마 이제 그런 관계를 넘어서 순수하게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 같다. 그렇다고 울컥해진 마음에 그 친구들을 동정하고 만다면, 그것은 내 자신의 찜찜함을 손쉽게 지워버리기 위해 한낱 허위적인 제스처로 퇴행하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 동정심만을 쌓아 올릴 뿐, 서로의 생활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 그것은 우정이 아니라고도 생각되었다. 내가 친구를 떠나기보다, 우정이 우리들을 떠나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자연과 우주 만물이 이미 우정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탁월한 자들만이 우정에 합당하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이미 탁월한 자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버젓이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우정은 항상 탁월한 자들에게서 생성될 뿐 아니라, 퇴행하기도 거듭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결국 우정은 퇴행과 전진을 거듭하며 우리를 재구성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일 거다. 그래서 나는 사실 순수하리라 믿었던 그 허위의 우정이 떠난 자리에서라야, 이를테면 백전백패 이후에야, 새로운 우정은 꽃피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정치로서, 나와 친구들의 관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힘으로서 발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런 힘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도 또한 동시에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자명하다고 느꼈던 친구들에게 달려가서, 봉급과 승진에 말려들지 말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쫓기지 말고, 금권과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새로운 자기, 새로운 활동, 새로운 공동체를 제안하는 것, 아마 그런 제안의 용기를 내보는 것, 바로 그것이 나에겐 새로운 삶을 예비하는 우정의 귀환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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